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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감사 / 살전 5:18
우리는 2022년 상반기를 보냈고, 하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2년 반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감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건 다 포기해도 감사만은 포기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감사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불평의 문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행복의 공식도 간단하고 불행의 공식도 간단합니다. 행복도 선택이고 불행도 선택입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감사를 선택하면 되고, 불행을 원한다면 불평을 선택하면 됩니다.
어느 교회의 친교실 벽에 “불평금지구역”이라고 써 붙인 글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흡연금지구역”은 많이 봤어도 “불평금지구역”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웃음을 자아낸 그 글귀가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흡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을 토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잘못된 습관인지 모릅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그 이는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그놈의 원수 같은 담배를 전혀 끊지 못하고 있어요. 업무상 스트레스가 많아 하루에 담배를 한 갑 이상씩 피울 수밖에 없다네요. 목사님, 담배를 이렇게 많이 피우면 천국에 못가는 거 아닐까요?” 목사님의 대답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운다고 천국 못가는 건 아니에요. 다만 신앙이 좋은 사람이 담배를 많이 피우면 더 빨리 천국에 가게 되죠.”라고 했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좋은 사람이 불평불만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천국에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감사를 좀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다 아는 내용일 것입합니니다. 그런데 아는 것과 정리하는 것은 다릅니다.
언제 감사해야 합니까?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한다가 어떤 의미입니까? 비범한 일에도 감사해야지만,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상황에서도 감사해야지만, 일상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넉넉한 처지에서 뿐 아니라, 부족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성공의 상황에서 뿐 아니라, 실패의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훌륭한 환경에서 뿐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감사의 완벽한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사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베다니로부터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장사까지 지내고 난 후였습니다. 주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안내에 따라,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셨습니다. 주님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항변하면서도 말씀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진 후, 주님이 무덤 앞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언행을 하십니다. 요 11: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분명히 아직 나사로가 살아나기 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살아나기 전에 감사부터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다음에 감사하신 게 아닙니다. 나사로가 살아난다면 감사하겠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나사로가 썩어 냄새나는 상태에 있을 때 감사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고 절망해 있을 때 감사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압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사가 기적을 불러 온 것입니다. 감사가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어느 교회 사모님이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게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목사님이 신학대학의 학장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자신의 형편을 사실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처음엔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하며 언짢아 했습니다. 그래도 사모님이 노트에 한 두 줄씩이나마 감사할 일을 써내려간 것은, 목사님이 방을 나가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사모님은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기적을 불러온 것입니다. 감사가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언제 감사해야 합니까?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어디서 감사해야 합니까? 어디서나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생활 무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활동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역시 생활 무대가 있고, 활동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가정입니다. 교회입니다. 직장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가정을 휴식처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은혜 받는 곳으로만 알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있습니다. 직장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직장의 다른 말이 일터입니다. 어디서나 감사하라는 말은, 가정에서 가정 일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교회 일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직장에서 직장 일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중세의 한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일지에 남긴 글입니다. 글 제목이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은 환경적으로는 매우 유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감옥을 지옥으로 만들고, 수도원을 천국으로 만드는가? 감옥에선 하루가 불평으로 시작되는 반면, 수도원의 하루는 감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만약 수도원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감사를 잃어버리면, 이 수도원이 지옥일 수가 있다. 반대로 만약 감옥에서 감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천국이 될 수 있다.” 수도사의 글을 우리의 환경에 적용해 본다면, 가정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감사가 있으면 천국이 되지만, 감사가 없으면 지옥이 됩니다. 교회도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감사가 있으면 천국이 되지만, 감사가 없으면 지옥이 됩니다. 직장도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 감사가 있으면 천국이 되지만, 감사가 없으면 지옥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우리가 감사를 선택하면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불평을 선택한다면 가정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선택하면 교회는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불평을 선택한다면 교회조차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선택하면 직장은 천국이 됩니다. 그러나 불평을 선택한다면 직장은 틀림없이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어디서 감사해야 합니까? 어디서나 감사해야 합니다.
