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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가 2미터가 넘는 두루말이 문서이다.(63×210cm) 내용은 간단하다. 1593년 겨울,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 반이 넘은 시점에 경주에 사는 이준이라는 사람이 대구에 사는 정익으로부터 노 1구를 사고 관의 공증을 받은 문서이다. 이 문서는 5매의 문서가 점련되어있다. 편의상 앞에서부터 문서의 번호를 부여하여, 각 문서가 가지고 있는 고문서학적인 의미를 음미해보기로 한다. 이 문서는 경주 독락당에 내려오는 문서인데, 노를 매입한 이준(1540~1623)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이다. 아버지 이전인(李全仁)과 함께 회재를 현양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을 바치고 군공을 세워서 허통(許通)도 되고 무과에도 합격하였다. 경산 현령, 만경 현령과 청도 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림1] 1593년 노비 매매 입안 ①번 문서는 1594년 정월에 이준이 대구부에 올린 소지이다. 대구에 사는 충의위 정익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노 1구를 샀으니 첨부된 문서를 상고(相考)하여 입안(立案)을 성급(成給)해달라는 청원서이다. 소지(所志)라는 문서가 어떤 일을 관에 청원을 하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청원에 대해서 대구부사는 “증인과 필집(筆執)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처분을 내렸다. 이러한 처분을 제사(題辭) 또는 제음(題音), 뎨김이라고 한다. 대구부사는 이 문서를 처리하는 담당자 형방(刑房)에게 지시하였다. 날짜는 1월 13일이다. “증인과 필집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한 것은 매매 당사자 이외에 이 매매에 간여한 증인과 문서 작성자인 필집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매도자와 매수자 이외의 제3자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집도 물론 증인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지를 올리기 이전에 노비 매매의 당사자 사이에서는 노비 매매 계약서를 쓴다. 그것이 ②번 문서이다. 토지나 노비, 가사(家舍) 등 재물을 매매하는 문서를 명문(明文)이라고 하였다. 명문이라는 문서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첫 행에 날짜와 매수인을 쓴다. 즉 “아무 년 아무 달 아무 날 아무개 전 명문[冒年某月某日某人前明文]”이라고 쓴다. 그 다음 행에는 “여기에 명문을 쓰는 것은[右明文事段]”이라고 전제를 한 후, 매도의 사유, 매도 대상 물건, 물건의 가격을 명시한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에 “만약 잡담이 있으면 관에 고하여 변정할 것[若有雜談有去等 持此文 告官辨正事]”라고 하여, 매매 사실에 대하여 다른 말을 할 경우에는 이 문서를 가지고 관에 가서 바로잡으라는 구절을 넣었다. 본문 뒤에는 매도자, 증인, 필집 등이 신분이나 직역, 성명을 쓰고 수결(手決)이나 수촌(手寸), 수장(手掌)을 한다. 이 문서는 관에 올리기 이전에 매매 당사자 간에 작성된 문서이기 때문에 이를 백문 문기라고 한다. 노비 매매 명문은 소지를 올리기 며칠 전인 1593년 12월 25일에 작성되었다. 노 1구를 매매하는 문서의 사연치고는 매우 길고 그 사연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토지나 노비를 매매하는 문서에서는 매도를 하게 된 사정을 이처럼 자세하게 쓰지는 않는다. 그냥 “긴요하게 쓸 일이 있어서[要用所致以]” 또는 “가난해서[艱難所致以]” 라고 매도 사유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는 매도 사유를, “난리가 나서 도망다니고 유리하다가 매도자인 정익의 외서조모가 굶어죽고 또 얼외삼촌 섭명도 역시 뒤를 이을 사람도 없이 굶어죽었는데, 두 사람의 상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다. 