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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선
-고 희 상 著(5단,성인관 관장)
1. 머리말
흔히들 검도를 하면 동적(動的)인 수련을 통해서 신체(身體) 건강증진을 이루고, 정적(靜的)인 활동인 좌선(坐禪), 참선(參禪), 묵상(黙想))을 통해 정신(精神) 건강까지도 좋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검도의 수련 목적은 기술 수련만이 아니라 도(道)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검도는 인격도야(人格陶冶)를 통해 참 인간이 되는 훌륭한 무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本考)는 검도 안에 녹아 있는 정신세계의 의미와 의의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한다.
2. 검도와 좌선
검도를 처음으로 배우려는 사람은 검도수련의 첫 단계에서 예절을 배우며, 또 수련에 앞서 갖추어야 할 것을 배운다. 그 중 하나가 무릎을 꿇어앉아 좌선을 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검도에서의 좌선은 그 날의 수련을 마무리하면서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묵상(黙想) 또는 참선(參禪)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검도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스포츠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무도(武道)로서의 특성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검도에는 옛부터 정신, 즉 마음 수련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참고 자료들을 열거해 보면, 무심(無心), 평상심(平常心:자신을 버릴 수 있는 무아의 상태로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고 원천적인 심리 상태), 부동심(不動心: 어떠한 상태나 변화, 움직임에 대해서도 바위처럼 결코 동요되지 않는 마음), 무념무상(無念無想: 모든 상념이 머리를 떠난 정신통일의 상태), 사계(四戒: 죽도를 교차하고 있을 때 생기는 네 가지 마음의 동요, 즉 경(驚: 놀라는 것), 구(懼:두려워하는 것), 의(疑:의심하는 것), 혹(惑: 망설이는 것))등의 마음자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검도의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사느냐 죽느냐라는 치열한 공방 끝에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죽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에서 고도로 발전된 기법을 창안 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자기보다 강한 적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숨기고 적을 위협할 만한 것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즉, 기합(氣合), 기력(氣力)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력으로 설익은 기술을 보완했던 것이다.
더욱이 검도는 종교와 결합되면서 내면(內面)생활을 중시(重視)하는 차원으로 승화되었으며, 그것이 검술에서 검도로 발전, 계승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전쟁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 사회의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피난처로 종교를 찾게 되고 검술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복을 빌거나, 기원을 하거나 정신력의 극대화를 이루기 위해 종교와 연관(聯關)을 맺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검도의 역사와 전통 안에 좌선(坐禪)이 묻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검도라는 말은 2000년 전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검도 38편이 기록된 것에 처음 나타난다. 그밖에 사법(射法) 42편, 수박(手搏) 6편이 기록되어 있는데, 검도는 법(法)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道)라고 불렀다. <예문지>의 검편(劍篇)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검을 배우는 것을 수도검(修道劍)이라 하였는데, 수도(修道)란 도가(道家)의 정좌법(靜坐法)을 말한다. 이는 단전호흡(丹田呼吸)과 기(氣)의 단련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것인데 대개의 무사들이 이를 중요시하였다고 전해진다. 무예에 조예가 깊다는 것은 일찍이 그 무술이 도(道)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좌법 외에 무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중국 선종(禪宗)의 좌선(坐禪)이다. 달마조사(達磨祖師)가 저술한 《역근경(易筋經)》은 그러한 내공(內功)을 통한 심신단련법을 설명한 책이다. 선종(禪宗)이 한국에 전래될 때 이러한 좌선법에 중점을 두는 무예 역시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두산세계백관사전 "검도")
이렇게 역사적 전통아래 우리들은 검도를 하면서 좌선(坐禪)을 시간량과 관계없이 매일과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좌선(坐禪)은 틀림없이 검도 안에 포함된 공부요, 일종의 수련 형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3. 좌선(坐禪)의 개요
좌선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디아나(Dhyana)의 음역인 타연나(馱衍那)선나(禪那)의 나(那)를 생략하고, 중국어 좌를 더한 것이다. 정려(靜慮)로 의역한다.
