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송이꿀 (잠 24:13-14)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시간에 “말씀의 송이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구에는 오래 두어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 물질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금 은 보석과 같은 귀금속이나 숯 그리고 식품 중에는 유일하게 꿀이 그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약 3천 년 전의 꿀단지가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 변질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꿀은 당도가 높은 식품으로서 당이 높으면 자체 살균력 때문에 그 속에서는 균이 활동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영양과 효소가 풍부해서 오래 숙성될수록 약이 되고 깊은 맛을 냅니다. 본문의 잠언 기자는 꿀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꿀을 지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할까요?
1. 말씀이 양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13절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허약체질이 꿀을 먹으면 기운이 생겨납니다. 여기 좋으니라는 말은 약이 되느니라는 의미입니다. 동의보감에는 "꿀이 허약한 기운을 북돋고 소화기를 강화시키고 통증을 줄여주며 해독 작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상의학에서는 "꿀이 소화기가 약하고 기력이 떨어지기 쉬운 체질인 소음인에게 좋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허약하고 춥고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에게 좋은 식품입니다. 그래서 몸이 추운 소음체질에게 가장 좋습니다. 한방에서 소음체질은 신장 방광 생식분야가 너무 강해서 심장의 기능을 억제하므로 기운이 없고 몸이 춥고 마음도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질이 소음체질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는 어느 민족도 따라갈 수 없지만 죄를 지어도 음행죄를 더 많이 짓고 근심 걱정 불만 불평 원망죄에다 꿈도 없고 열심이 없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소심한 이런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이것을 고치는 한의학적인 방법은 단맛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셨는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먹이셨나요? 출16:31에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달콤한 만나를 먹이셨는데 영적인 의미도 있지만 의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즉 꿀과 같이 단맛으로 콩팥의 기능을 억제하고 심장 기운을 살리면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생깁니다. 그리고 단맛은 인체에서 에너지원이 되어 기운이 나고 눈이 밝아지며 뇌세포를 활발하게 해서 뇌가 건강해집니다.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뜻해져 활발해집니다. 신앙생활도 열심을 내어 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열체질이거나 맞지 않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혈압이나 혈당이 상승한다든지 위장과 췌장이 타서 해를 입게 되겠죠. 그러나 허약체질을 개선하는 데는 최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신앙의 허약체질을 고치는 데는 성경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잠16:24에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했고, 잠3:7-8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양약이란 병을 고치는 좋은 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병을 고치는 약 중에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단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심령의 양약이 됩니다. 믿음이 생겨납니다.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겸손이 생겨납니다. 가슴에 사명의 불이 타오릅니다.
그래서 딤후3:15-17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2. 말씀이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이꿀은 무엇일까요? 13절 하반 절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보통 송이꿀은 벌집꿀 갯꿀 소밀이라고도 하는데 벌집에 채운 자연꿀을 말합니다. 양봉가들의 말에 의하면 송이꿀의 맛이란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벌집 체 술에 우려내거나 먹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송이꿀을 말할 때는 달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많이 씁니다. 본문에도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했고, 시19:9-10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되려면 잘 묵상된 말씀이어야 합니다. 마치 벌이 꿀을 벌집에 채울 때 그냥 채우지 않고 잘 소화시켜 채우는 것처럼 잘 묵상된 말씀만이 우리에게 그렇게 달고 맛있고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본문을 그냥 읽어도 좋지만 잘 설명해 주면 더 은혜가 되지요? 무슨 의미인 줄 몰랐는데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어디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랐는데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더 많이 한 메시지라면 더 은혜가 될 것입니다.
묵상란 히브리어 ‘하가’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의성어입니다. 의성어란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낸 말로서 닭을 꼬꼬라고 하고, 돼지를 꿀꿀이라 하는 것도 의성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비둘기 울음을 “구구 구구”라고 표현하지만 히브리사람들은 독특하게 “하가하가”로 표현했습니다.
즉 묵상이란 비둘기가 읊조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묵상의 기본 뜻으로는 “곰곰이 생각하다” 또는 “되새김질하다”이며, 때로 묵상은 “중얼거리거나 읊조리는 것, 혹은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혹은 “성경을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 묵상에 대해서 토마스 왓슨은 말하기를 “묵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여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마음의 거룩한 행동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묵상이란 마음 속 깊이 은혜 받기 위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1:2)했고, 시63:6에서는 “그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고 밤중에 주를 묵상한다” 했으며, 시119:148에서는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했습니다.
욥도 욥23:12에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말하고 전하고 실행하므로 큰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미래가 말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14절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앞의 13절을 해석한 말씀인데 이 구절에서 우리의 미래 우리의 소망이 달렸다고 말씀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삼상15:26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했습니다.
개인의 미래가 말씀에 달렸습니다. 말씀을 붙들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위대하게 할 것입니다. 믿는 것이 붙드는 것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붙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끝까지 믿고 실행하는 것이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후까지 붙들 것은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교회의 미래도 말씀에 달렸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타종교와 타협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사는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진리 떠나지 않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건물 크게 짓는다고 재정이 많다고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 떠나서는 성령의 역사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찬양 축제할 때도 보셨지요? 세상 가수 초청해서 세상노래 부르니까 그 타오르던 성령의 감동이 급속도록 냉각되고 얼마나 답답했습니까? 세상노래가 왜 그렇게 무의미한지 그런데 몇 편 더 부르니까 조금씩 흥이 나며 새로운 무드가 조성되는데 이제는 성령이 아닌 다른 불이 역사하잖아요? 여러 교단이 섞여 있다 보니까 별 우스꽝스러운 일을 다 경험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민3:4에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경 떠나서 달리하다가 다른 불을 드리면 아무리 흥겨워도 거기에는 생명도 없고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영원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요, 반면 말씀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양약이 되고 은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잠언 기자가 꿀과 꿀송이에 비교하면서 말씀을 먹으라고 한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하면서 말씀 안에서 말씀 떠나지 않고 큰 은혜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