외삼촌인 이응명의 처는 예천에 있고, 외삼촌의 숙모는 충청도 면천 땅에서 유리걸식하고 외삼촌 숙부 이좌명도 창녕에 있으면서 각각 동서로 유리걸식하여 땅에 묻을 겨를이 없었다. 매도자인 정익의 아비가 난리가 지나서 고향 대구에 돌아오니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상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 1구를 판다”고 장황하게 매도 사유를 늘어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의 값을 높게 쳐 줄 리도 없건만. 이렇게 장황한 사연을 쓴 이유는 매도 대상인 노 만희의 소유자가 다 죽고 없어서 가까운 근친인 정익의 아버지가 정익에게 그 노를 별급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노를 매도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매매 명문을 첨부하여 공증을 해달라고 하는 청원을 올리니, 관에서는 증인과 필집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필로 쓴 노의 주인인 정익과 그 문서를 작성할 때에 증인이 되었던 손처약과 서희원을 데리고 대구 관에 갔다. 대구 관에서는 노의 주인인 정익에게서 사실 확인을 하였고,(③번 문서) 증인인 손처약과 서희원에게서도 사실 확인을 하였다.(④번 문서) 이러한 사실 확인과 함께 제출한 노비 문서를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대구 관에서는 사급입안을 써주었다.(⑤번 문서) ①번 문서 : 이준이 대구부에 올린 소지 * 이두 부분은 밑줄을 그어 표기함. 원문의 모습을 살리면서 구두가 끊어지는 부분에서 띄어쓰기를 했음. 이하 같음. [그림2] ①번 문서 : 이준이 대구부에 올린 소지 慶州居
主簿 李浚
右謹言所志矣段 粘連文記相考 立案成給爲只爲 行下向敎是事 府使 處分 萬曆二十二年□□□日所志 [題辭] 十三刑/ 訂筆率來/向事 行使 [署押] 경주에 사는 주부 이준 여기에 삼가 소지를 올립니다. 점련한 문기를 상고하여 입안을 성급해주십시오. 처분해주십시오. 부사 처분 만력22년(1594) □□□일 소지 [제사] 증인과 필집을 데리고 올 것. 행 부사. [서압] ②번 문서: 1593년 노비 매매 명문 [그림3] ②번 문서 : 1593년 노비 매매 명문 萬曆貳拾壹年癸巳十二月二十五日
主簿 李浚處 明文
右明文爲臥乎事段 孽外三寸攝明亦 因變亂奔竄流離之際 矣外庶祖母飢餓 身死爲去乙 假葬後同叔亦 亦爲無後飢死 兩喪骸骨 棄在草土爲乎矣 外三寸故李應 明妻段 遠在醴泉爲遣 外三寸叔母李海佶妻段 流丐忠淸綿川地爲遣 外三寸叔 李佐明段 亦在昌寧 各竄東西 未遑掩土爲白有去乙 矣父亦 經亂還鄕 目不忍見乙 仍于 同攝明矣衿得使喚爲如乎 婢延今三所生奴萬景矣年貳拾貳壬申生 身乙 棺槨埋葬爲要以 別給及立案導良 楮貨四千張價正木貳拾疋 依數捧上爲遣 同奴後所生幷以 永永放賣爲去乎 後次良中 外三寸中某矣徒乃 爭訟爲去等 此明文告官辨正事 奴主 自筆 大丘居 忠義衛 鄭釴 [着名][署押] 證 同府居 幼學 孫處約 [着名] 同府居 幼學 徐希遠 [着名] 만력21년(1593) 계사년 12월 25일 주부 이준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쓰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얼외삼촌 섭명이 난리가 나서 도망다니며 떠돌아다닐 때에 저의 외서조모가 굶어죽었습니다. 임시로 매장을 한 뒤에 위의 외삼촌도 역시 후사(後嗣) 없이 굶어죽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이 나서 해골이 들판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외삼촌 이응명의 처는 멀리 예천에 있고, 외삼촌 숙모인 이해길의 처는 충청도 면천 땅에 유리걸식하였고 외삼촌 숙부 이좌명도 창녕에 있으면서 각각 동서로 유리하여 흙을 덮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의 아비가 난리가 지나서 고향에 돌아오니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관곽(棺槨)을 마련하여 매장해야 해서 위 섭명이 깃득[衿得]하여 부리던 비 연금의 3소생 노 만경(나이 22, 임신생)을 별급 문기와 입안을 가지고 저화 4000장 값 정목 20필을 받기로 하고 위의 노 후소생과 함께 영원히 방매합니다. 나중에 외삼촌 중에 누구라도 쟁송하거든 이 명문으로 관에 고하여 변정할 것입니다. 노주 자필 대구에 사는 충의위 정익 [착명][서압] 증 같은 부에 사는 유학 손처약 [착명] 같은 부에 사는 유학 서희원 [착명] 매도자인 정익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가 없으나 충의위라는 직역을 쓰고 있다. 