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귀환자 명단
[스 2장]
[내용개요]
본장은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을 소개한다. 지도자들의 이름(1-2절), 귀환자들의 가계별 계수(3-20절), 귀환자들의 지역별 계수(21-35절), 제사장들의 계수(36-39절), 레위인들의 계수(40-42절), 느디님 사람들의 계보(43-54절), 솔로몬의 신복들의 계보(55-58절), 종족과 보계가 불분명한 사람들(59-6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합계가 나오고(64-67절), 많은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위하여 즐거이 예물 드리는 모습이 묘사된다(68-70절).
[강 해]
본장에서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본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이 중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서와 느헤미야서에서는 이런 형태의 명단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이러한 명단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마치 구원받을 자들이 기록되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참조, 계20:12) 하나님 앞에 그들의 이름과 행위가 기록되어 지길 바라는 데에 있습니다.
1 . 포로들의 귀환
1) 사로잡힘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국력이 약했다거나 국제 정세 탓만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멸망과 사로잡힘은 이미 예견되어지고 경고된 사항이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이미 경고가 주어졌었고,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에도 동일한 경고가 주어졌었습니다. 유다의 멸망 직전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멸망을 예고했는데, 특히 예레미야가 그 메시지를 전하는 주역이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특히 그들이 사로잡혀 간 땅이 '갈대아'임을 지적함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원점으로 돌아갔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a. 멸망 예언(왕상9:6-7)
b. 갈대아 손에 붙이심(대하36:17)
2) 놓임과 귀환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회복도 약속하셨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이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이것을 위해 간구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은 회복되지 못했지만,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남유다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그것은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70년이나 포로 생활을 했으면서도 놓임 받아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a. 솔로몬의 간구(왕상8:48-49)
b. 다윗의 등불(왕상11:36)
3) 귀환자들
본장의 상반부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하여 본토에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과 숫자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족속들과 제사장들, 성전 봉사자들, 솔로몬의 신복들 등 이들에 대한 명단을 제시하는 것은 이들의 믿음과 용기를 하나님 앞에 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포로가 된 지 70년이나 지났기에, 많은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정착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수가 귀환해야 할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귀환을 거부하고 바벨론에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환에 참여하는 일에는 많은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a. 정착 명령(렘29:4-6)
b. 포로지에 남은 유대인들(에9:18-19)
2. 제사장 가문
1) 보계를 증거하지 못하는 자들
유대인의 각계 각층의 명단을 소개해 나가던 에스라 기자는 본 단락에 이르러서 보계를 증거 할 수 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 중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원래부터 개방적이었기에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제사장의 경우에는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반드시 아론의 자손 중에서 흠 없는 자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계가 분명치 않은 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a. 이방인을 용납하는 유대 사회(출12:37-38)
b.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어야 함(출40:13)
2)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함
이렇게 보계가 분명치 않은 제사장들에 대한 결정은 그들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에 속하여요 흠이 있거나 부정한 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수 없었던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성도가 부정에서부터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a. 육체에 흠이 있는 자의 경우(레21:21)
b. 부정한 자의 경우(레22:3)
3)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
이들에 대해 또 한가지 제시된 조건은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나기까지는 지성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성물과 지성물을 다 먹을 수 없었고, 부정한 자는 성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부정에서 정결케 되면 성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참조, 레22:4-7).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이와 유사한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정결케 되는 것은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 즉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되어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히4:15)
3. 본성에 거함
1) 회복
본장의 65-67절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 노래하는 자가 이백 명, 그 외에 말 칠백삼십 육, 노새 이백사십오, 약대 사백삼십오, 나귀 육천칠백이십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귀환할 때에 노비까지 거느리고 왔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그때도 이스라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의 회복은 그리 풍성하지는 않았으나, 재건을 위해서 필요한 부분들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 재물을 가지고 출애굽(출12:35-36)
b. 풍부한 회복(사60:5)
2) 성전 건축을 위한 예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족장들 가운데 몇몇은 다시금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미 성전 건축을 위한 예물들과 성전 기명들을 가지고 왔으나, 성전을 건축하는 데는 많은 인력과 재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원해서 예물을 드렸으며, 그들의 힘이 닿는 대로 드렸습니다. 그들의 예물을 즐거이 드리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a. 즐거이 드림(고후9:7)
b. 힘이 닿는 대로 드림(고후8:12)
3) 본성에 거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무엇보다도 성전과 하나님이 그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귀환의 준비에서 도착에 이스기까지 성전의 재건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성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서 사역해야 하는 자들과 이스라엘 무리들은 성을 중심으로 하여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매우 어렵고 힘든 것이었지만, 하나님과 그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그것을 극복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성들에 거한 사람들(스2:70)
결론
이스라엘 백성의 70년만의 귀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섭리하심, 그리고 귀환자들의 믿음과 용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바벨론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귀환한 무리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그 해답의 좋은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1절. 돌아와. 원어 <bWv:슈브>는 부당하게 빼앗긴 물건이나 권리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때 사용된다.
2절. 스룹바벨. '바벨론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여호야김 왕의 손자.
36절. 제사장들. 레위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제사 의식에 관련된 사람들을 따로 구분하고 있다.
62절. 보계. 자신의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화된 족보를 가리킴.
63절. 방백. 유대 공동체를 감독하기 위해 페르시아가 임명한 관리. 여기서는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66절. 노새. 말과 나귀의 교배종으로 생식력은 없으나 힘이 좋아 산악에서 짐을 운반하기에 적합하다.
70절. 거하였느니라. 원어 <bvy::야쉬브>는 '쉬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완전히 생활 터전을 잡고 정착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주제]
이방인들의 구원. 본문 43절의 하나님은 '주어진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나중에 이스라엘의 종이 된 자들로서 성전의 궂은 일들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59-63절에는 유대인의 귀환에 동참했으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이방인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 펼쳐져 나간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유대 공동체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누구나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할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구약 시대부터 이미 인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많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음을 역설한 것이다(참조, 롬4:1-25).
[영적교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중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냥 바벨론에서 살아도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 중에도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바벨론에서의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결단을 내린 것은 굉장한 신앙적인 결단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했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요 참 왕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방인들을 사랑하사 유대인과 조금도 차별 없이 은혜를 내리시고 구원해 주셨다.
출처: 주님의 시선 글쓴이: 카페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