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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모스 부호 속에 새긴 첫 마음 — 육유와 조식과 나눈 대화
A. 두 개의 신호로 세계를 건너던 사람
그 시절의 통신은 지금처럼 말이 넘쳐나는 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말은 멀리 가지 못했고, 사람의 마음은 더욱 멀리 가지 못했다. 전파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신호였다. 길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짧게 끊어지는 소리. 장음과 단음. 점과 선. 그 단순한 두 기호가 모여 이름이 되었고, 이름이 모여 문장이 되었으며, 문장이 되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와 육지의 세계를 이어주었다. 모스 부호.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만든 가장 소박한 언어 가운데 하나였으나, 그 소박함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사랑도 그러했다. 길게 남는 한 번의 침묵. 짧게 떨리는 한 번의 대답. 그리고 끝내 오지 않는 신호. 천추객이 화성호에 올랐던 시절, 통신사는 배의 귀였고 입이었다. 위성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두 명의 통신사가 본선의 심장 가까이에 앉아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중 차석은 천추객과 동갑이었다. 둘은 오래된 벗이었다. 같은 배에서 젊음을 보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벗에게는 연애 이야기가 없었다. 어쩌면 너무 깊은 사랑을 이미 품고 있었기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던 가족. 잃어버린 고향. 흩어진 혈연. 그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삶은 늘 넉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날 천추객에게 말했다.
"나는 결혼하면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무조건 어머니 편을 들 거야."
천추객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효심의 선언이 아니었다. 그 말 뒤에는 전쟁이 있었다. 잃어버린 집,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린 시절의 공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사랑을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은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기 위해 가족을 자신의 생명보다 앞세운다. 그 벗에게 효심은 도덕이기 이전에, 상처 입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만든 하나의 서약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추객은 훗날에야 그것을 알았다. 사람은 때때로 현재의 신념으로 과거의 상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B. 비토리아에서 처음 울린 사랑의 신호
화성호가 브라질 비토리아 항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오래 뒤에도 그의 가슴속에 남았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오래 지나면 흐려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마음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서 변해버린 자기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그녀의 눈빛은 어떤 모스 부호보다도 분명했다.
길게. 그리고 짧게. 그러나 그 두 신호만으로도 그는 평생 처음 듣는 단어 하나를 알아버렸다. 사랑. 그는 그 단어를 쉽게 발음하지 못했다. 사랑은 처음부터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은 무전기에서 아주 작게 울리는 신호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한 번 들은 사람은 평생 그 주파수를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배는 떠날 준비를 했다. 항구는 만남을 주지만 항해는 이별을 요구한다. 배가 떠나는 날, 그녀는 육지에 남았고 그는 바다 위에 남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서는 거리가 반드시 멀어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멀어질수록 더 가까워진다. 그는 천추객에게 말했다. "훗날 내가 결혼하면 언젠가 이 그리움을 조용히 기억할 방법을 찾을 거야." 그때 천추객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은 그 말을 기억해두었다.
비토리아를 떠나던 날 바다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그때였다. 망원경을 들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배 한 척이 따라옵니다." 작은 쾌속정이었다. 망원경의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천추객은 그 배 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울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천추객은 급히 차석 통신사를 불렀다. 그가 갑판으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은 이미 필요 없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었다. 배는 앞으로 갔고 쾌속정은 뒤따랐다. 조금 전까지는 가까웠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의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점 하나가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젊은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마침내 쾌속정은 멀어졌다. 그는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식당에 내려오지 못했다. 천추객은 그를 찾아가고 싶었으나 찾아가지 않았다. 어떤 슬픔은 위로하려고 다가가는 순간 오히려 더 크게 울리기 때문이다. 벗이 해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는 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날 밤 천추객은 문득 생각했다. 모스 부호에는 전달되지 않는 신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별은 그 어떤 통신 장비로도 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만 먼 훗날 다시 수신된다.