충의위는 조선 초기에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의 3공신 자손들이 주로 소속되어 군역 대신 대우를 받도록 만들어진 특수층에 대한 일종의 우대 기구였다. 공신의 후손이므로 상당한 정도의 재산과 가격(家格)을 가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증인으로 참여한 손처약(1556~?)과 서희원은 모두 대구의 명가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도 이름이 높은 사람들로 보인다. 손처약은 임란 때의 의병 활동을 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의 동생으로 늦은 나이인 58세 때에 진사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③번 문서 : 1594년 노주 정익의 초사 [그림3] ③번 문서 : 1594년 노주 정익의 초사 甲午二月十五日
忠義衛 鄭釴 年卄三 白等 慶州居李浚處 奴子放賣 眞僞推考敎是臥乎在亦 變亂 而來 庶母餓死 掩埋無人 棺板 買得爲要 父前別得奴萬京年 二十八壬申生矣身乙 楮貨依法捧 上 後所生幷以 自筆俱訂 永 賣的只白乎事 白[着名] 行府使[署押] 갑오년(1594) 2월 15일 충의위 정익 나이 23세. 진술합니다. 경주에 사는 이준에게 노를 방매한 사실의 진위를 추고하셨습니다. 변란이 일어난 이래로 서모가 굶어죽었는데 묻어줄 사람이 없고 관과 곽을 살 필요가 있어서, 아버지께서 별급해준 노 만경(나이 28, 임신생)을 저화를 법대로 받고 후소생과 함께 증인을 갖추어 본인의 자필로 써서 영구히 매도한 것이 확실합니다. 백 [착명] 행 부사 [서압] ④번 문서 : 증인 손처약, 서희원의 초사 [그림5] ④번 문서 : 증인 손처약, 서희원의 초사 同日
幼學 孫處約 年四十
幼學 徐希遠 年三十 白等 鄭釴亦 李浚處賣奴時 參訂与否推考敎是臥乎在亦 同鄭釴亦 其庶母欲葬 奴萬京 乙 李浚處價本依數捧上 後所 生幷以 自筆永賣爲去乙 各各 參訂的只白乎事 白 [着名] 白 [着名] 行府使 [署押] 같은 날 유학 손처약 나이 40세. 유학 서희원 나이 30세. 진술합니다. 정익이 이준에게 노를 매도할 때에 참여한 증인이었는가 여부를 추고하셨습니다. 위 정익이 그의 서모를 장례지내려고 노 만경을 이준에게 값을 받고 후소생과 함께 자필로 영구히 매도한 것을 참여한 증인을 하였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백 [착명] 백 [착명] 행 부사 [서압]
위 문서에 보는 것처럼, 매도인과 증인, 필집이 관에 나아가서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써서 매도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문서를 초사(招辭)라고 하였다. 관인이나 양반가의 부녀자는 관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질문서를 보내면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답변서를 보내서 확인하였다. 이러한 문서를 함답(緘答)이라고 하였다. 문서의 형식은 먼저 진술인의 신상 확인을 한 다음에 본인이 재물의 주인 또는 증인의 입장에서 그러한 매도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진술하고 ‘백(白)’이라고 쓰고 본인의 수결을 한다. ⑤번 문서 : 1594년 대구부 사급 입안 [그림6] ⑤번 문서 : 1594년 대구부 사급 입안 萬曆二十二年二月十五日
大丘府立案
右立案爲斜給事 粘連所志文記及奴主訂人 招辭據 傳來賤籍所納相考爲乎矣 萬曆二十 一年癸巳十月日 財主自筆忠義衛鄭着名署 子 釴處別給文記內 孽子弟攝明婢銀杏三所生奴 萬京年二十二 別給爲去乎 任意放賣 庶母喪葬事 他婢幷付白文記是乎等用良 葉作粘連退給爲 遣 合行立案者 行大丘府使[署押] 1594년 2월 15일 대구부 입안 이 입안은 사급하는 것임. 점련한 소지 문기 및 노주, 증인의 초사에 의거하여, 전래해온 천적을 받아서 상고하였음. 1593년 계사년 10월 일, 재주 자필 충의위 정 (착명) (착서) 아들 익에게 별급한 문기. 얼자의 제 섭명의 비 은행의 3소생 노 만경(나이 22)를 별급하니 임의로 방매하여 서모의 상례와 장례를 할 것. 다른 비와 함께 수록되어 있는 백문 문기이므로 문서(엽질)를 점련하여 물러주고 입안을 함. 행 대구부사 [서압] ⑤번 문서는 관서(官署) 입안, 관사(官斜) 입안, 사급(斜給) 입안이라고 하는 문서이다. 