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어린이날의 由來”, 『아동』 제2호, 1946년 5월호 (불수록)
어린이날의 지내온 내력을 적어가며는 그것은 곧 조선 아동문화운동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이십팔년 전 서력 一九一九년에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어느 분이 지도하였는지 똑똑지는 않으나 어린이운동이 조그맣게 일어났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그 이듬해 서울 천도교(天道敎) 안에 소년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회원 아홉 명, 이것이 횃불이 되어 조선 어린이운동이 차차로 넓어젔다. 그때 동경 유학 가서 계시던 방정환(方定煥) 선생님이 여름방학에 도라와서 이 소년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당시 방 선생은 연세 스물, 그러다가 방 선생은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서 동경제대 문과(東京帝大文科)에 다니시며 개벽사(開闢社)의 도음을 입어 나오게 된 것이 『어린이』 잡지다. 그때가 一九二三년, 잡지 『어린이』를 가진 어린이운동은 점점 불꽃 일 듯 성해저서 그 이듬해 一九二四년에 조선 아동문화사(史)에 오를 어린이날이 서울 <천도교소년회>의 이름 밑에 비로소 태여나게 되었다. 해마다 오월 첫 공일을 어린이날로 정해서 기념행사를 하게 되었는대 그것은 이름뿐 실로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에 동경 <색동회> 여러분과 지도자대회(指導者大會)를 모아서 어린이운동에 관해서 의론을 하는 등(이상 12쪽) 여러 가지 힘을 썼든 것이다.
그동안 방 선생은 조선 십삼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시며 어린이 문제의 강연도 하시며 동화회도 열어 많은 감명을 주었스며 동화집 『사랑의 선물』도 그때의 소득이었든 것이다.
그러자 一九二五년 방 선생도 동대를 마치시고 어린이운동에 온 마음과 온몸을 떤져 넣게 되었다. 그러나 천도교회 단독으로는 힘이 약하니 어린이운동을 크게 넓일 양으로 서울 四十여 단채를 모아 <소년운동협회>라는 것을 만들었스나 좀 무리한 곳이 있어 뜻을 달리하는 분들이 탈퇴하야 <오월회>라는 것을 달리 만들게 되었다가 다시 양쪽에서 서로 양보하야 <소년련합회>를 만들어 나아가게 되었다.
一九二八년에는 一九二五년부터 개획하여 왔던 세계 스므 나라의 아동 작품을 모아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까지 되었다. 이런 어린이운동이 가장 성황을 이루던 一九三○년 전후에는 조선 아동문학도 그중 성하여저서 신문마다 동요, 동화를 위하야 지면을 아끼지 않었던 것이다. 다시 이것은 일반 개몽운동에도 한 가지 큰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辛未년 七월 二十三일 방정환 선생이 돌아가시고 차차 일본의 압박도 심하여저서 『동아일보』 ‘부나로드’의 게몽운동 같은 것도 길이 막히고 그러자 어린이날도 점점 쇠하여질 운명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잡지 『어린이』가 一九三四년에 폐간. 一九三七년의 어린이날에는 외놈 국기를 들고 외놈 국가를 부르며 기행열을 하지 않으면 않 되게 되었다. 여기에 이르자 이때까지 이끌어 나오든 몇몇 분들도 어린이날을 그만두고 오히려 마음속에 직혀 나가는 것이 옳다 하야 그후에는 어린이날의 행사를 끊고 묵묵히 지내왔으나 이제 다시 어린이날을 맞이하였으니 새로운 이 동산에서 씩씩하게 커 나가자. 끝 (이상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