《命盡前願》 운명의 불꽃이 꺼지기 전에
命火將熄時 생의 불꽃이 사그라들 무렵
孤聲訴蒼天 나는 홀로 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보낸다
願君垂耳聽 사랑하는 이여, 부디 한 번만 귀 기울여다오
此心未曾變 이 마음은 그대를 향하여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風泣月如霜 바람은 울고 달빛은 서리처럼 차갑다
淚落染衣邊 눈물은 옷자락을 적시고 밤은 길어지지만
若得君一語 그대에게서 단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死亦無悔焉 이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夢裏尋舊影 꿈속에서 지난날의 그림자를 찾고
魂歸故里前 영혼은 이미 떠난 집 앞을 배회한다
殘燈照空席 꺼져가는 등불 하나가 빈 자리를 비추고
孤影伴夜寒 그 곁에는 밤의 추위를 견디는 하나의 그림자만 남는다
心聲難達處 마음의 목소리가 더 이상 닿지 않는 곳으로
願以詩爲箋 나는 이 시를 편지 삼아 보낸다
若君垂憐念 그대여, 부디 한 번쯤 기억해주오
此生不枉然 그렇다면 이 생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으리라
C. 사반세기 뒤의 재회
세월은 흘렀다. 배는 사람을 갈라놓았고 시간은 각자의 삶을 다른 침로로 밀어냈다. 그들은 결혼했고 가정을 이루었다. 젊은 날의 사랑은 각자의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주 애들레이드 항에서 천추객은 우연히 그 벗을 다시 만났다. 그는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고, 눈빛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천추객은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브라질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비토리아라는 이름도, 그 여인의 이름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가장 깊은 예의였다. 그러나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때로 침묵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헤어졌다. 천추객은 돌아서면서 생각했다. 어떤 우정은 말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함께 알고 있음으로써 유지되는구나. 그리고 그날 밤, 시공의 안개가 다시 그의 배를 감쌌다.
D. 심원(沈園)의 담장 아래에서 육유를 만나다
배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남송. 소흥. 심원. 낡은 담장이 봄바람에 서 있었다. 담장 위에는 이미 반쯤 지워진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 앞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백발, 지팡이, 그리고 지나간 세월보다 더 오래된 눈빛. 육유(陸游).
천추객이 말했다. "저에게도 벗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브라질의 항구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했으나 헤어졌습니다. 그 사랑은 며칠뿐이었지만 그리움은 반백 년이었습니다. 어르신의 눈빛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봅니다."
육유는 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그네여. 사람들은 사랑을 만나서 함께 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늙어보니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더군. 나는 젊은 날 당완(唐婉)을 사랑했네." 그러나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결국 헤어졌다. 세월이 흘러 심원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이미 다른 이의 아내였다. 그녀는 그를 외면하지 않고 술과 안주를 보내왔다. 그 잔을 받아든 육유는 마시지 못한 채, 붓을 들어 담장에 자신의 마음을 새겼다.
陸游 《釵頭鳳》(채두봉)
紅酥手 붉고 고운 손으로
黃縢酒 누런 봉인의 술을 따라주었지
滿城春色宮牆柳 성 안 가득한 봄빛, 궁궐 담장의 버들
東風惡 동풍은 모질고
歡情薄 즐거운 정은 얇아
一懷愁緖 가슴 가득 근심만 남아
幾年離索 몇 해를 외로이 떨어져 지냈던가
錯,錯,錯!잘못되었네, 잘못되었네, 잘못되었네!
春如舊 봄은 예전과 같으나
人空瘦 사람은 부질없이 야위었고
淚痕紅浥鮫綃透 눈물 자국 붉게 번져 비단 손수건을 적시네
桃花落 복사꽃 지고
閒池閣 연못가 누각은 한적한데
山盟雖在 산과 같은 맹세는 아직 남았으나
錦書難托 비단에 쓴 편지조차 부치기 어려워
莫,莫,莫!그만두자, 그만두자, 그만두자!
