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이었다. 하지만 식목일과 관련된 일은 한 게 없다. 그야말로 나는 모처럼의 공휴일을 공휴일로써 보냈다. 그점은 좀 미안하다. 헌혈차 앞을 바쁘다고 감기라고 또는 오염된 바늘을 혹 쓴다고 핑계대고 지나치는 기분처럼. 그러고보면 나도 참 간사한 사람이다.
아무튼 어제는 집에서 머리를 깎았다. 자급과 자족의 생활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아내에게 머리를 맡겼다. 세련된 것보다 수수한 것 담백한 것이 멋있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내 생활이 우선 그것을 먼저 회복해야겠다 싶었다. 그래 아내를 귀찮게 했고, 아내는 기꺼이 아주 재미나게 맞짱구를 쳤던 것이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일요일 오후 빗도 가위도 모두 엉터리지만 어찌어찌 머리를 깎았다. 헌데 이게 웬 덤앤더머가 나온거지? 그래도 재밌다. 머리를 감고 완전 바가지 머리를 감추기 위해 말리면서 가운데를 좀 헝클었다. 그랬더니 내 눈은 속였다. 그리고 길음동 부모님댁에 갔더니, 어머니는 한눈에 알아본다.
어쨌든 오늘 아침엔 일어나 머리를 감았더니 이번엔 영화 '집으로' 머리가 되었다. 아내는 머리를 미장원에서 다시 자르라고 성화다. 그래야 다음에 또 잘라준다고. 그리고 머리 자르는 것을 봐둬야겠단다. 그래 나도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싫은 척 미장원엘 가 머리를 잘랐다. 스포츠로. 이번 머리가 석달 열흘은 가기를 바라며.
그리고 오후엔 다시 어머니랑 아내랑 동대문엘 갔다. 드디어 어머니가 만든 나만의 한복을 입고 다녀야겠다고 했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빌미를 제공한 것은 어머니가 짠 모자를 구경이었다. 남이 뜨다 버린 뜨게질 용품을 가져다 푼 뒤 다시 짠 모자인데 꽤 이뻤다. 육이오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그다지 가르치지 않았고, 그래 어머니는 배우기를 참 좋아했지만 국민학교까지만 나와야했고, 대신 몰래 몇달 양잠학원을 다녔다고 했다. 어머니는 눈썰미와 솜씨가 꽤 있는 분이어서 학원 원장이 어머니에게 학원을 물려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어쨌든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어머니는 재능을 만껏 펼쳐보지 못했다. 못난 아들은 그런 엄마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고작 앙드레신이라고 놀리는 정도였다. 그러다 몇년 새 나는 생활한복 타령을 했던 것이고, 어제 또한번 충동처럼 동대문에서 천을 끊어드릴 테니 생활한복 좀 만들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어머니도 선뜻 그러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옷 만드는 재미를 느끼셨나?
그래 오늘 이렇게 동대문 상가를 돌아다녔다. 청바지 같은 회청색과 흙색 천을 사고, 아내 치마용으로 푸른 천을 같이 샀다. 대략 비용은 한 마에 5,000원 선이었다. 내 옷감은 상하가 각각 세 마고 28,000원을 주었고, 아내 옷감은 두 마로 10,000원을 주었다. 욕심같아서는 이참에 아내가 어머니께 기술을 좀 전수받기를 원하는 것이지만, 그걸 종용했다가는 아내에게 퉁박을 먹을 것 같아 참았다. 자기는 하지도 않고 남만 시켜먹는 셈이니까.
옷감을 끊고 우린 대학로로 다시 나와 성대쪽 한복점들을 순례했다. "돌실나이", "질경이", "자연을 입는 사람들" 세 곳이다. 눈썰미가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들여보내 눈요기를 시키고 디자인을 구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삭삭한 아내는 딸같이 붙임성이 있어서 참 고마웠다. 나는 옷감을 가진 관계로 가계에 들어가진 않고, 인도에 서서 코르작의 책을 읽었다.
다시 부모님 집에 와 아내의 치마를 재단하고 집에 왔다.
옷이 언제 만들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몸이 워낙 말랐기에 한복은 내게 영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서양식 복장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복식문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 마침 생활한복을 내식대로 입고 싶은 마음이 내켰던 것이다. 하지만 한복은 비싸기도 비싸고 품이 대개 너무 넓다. 아무튼 몇년전부터 내 철학과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내식대로의 옷을 입는 소원을 가진 터라 비록 어머니에게 완전 맡긴 상태지만, 불완전하게나마 내식대로의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하고, 지금까지 나는 내내 좋아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 나는 어머니와 아내를 참 많이도 귀찮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