좌선(坐禪)이란 두 다리를 포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사려분별(思慮分別)을 끊어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방법이다. 이는 좌선(坐禪)은 인도의 모든 종교가 수행 방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때는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黙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a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에서도 이를 종교적 실천법으로 채용하였다. 불교의 좌선은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단좌정사(端坐靜思)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 직후 삼칠일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그 후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이 되어 원시불교의 3학(三學:戒․定․慧), 대승불교의 6바라밀(六波羅蜜: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이 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단좌(端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모든 일상생활이 선수행으로 간주되어 소극적․형식주의적인 좌선이 아니라 적극적․자유주의적 좌선이 선양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 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6조 혜능(慧能)이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주심관정(住心觀靜)은 병으로서 선이 아니다. 오래 좌정하여 몸을 괴롭게 한다면 도리에 어떤 익이 되겠는가? 바깥의 일체 선악 경계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을 좌라고 한다. 안으로 자성(自性)의 부동을 보는 일, 이것을 선이라고 한다 따위는 형식주의적 면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維摩經)》의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 이것을 연좌(宴坐:좌선)라고 한다는 경문에서 보듯이, 혜능에 선행하여 나타난 사상이지만, 이러한 조류에 끼친 혜능의 역할은 크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송대에 이르면, 견성(見性)을 중심으로 하는 임제선(臨濟禪)으로부터 종고(1089~1163)가 공안(公案:話頭)을 사용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이루는 한편, 좌선 그 자체를 대오의 자세로 보는 조동선(曹洞禪)으로부터 정각(正覺)에 의해 묵조선(黙照禪)이 생겼다.
한국에는 신라 때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좌선의 형식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든가[結跏趺坐], 또는 단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는데[半跏跌坐], 단지 다리를 놓는 형식뿐만 아니라 손의 모양, 허리를 세우는 것, 혀의 위치, 호흡의 방법, 눈을 뜨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일정한 규범에 따라 육체를 올바르게 보존하며, 단정히 앉는 것(正身端坐)이 좌선의 본질이다. 따라서 좌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非思量), 육체를 올바르게 하여 정신단좌하는 순수한 행위이다.(두산세계백과사전 "선,좌선,정")
좌선을 통해 무엇을 하는가? 선종에서 선 수행의 첫 관문은 바로 무(無)이다. 사승(師僧)을 만나 뵙고 정식으로 사제의 예를 갖춘 다음, 제일 먼저 주어지는 공안이 대부분의 경우 "무자"(無字) 공안이라 한다. 이 무(無)를 참으로 실제적 삶의 한 가운데서 체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의 근본적 핵심으로 접근하는 길이기에 본고(本考)에서는 일반적으로 활용 할 수 있도록 간략한 소개만 하겠다.
검도의 무(無)를 예로 들어보자. 목숨을 건 검술의 대결에서 적과 맞설 때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전신에 기력이 충만하게 하는 경지를 곧 무심(無心)이라 한다. 사방 팔방으로 미치지 않는 데 없이 의식을 충실하게 하면서 아무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면, 상대가 어느 쪽으로 쳐들어와도 번개처럼 대응할 수가 있고, 상대에게 틈이 있으면 날쌔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면 정체(停滯)하게 되어 다른 데에 주의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틈이 생기고 마침내 결투에 지고 만다. 적의 칼에 마음을 두면 거기에 마음을 메이게 되고, 적의 몸 움직임에 마음을 두면 거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며, 자기 칼에 마음을 두면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적이 강하다고 생각해도 안되고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로 무심(無心)이란 얼빠진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기력이 전신에 충만한 경지이다.(가도와끼 가기찌 '선과 성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인내와 노력을 통한 정신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무(無)를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똑바른 자세로 단좌(端坐)하여[조신(調身)], 호흡을 고르게 하며[조식(調息)], 마음을 가다듬고[조심(調心)], 삼매경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상념을 말끔히 떨쳐 버리고 삼매경에 몰입하기란 왠만한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심(無心)에 대해 일본의 다꾸안 선사(澤庵禪師)가 야규우 다지마노가미 무네노레(柳生但馬守宗矩)에게 내려준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에서 말한 내용을 참고해 본다.
"무심(無心)의 마음이란(中略) 본디 어떤 일정한 지향 같은 것도 없고, 분별도 사념(思念)도 아무 것도 없을 때의 마음, 온 몸에 퍼져 속속들이 미치는 마음이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이다. 돌이나 나무와는 달리 머무르는 데 없음을 무심이라 한다. 어딘가에 머무르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 것이고, 머무르는 데가 없으면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이렇게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무심의 마음, 또는 무심, 무념(無念)이라 한다.(中略) 마음속에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도 듣지 못하니, 이는 마음이 그 생각하는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中略) 이것은 마음에 무엇이 있는 소치이다. 있다 함은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있는 것을 없앨 때 마음은 무심의 경지에 이르고 어떤 일이 생길 경우에만 발심하여 그 일을 처리한다. 이 마음에 있는 것을 없애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또한 심중에 자리잡게 된다. 생각하지 않으면 절로 사라지고 자연히 무심의 경지가 되느니라. (가도와끼 가기찌 "선과 성서")
또 무자(無字) 공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심리과정에 대한 묘사를 들어보자.