육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그날 세 번 외쳤네. 錯. 錯. 錯. 그리고 다시 莫. 莫. 莫. 그러나 입으로 그만두었다 해서 마음까지 그만두어지지는 않았네. 당완도 그 시를 읽고 화답을 남겼지."
唐婉의 화답
世情薄 세상의 정은 얇고
人情惡 사람의 마음은 모질구나
雨送黃昏花易落 비는 황혼을 보내고 꽃은 쉬이 지는데
難,難,難!어렵구나, 어렵구나, 어렵구나!
人成各 사람은 제각기 흩어지고
今非昨 오늘은 어제와 같지 않으니
病魂常似鞦韆索 병든 넋은 늘 그넷줄처럼 흔들리네
瞞,瞞,瞞!속이고, 속이고, 속일 수밖에!
"그녀는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네." 바람이 담장 위를 지나갔다. 천추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뒤 그 죽음까지 알게 되는 것, 그것은 이별의 끝이 아니라 이별이 영원해지는 순간이었다.
E. 마흔 해 뒤에도 늙지 않은 사랑
천추객이 물었다. "그 뒤로 다시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육유는 씁쓸히 웃었다. "사십 년이 지나 일흔다섯을 넘겼을 때, 나는 다시 심원에 왔네." 담장은 낡고 글씨도 거의 지워졌으나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육유는 다시 붓을 들었다.
《沈園二首》(심원이수)
城上斜陽畫角哀 성 위 기우는 해에 뿔피리 소리 애달프고
沈園非復舊池臺 심원은 이미 옛 못과 누대가 아니로다
傷心橋下春波綠 마음 아픈 다리 아래 봄 물결 푸르니
曾是驚鴻照影來 일찍이 놀란 기러기 같던 모습 비쳐오던 곳이었지
夢斷香消四十年 꿈은 끊기고 향기는 사라진 지 사십 년
沈園柳老不吹綿 심원의 버들은 늙어 이제 솜털도 날리지 않는구나
此身行作稽山土 이 몸도 머잖아 계산의 흙이 되려니
猶弔遺蹤一泫然 그래도 남은 자취를 조문하며 한 번 눈물짓노라
"그날 나는 울었네. 일흔다섯의 노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시 젊은 청년이었지. 사십 년이 흘렀는데도 그 사랑은 늙지 않았네." 천추객은 오래도록 담장을 바라보았다. 완성되지 못한 사랑은 시간의 영향을 덜 받는다. 함께 살았다면 생활과 다툼과 실망이 되었을 것이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그 마모를 겪지 않기에 기억 속에서 젊은 날 그대로 남는다. 사랑은 반드시 소유되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육유가 말했다. "그대의 벗이 반백 년 동안 그 여인을 잊지 못했다면, 그것을 실패라 부르지 말게. 어쩌면 완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사랑이었을 뿐이네."
《未圓長情》 이루지 못한 정은 오히려 길어진다
摩斯聲斷續 모스의 신호가 끊어졌다 이어지듯
情意入星河 사랑의 마음도 세월 속에서 이어지고 끊어진다
別淚沾衣袖 이별의 눈물은 옷소매를 적시고
歸帆恨已多 돌아가는 배에는 이미 한이 가득하다
未圓翻更久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 마음이 있다
純愛勝笙歌 그 마음은 노래보다 깊고 세월보다 질기다
忽逢陸放翁 천추객은 그곳에서 육유를 만났고
共訴恨如波 파도 같은 한을 함께 들었다
一詞題破壁 한 편의 노래가 낡은 담장을 뚫고
眞情豈畏魔 천 년의 시간을 건너갔다
釵鳳雖分路 사랑은 길이 갈라졌어도
芬芳自若和 그 향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未遇非虛度 만나지 못한 세월은 결코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 相思積翠坡 그리움은 푸른 언덕처럼 쌓였고
白首重來苑 백발이 되어 다시 돌아왔을 때도
遺魂繞舊坡 그 혼은 옛 자취를 떠나지 않았다
F. 낙수의 물결 위에서 조식을 만나다
심원의 안개가 걷히자 천추객의 배는 다시 시간을 건넜다. 이번에는 낙수였다. 강물에는 저녁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 강가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흰 옷, 깊은 눈, 그리고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던 사람의 표정. 조식(曹植).
