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진정한 토대>
그리스도의 주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한다. 쉐퍼는 부흥 운동가들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91),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 휘튼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총장이었던 조나단 블랜차드(Jonathan Blanchard, 1811-91), 오벌린 대학교 총장이었던 찰스 피니 (Charles Finney, 1792-1875) 등이 모두 개인의 영적 구원을 철저하게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들의 사회적 실천도 철저하게 강조했음을 지적했다.
정부와 법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대결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유물론적인 세속적 세 계관은 정부와 법의 영역에서도 어김없이 대결한다. 기독교적 세계 한을 택하는가 아니면 유물론적인 세속적 세계관을 택하는가에 따라서 정부와 법의 특징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서구사회 의정부와 법의 영역에서는 두 세계관의 대결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 되어 왔는가?
a. 성경적 토대 위에 세워졌던 서구사회의 정부와 법
서구사회는 정부와 법의 영역에서 형식과 자유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 온 전통을 가지고 있다. 형식이란 사회 안에서 주어진 의무를 하는 것을 말하고, 자유란 개인의 권리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서구사회가 형식과 자유의 균형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진정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는 세계관의 터전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법의 영역에 끼친 영향이 두드러지게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법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헨리 드 브락톤(Henry De Brachton, 1250년경의 인물)의 사상에서부터다. 브락톤은 왕에게 권력의 힘을 이용하지 말고 정의의 이성을 이용하여 통치할 것을 권고했다. 진정한 권력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은 권력을 의지하여 반역한 사탄을 궤멸시키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 때문에 힘의 행사보다는 정의의 시행을 선행시키셨다. 따라서 사회와 법에서도 권력이 먼저가 아니라 정의가 먼저다. 군주에게는 통제하고 통치할 권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군주는 정의가 없이는 권력을 행사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영국법의 기초였다.
브락톤이 등장한 지 약 300년 후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브락톤의 입장을 더 다듬었고 또한 정확히 했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와 국가 혹은 국가와 성장보다는 성경에만 근거한 권위를 주장했는데 이 입장은 교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법의 토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나는 것이었다.
17세기의 스코틀랜드인이었던 러더포드는 그의 저서 <법이 왕이다> Lex Rex를 통하여 ‘왕이 법’으로 통하던 당대의 정치원리를 뒤집어엎고 '법이 왕'임을 천명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정부의 수뇌들이 아래 있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에 대해서 법이 될 수 없었다. 미국의 국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은 러더포드의 정치사상을 잘 이해했고 그의 노선에 서 있었다.
한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존 록크(John Locke)의 전통에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정부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어떤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들"을 강조했다. 그러면 이 권리를 부여한 주체는 누구인가? 국가인가? 만일 국가가 이 권리들을 바꾸고 빼앗아 갈 수 있다면 이 권리들은 침해받을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권리들은 어디서 오는가?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한 누군가에게서 오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이들은 법의 수여자 곧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하는 인격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법이 왕이 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1조가 통과되었을 때 이 조항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연합된 13개 주에 어떤 형태로든 국가교회를 설립하지 않는 것이었다. 국가교회의 설립을 반대했던 이유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국민은 한두 개의 종단이 주도권을 잡고서 다른 종단에 속한 신자들에게 자기 종단의 종교를 강요하게 되는 사태를 염려했다.
둘째는 정부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간섭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변증》, p.164~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