누가 감사해야 합니까? 누구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12절과 14절의 시작 부분을 보면, 12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14절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불신자가 아닌 형제들에게 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만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가진 형제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믿음의 형제가 아니고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헬런 켈러는 생후 19개월 때 열병을 앓은 후, 시각 장애에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됐습니다. 7세 때부터 가정교사 설리번에게 교육을 받고, 1900년에 하버드대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합니다. 세계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1904년 우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낸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고, 그 상황 자체에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헬렌 켈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노년이 되어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바흐는 유명한 안과의사로부터 수술을 받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의사가 바흐의 눈에서 붕대를 풀었을 때, 침대에 둘러서 있던 자녀들이 바흐에게 물었습니다. “아버님, 뭔가 보이세요?” 바흐가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볼 수가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때 바흐는 오히려 자녀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가 작곡한 찬송가 145장 3절을 보면,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의 사랑에 끝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바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우리의 불행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통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 감사해야 합니까? 누구나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무엇이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일예배 후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감사제목을 읽어보면, 여러 기도제목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흔한 감사제목은 이것이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범사에 감사합니다”란 제목으로 감사헌금을 해봤을 것입니다. 왜 범사에 감사합니다란 제목으로 헌금했습니까? ① 감사제목을 생각하기 귀찮아서 ② 마땅한 감사거리가 없어서 ③ 습관적으로 ④ 답 없음 “범사에 감사합니다”는 제목으로 매주 헌금하는 사람이라고, 어디 감사할 일만 있겠습니까? 힘든 처지가 왜 없겠습니까? 곤란한 상황이 왜 없겠습니까? 답답한 환경이 왜 없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을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빌 4: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가 현재의 삶에 자족하다고 고백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처지가 남들보다 나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편안한 상황에 있는 것도, 아주 안락한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가 풍부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궁핍에 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빌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그게 바울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지 때문도, 교양 때문도, 그렇다고 인격 때문도 아닙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범사에 감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한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다릅니다. 무엇보다 예배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감사를 마음에만 담아두지 말고 입으로 선포합니다. 누가 이렇게 물었다고 해봅시다. “요즘 어떻습니까?” 그럼 무엇이든지 감사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 삽니다.” “늘 감사하면서 살지요.” 그러나 불평의 사람은 “누구 때문에 힘들다”고 할 것입니다. 조건 감사의 사람들은 “그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기한 선포한 말대로 됩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무엇이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어떻게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구나 불평꾼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가 원망의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어떻게든 감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감사의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의 습관을 들일 수 있습니까? 감사를 연습해야 합니다. 습관은 반복 연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랜 반복으로 인해 몸에 밴 것이 습관입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습관입니다. 감사를 반복 연습하여, 감사의 습관이 들게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한 헨리 프로스트의 고백입니다. “집으로부터 슬픈 소식을 전해들은 후, 깊은 어둠의 그림자가 내 영혼을 덮었다. 기도를 하여도 그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견디어 보려고 애를 써 보아도, 어둠은 점점 깊어만 갈 뿐이었다. 그런 후 내륙 선교 본부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 선교 본부의 벽에 이런 글이 있는 것을 보았다. ‘감사를 연습하십시오.’ 나는 그대로 해보았다. 그러자 곧 모든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다시는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감사를 얼마나 연습해야 할까요? 감사의 습관이 들 때까지 해야 합니다. 감사가 성품이 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품을 낳는다지 않습니까?
어떤 유대인 어머니가 자식을 굉장히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자신은 배움이 거의 없는데 말입니다. 그 비결은 이랬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식에게 세 가지를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첫째로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둘째로 원망하는 사람과 깊이 어울리지 말아라. 셋째로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 사실은 하나님이 감사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감사를 잘하는 사람에게 더 감사할 일이 있게 하십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점점 사라져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그들이 광야에서 쓰러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망해서입니다. 원망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가 없어서입니다. 또 그들이 광야에서 죽도록 고생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해서입니다. 불평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가 부족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어떤 것보다도 감사의 문제였습니다. 감사가 없었던 탓이고, 감사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자유만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노예라고 감사할 일이 전혀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노예가 감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노예는 감사를 배우지도 않고, 감사를 연습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불평입니다. 특별히 연습하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원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좋은 일에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궂은 일에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돌아서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일어섭니다. 노예근성이 빠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감사는 자유인만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어떻게든 감사해야 합니다.
왜 감사해야 합니까? 왜라고 묻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뜻인데 왜라고 물으면 되겠습니까?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그럼 그냥 순종하기 바랍니다. 명백히 하나님의 뜻인데, 무슨 사족을 달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대책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딱 닫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더 바라시지만, 그렇다고 행복 자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행복의 원리, 행복의 노하우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게 감사입니다. 감사와 행복은 직결됩니다. 감사가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가 풍년이면 행복도 풍년이 들고, 감사가 흉년이면 행복도 흉년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평범한 일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 세 자녀의 운동화도 사줄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세탁기마저 고장이 나서,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중고 세탁기를 판다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너무나 크고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는 그 집에 있는 최신식, 최고급 가구나 주방시설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울적하였습니다. 세탁기를 내어 오면서, 주인 내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중고 세탁기를 산다는 것, 그리고 두 아들 녀석이 얼마나 개구쟁이인지, 신발이 너무 빨리 닳아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유한 그 집의 부인이 고개를 숙이면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는 자기가 무슨 말실수를 하지 않았나 싶어서 당황하였습니다. 잠시 후 그 부인의 남편이 그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제 딸은 태어난 후 12년 동안 한 걸음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아랍니다. 제 아내는 당신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날 집에 돌아온 그는 현관에서 아이들의 낡은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한참동안 그 신발을 바라보던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먼저 자기의 불평에 대한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어서 아이들의 건강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모든 조건이 맞아야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왜라고 묻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면 보통 26,000단어를 알고 사용한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단어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단어도 ‘감사’입니다. 우린 다 입이 있습니다. 벙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있잖아요? 식물인간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입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감사를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줄 알고,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린 참 이상한 것 같아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못하고 다 말해버리면서, 감사할 때는 왜 참고 말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브라질 사람들은 직장에서 틈만 나면 ‘오브리가도(고맙습니다)’를 외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브리가도입니다.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도 하루 평균 열 번 이상은 오브리가도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 역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땡큐’랍니다. 미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50개를 조사해봤더니, 땡큐가 28%로 1위를 차지했답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혀에 붙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가르치지 말라.”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할 때에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면 형통이 지속됩니다. 불평한다면 감사거리는 거기서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중물과 같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 펌프에 부으면 물이 솟아오르듯이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계속 생기게 됩니다.
금년 맥추감사절을 기점으로 우리는 더욱 더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어떤 처지와 환경 속에 있더라고 무조건적으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제 그 감사를 입으로 말로 행동으로 표현합시다. 감사의 기도로, 감사의 찬양으로, 감사의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주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과 감사의 말과 감사의 행동으로 다가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생각을 해도 감사할 일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감사는 좋은 선물을 많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신앙인의 자세이므로, 부지런히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감사생활을 힘써 더 큰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에 평생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내 옆에 이런 귀한 사람을 주신 것,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가족을 주신 것, 그리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이만큼의 온전한 정신을 주신 것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주님 나라에 갈 때까지 감사함으로 헌신, 봉사, 기도하는 산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