"나그네여. 그대도 강 건너를 바라보는구나. 강 건너에 무엇을 두고 왔는가?" "선생님의 《洛神賦》를 좋아하여 두 번이나 필사했습니다. 그 낙수의 여인을 향한 그리움은 어찌하여 그렇게 아름답습니까?" 조식은 강물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 날 이 강을 건너다가 물결 위에서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네." 그리고 천천히 읊었다.
《洛神賦》 구절
翩若驚鴻 놀란 기러기처럼 날아오르고
婉若遊龍 노니는 용처럼 유연하며
凌波微步 물결 위를 사뿐히 걷고
羅襪生塵 비단 버선에는 물안개 같은 티끌이 일었다
천추객은 그 여인이 실제로 강물 위에 나타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그네여,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네. 낙수의 여신 복비(宓妃)였지. 사람과 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네."
G. 신화로 입힌 사랑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까?"
"그러하네." 조식은 예물을 건넸지만 여신은 슬픔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과 신,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강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떠났고, 조식은 그 자리에 남아 말했다.
悵盤桓而不能去 서글피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천추객은 그 한 구절 앞에서 멈추었다. 육유는 담장 때문에, 조식은 인간과 신의 경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갈라졌다. 그러나 둘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같았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후세 사람들은 이 낙신이 실은 형수였던 견씨를 가리킨 것이라고도 합니다. 사실입니까?" 조식은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 "후대의 억측일 수도, 말하지 못한 진실의 그림자일 수도 있네. 그러나 나는 굳이 밝히지 않았네." "어찌하여입니까?" "마음을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 항상 정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세. 그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칠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지. 나는 내 마음을 신화의 옷을 입혀 내놓았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예(禮)였지."
천추객은 문득 비토리아를 생각했다. 벗이, 그 여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의 벗도 그리움을 다른 방식으로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일세. 이름과 얼굴 그대로 드러낸다면 오늘 그의 곁에 있는 가족이 다칠 수 있네. 그러나 그리움 자체가 죄는 아니니,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이지." 조식은 강물을 가리켰다. "나는 여신을 만들었네. 말할 수 없는 마음이 타인을 해치지 않고 존재할 공간을 만든 것이었네." 사랑에는 욕망이 있지만 책임도 있다. "그러므로 나그네여, 그리움을 없애려 하지 말고 다만 자리를 정해주게."
H. 마음의 가장 조용한 방
"그리움은 병이 아닐세. 손님이지." 천추객은 그 말을 되뇌었다. "손님을 내쫓을 필요는 없으나, 안방 전체를 내어주어서도 안 되네. 마음속 가장 조용한 방 하나를 내어주게. 그러면 그리움은 그대의 가족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시심을 적셔줄 수 있을 것이네."
천추객은 이제 비토리아의 그 여인을 벗이 평생 잊지 못했던 까닭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은 현재를 차지하려는 것도 과거를 되돌리려는 것도 아닌, 생애에 한 번 찾아왔던 순수한 떨림이었다. 그 떨림을 죽이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삶을 배반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기억의 윤리였다. 조식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나, 과거가 오늘을 어떻게 만들지는 선택할 수 있지. 그리움을 없애는 것이 성숙이 아니라, 그리움과 함께 살되 그 때문에 다른 삶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그것이 어른의 사랑일세." 낙수의 물결이 출렁이고, 조식의 모습이 물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천추객은 혼자 남았다.
