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6. 포항과 전남에서 활동
1 나는 1968년 6월 13일, 전국 인사이동으로 경북지구 포항지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는 넓은 동해안을 낀, 해변에 자리 잡은 조그만 도시였다. 나는 이 새로운 땅을 주신 아버지 앞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이곳 경상도 사람들이 바위같이 무겁다면 나는 물이 되어 감싸줄 것이며 물같이 흐른다면 나는 바위가 되어 불변의 신앙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맹세하고 출발을 했다.
2 먼저, 지교회 5곳을 순회하며 새로운 계획과 우리의 책임을 설명했으며 대심방을 실시하여 한 가정 한 가정의 사정을 익혀 나갔다. 외적인 승공 활동도 시작했는데, 특히 승공학생회는 시군 내 20개 중•고교에 3천 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승공학생회 배지만도 3천 개를 만들어 분배했고 우승기와 같이 크고 귀하게 승공학생회기도 만들어서 각종 대회 때나 행사 시에 사용하게 만들었다.
3 또 매월 간부 회의와 승공 시험도 전학교에 실시해 보기도 했고, 방학기간 중에는 계몽도 실시하여 각 부락에 파송했으며, 마칠 때는 각 기관장들의 표창장도 수여받게 되어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초교파적으로 승공 세미나를 개최하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한 바 있다.
4 1969년 6월 3일부터 청평에서 지구장 선발을 위한 특별수련회 때는 선생님을 모신 가운데서 아브라함 노정을 강의했을 때와 선생님과 배드민턴을 칠 수 있었던 그날의 감회는 또한 잊을 수가 없었다.
5 지구장이 된 후 울릉도를 순회하게 되었는데 남면에는 70대가 넘으신 방달순 권사님(타계)과 60대이신 유선이 권사님이 하계 40일 계몽에 참석하여 활동 중이었고, 울릉 교역장도 60대가 넘으신 남례 지역장님(타계)이라서 실로 노장들이 모여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50대이신 황 교회장님 댁에서 정성과 전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통일 성도의 충성심을 새롭게 보는듯 했다.
6 나는 부흥 강의를 실시했는데 밤마다 강의 시 영적으로 선생님이 오셔서 옆에 서서 지켜 주신다는 권사님들의 얘기를 들으며 소수의 사람이 두 칸 방에 촛불을 밝히고 갖는 집회였지만 얼마나 긴장되고 정성을 다하여 열변을 토했는지 모른다.
7 영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듯한 느낌을 뜨겁게 느끼는 집회를 마치고 귀가할 날짜에 태풍이 강하게 불어 50리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걸어오면서 황 교회장님과 유선이 권사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지역 본부인 도동까지 걸어온 그날의 감회는 잊을 수가 없다.
8 앞으로도 이렇게 노따님들이 거센 바다를 건너 개척 전도 활동에 참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또 노따님들의 건강을 지켜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귀임하게 되었다.
9 1970년 하기 수양회 당시 선생님을 모시고 부산 해운대 동명장에서 1주일간을 지냈을 때와 제주도 수렵 대회 그리고 크고 작은 각종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신앙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0 1970년, 제1차 부인 전도대원을 맞이하여 활동한 것 중에는 노방 전도를 들 수 있다. 광목 한필로 제작한 “ㄷ”자 포장을 치고 각 면마다 강의 제목과 슬로건을 칼라로 크게 써넣은 뒤 안에는 원리 차트를 걸어 놓고 방송시설을 하여 성가를 부르며 청중을 모아 강의를 했다.
11 각 학교 앞이나 정류소 부근 각 동네마다 순회하며 실시했는데, 모든 대원들과 식구들은 어깨에 휘장을 메고 인근에서 활동을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들 주저했지만 갈수록 자신이 생겨 전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게 된 것이다.
12 그리고 선생님을 모시고 포항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으며 그때 조그만 방에 주무시게 한 것이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다. 우리가 예약해 놓은 호텔 방에는 안 가시겠다 하시며 ‘내 집이 더 좋지’ 하시며 염려 말라 하는데 무척 당황하면서도 또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몰랐다.
13 1972년 6월 1일 전국 순회사 겸 전남 담당 기동 전도 단장으로 발령받고 제1차 39명을 데리고 전남 곡성으로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전 대원이 휘장을 두르고 앞에서는 마이크로 외치면서 두 줄 또는 한 줄로 늘어서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골목과 거리를 누비고 밤마다 부흥 집회를 가졌다.
14 40명이 노란 배낭을 지고 손가방을 하나씩 둘씩 들고 이동을 할 때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게 되었으며 버스를 타면 만원이 됐고 열차를 타도 한 칸이 그득한 것 같았다. 단복 제작을 위하여 모심기, 보리 베기 등 사업활동을 했으며, 단복을 맞추어 입은 후부터는 더욱 활동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15 나는 밤마다 나와서 잠자는 대원들의 이불을 덮어 주며 머리를 헤아려 확인하는 것을 생활화했으며, 병날까 다칠까 항상 하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마다 성지 기도회와 체육을 시켰고, 밤 집회를 마치면 활동보고를 들어 하루의 일과를 종합하였으며 원리 교육도 계속 시켰다.
16 그리고 때론 명승고적을 찾아 정서교육과 화동의 시간을 가졌고, 아버지의 한의 심정을 품고 역사 창조의 사명감에 불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17 겨울을 맞이하여서는 얼음장 같은 시멘트 바닥 비닐 장판 위에 잠을 재워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적이 많았다. 전남의 노래도 작사해서 가는 곳마다 불렀고, 유치원 노래와 춤도 가르쳤다.
18 그리고 제주시와 서귀포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태풍이 심해서 3일을 더 유하고 배를 탔는데 출발 30분도 안 되어 뱃멀미에 모두들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대원들의 등을 두드려 주며 바케스로 받아 내버리도록 했는데, 갈수록 파도는 더 심해져서 전대원은 물론 지하 3등 칸에 탄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온통 난리였다.
19 배는 몹시 흔들렸고 거친 파도 소리만 더 커갔고 어둠은 깊어만 갔는데 대원 하나가 뱃멀미로 인해 쓰러져 옆 칸 바닥에 있더라면서 찾아왔다. 무척 후회도 되었지만 나는 기도만 드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탈진 상태가 된 듯 모두 조용히 누워 있는데 나만이 우뚝이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 목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20 지도자로서 너무나 당황하고 놀랐지만 이것이 부모의 심정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이 고비를 넘길 때 아무도 그 마음을 아는 자는 없었던 것 같았다. 지도하는 사람과 따르는 자, 부모와 자녀 간에 마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구나 생각하면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부모님의 답답하심을 생각해 보면서 큰 교훈을 얻었다.
21 2차 3차 전도대원을 졸업시켜 임지에 파송한 뒤로는 순회 일정이 바빠졌다. 또한 이백림 순회사님의 영적 집회를 전 교역에 마친 후에는 각 교역마다 영적 역사의 열기가 일기 시작했는데 교역장 교회장 부장 식구까지 다양하게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됐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