매수자가 관에 입안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기 때문에 관에서는 관사 문서를 작성하여 공증해주는 것이다. 관인을 찍고 관장(官長)인 대구 부사의 휘필(揮筆)과 수결을 하여 이 매매 행위가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장의 휘필이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비스듬히 내리그어졌다. 그러한 것을 ‘빗기[斜只]’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주는 문서가 사급 입안인 것이다. 사인 간에 주고받는 문서인 백문 문기와 비교하여 증명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상 1594년 대구부 사급 입안 점련 문서를 통하여 노비 매매 문서, 소지, 노주와 증인의 초사, 사급 입안 등 4종류의 문서를 고문서학적 관점에서 음미하였다. 이 자료는 이렇게 형식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수도 있지만, 노비 매도자인 대구에 사는 정익과 증인 손처약, 서희원 등의 자료와 함께 임진왜란 시기 대구 유생들이 처한 곤경을 볼 수도 있고, 전란 중에도 경주에 사는 이준은 넉넉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재산을 증식시켜 나가는 과정을 볼 수도 있는 자료이다. 독락당 문서에는 이준이 토지와 노비를 증식시켜 가는 과정, 전란 중에서 활동하는 모습, 난후에 할아버지인 회재와 아버지 이전인을 현양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독락당에 남아있는 다른 자료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이 자료를 검토하여야 이 자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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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비제도가 있었던 그 시절 시대상황을 문서로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시니, 왠지 모를 인간의 슬픔이 밀려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인권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옛 사람들의 이런 노비제도 문서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특히 서두에 <매매당사자인 노비가 유동적인 인간이고 말을 하기 때문에 후일에 번복하는 사단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노비의 매매에는 반드시 입안이라는 등기 절차를 밟았다>는 정 박사님 설명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 [교정] 글쓴이 김현영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님의 옥고 중 서두에 '두루말이'는 '두루마리'가 표준어입니다. 일부러 비표준어를 쓰셨는지 모르지만요. 아무튼 훌륭한 역사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비는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기본열쇠입니다. 조선시대는 양반문화, 가족문화, 기록문화 등에서 가장 발달한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노비가 가장 많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6세기 말 전국민의 절반이 노비였다는 사실은 어떤 역사발전법칙으로도 그 사회를 발전적인 사회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양반문화는 이런 노비제도 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비는 그냥 몸종만이 아니라 몸값으로 양반들의 경제적 생활의 뒷 받침이 되었습니다.
윤선생님의 소감 감사합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소중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늦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