I. 모스 부호가 끝난 자리에서
그는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문득 화성호의 무전실, 젊은 통신사가 앉아 있던 자리가 떠올랐다. 딸깍, 딸깍, 길고 짧은 신호. 그때는 그것이 단지 통신이라 생각했으나 이제 그는 알았다. 인간의 삶에도 수많은 모스 부호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 사랑, 돌아오지 않는 사람, 다시 묻지 않는 벗, 어머니를 지키려는 아들의 맹세, 담장에 남겨진 시 한 편, 강물 위에서 사라지는 여신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은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했기에 오히려 오래 남은 신호였다.
천추객은 생각했다. 사랑은 반드시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랑은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다. 때로 사랑은 항구를 떠나는 배 뒤에서 흔들던 손이다. 때로 사랑은 사십 년 뒤 다시 찾아간 낡은 담장이다. 때로 사랑은 사람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린 한 편의 시다. 그리고 때로 사랑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의 가장 조용한 방 하나에 앉혀놓는 오래된 손님이다. 그 손님을 죽이지 않는 것. 그러나 그 손님에게 오늘의 집 전체를 내어주지도 않는 것. 그 사이에서 인간은 비로소 사랑과 책임을 함께 배운다.
《洛波遺情》 낙수에 남은 정
洛水生煙靄 낙수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凌波影自流 물결 위의 그림자는 스스로 흘러간다
驚鴻誰得見 놀란 기러기 같은 아름다움을 누가 붙잡을 수 있으랴
遊龍不可留 노니는 용과 같은 존재를 어찌 머물게 할 수 있으랴
七步詩成淚 일곱 걸음의 시는 눈물로 이루어지고
骨肉自生愁 가까운 혈육 사이에서도 근심은 생겨난다
才高身反賤 재주는 높았으나 몸은 도리어 낮아졌고
宮闕鎖清秋 궁궐은 인간의 운명을 가두었다
佳人隔一水 아름다운 이는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悵望立汀洲 천추객은 물가에 서서 바라본다
羅襪生塵處 사람과 신의 길은 아득하고
人神路自幽 닿을 수 없는 마음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此情終不泯 그러므로 그 마음은
化作筆端遊 붓끝으로 흘러간다
莫言佳期斷 아름다운 기약이 끊어졌다고 말하지 말라
眞情不肯休 참된 정은 그치기를 알지 못하나니
그리움은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두 신호로 대륙과 대륙을, 배와 육지를, 결국 사람의 마음과 마음까지 연결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한 사랑의 신호는 정작 통신기로 전달되지 않는다. 비토리아에서 손을 흔들던 여인의 마음, 식당에 내려오지 못했던 젊은 통신사의 마음, 반세기 뒤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그 마음은 어떤 전파로도 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기억 속에 저장했다.
육유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조식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윤리를 보여준다. 육유에게서 천추객은 사랑이 반드시 소유되어야 완성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고, 조식에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현실에 행사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님을 배운다. 그리움은 없애야 할 병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할 손님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돌아갈 수 없는 항구 하나씩을 가지고 산다. 첫사랑이든, 죽은 부모든, 잃어버린 고향이든, 다시 만날 수 없는 벗이든. 그것을 모두 지우려 하면 자신의 일부까지 지워지지만, 오늘의 삶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오늘을 무너뜨리게 하면 그것 역시 사랑이 아니다.
그리하여 필요한 것이 거리다. 잊음과 집착 사이, 기억과 소유 사이, 사랑과 책임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조식이 말한 예(禮)다. 그리움을 신화의 옷에 입히는 것, 이름을 지우는 것, 현실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 그것은 진실을 감추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 타인을 해치지 않고 살아남게 하는 인간의 지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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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육유와 조식’에 대한 것을
잠시 멈추면서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육유와 조식과 나눈 대화" 감상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과 그리움의 사이에는 자리가 없는 것일까
갑자가 조식의 칠보시가 생각이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