첫째, 깨달음의 오묘한 이치는 마음의 흐름을 막고, 절단할 것을 필요로 한다.
둘째, 마음의 흐름을 막고 절단하는 방법으로는 몸의 자세를 단정히 하고 호흡을 고르게 하여 마음속으로 "무!"를 외치며 이 "무!"에 정신을 집중한다.
셋째, 그렇게 하면 의문의 덩어리가 일어난다. 이 의심이 전신에 꽉 차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이렇게 "무!"를 밤이나 낮이나 부단히 외치면, 며칠 뒤에는 열철환을 삼킨 듯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는다.
다섯째, 마침내는 저절로 내외가 타성하여 "무"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5
이러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불교에서는 입정(入定)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입정(入靜)이라 한다.
먼저 입정(入定)의 정(定)<samadhi>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전연 동요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 또는 적정한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진리를 체득하는 것으로, 선정(禪定)과 같은 뜻이다. 산스크리트 사마디[三摩地/三昧]의 의역으로서 마음의 활동․정신작용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삼학(三學: 戒․定․慧)의 하나, 또한 실천덕목으로서의 8정도(八正道)․5근(五根)․5력(五力) 중의 하나로 열거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중의 정바라밀(淨波羅蜜)은 산스크리트 디아나(靜慮)의 역어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후세에는 선정(禪定)으로 함께 사용되었다. 교학적으로는 이 정을 상세히 분류하여 무상(無想)․멸진(滅盡)의 2무심정(二無心定)과, 4선(四禪)․4무색정(四無色定)의 8유심정(八有心定) 등으로 나눈다.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에서는 이것을 7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① 등인(等引): 필요 이상으로 흥분․절망하는 상태를 떠나 신심을 안정시키는 것, ② 등지(等持): 마음을 항상 한 대상에 집결하여 활동시키는 것, ③ 등지(等至): 정(靜)의 힘으로 도달한 신심안정의 상태, ④ 정려(靜慮):마음의 안정과 지혜에 기초한 올바른 관찰이 병행하여 일어나는 것, ⑤ 심일경성(心一境性):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안주하여 있는 상태, ⑥ 지(止):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안주하여 동요가 전혀 없게 된 상태, ⑦ 현법락주(現法樂住):정(靜)을 닦음에 따라 일체의 망상을 떠나 현실 생활 중에 신심이 안정된 법락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두산세계백과 사전 "선,좌선,정" )
사실 좌선(坐禪)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하다. 그저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하게 앉아서 숨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고르게 할 뿐 이다. 마치 검도에서 기초과정인 3동작, 2동작, 1동작, 빠른 동작 등을 매일 하는 가운데 익숙해지면 검도의 제자세가 올바르게 되고 힘을 기르게 되며 기합(氣合)을 통해 호흡이 조절되는 것처럼 그저 단순한 자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사람의 본성(本性)을 개발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즉 본래성품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검도의 진수(眞髓)를 책이나 비디오를 보고 알 수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처럼 글이나 말 만으로는 깨달음의 내용인 좌선(坐禪)에서의 무(無)의 본질(本質)은 표현 할 수가 없다. 머리로는 혹여 어떤 것이 이해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몸과 마음까지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좌선(坐禪)은 검도 내에서 단순히 수련을 마치고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잠깐 묵상(黙想)하는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전통적 수련방법을 시간에 쫓기거나 무지(無知)로 인해 상실해가고 있어 무척이나 아쉽다.
다가오는 새천년 밀레니엄시대에는 매일 최소 하루에 30분씩 집이나 학교, 일터에서든 좌선을 실천해 보자. 검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도(道)에 이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서 고요한 마음(靜), 진실된 마음(眞), 착한 마음(善), 잘 참는 마음(忍)으로 덕(德)을 베풀고 공(功)을 이루어 대도(大道)를 이루어가 보자.
대한검도회 성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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