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통영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통영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신상훈, 부위원장 황덕윤, 총무부장 안성관, 치안대장 고학수, 조직부장 김재수, 선전부장 황하수, 재정부장 김용식, 교통부장 박용건, 용선부장 최수만이었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349쪽, G-2 정기보고 1945. 11. 10.~11.)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통영에서는 1950년 7월 25일경 통영경찰서, CIC, 해군 G-2, 헌병대 등이 통영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미리 잡아들여 경찰서 유치장과 항남동 멸치창고에 감금하였다.
그 뒤 분류를 거치고 남겨진 250여 명의 주민들이 7월 26일과 27일 광도면 안정리 무지기고개, 통영 앞바다 등에서 총살당했다. 남망산 금굴에서도 총살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헌병대(CID) 문관이었던 한씨(한학구)는 광도면 무지기고개에서 총살당한 110명의 보도연맹원들의 명단을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통영지역에 진입한 인민군은 국군의 반격으로 인해 비록 읍내를 하루 동안 점령하는 것에 그쳤는데도 국군의 수복작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8월 18일 새벽 국군 해병대는 용남면 장평리 해안에 상륙하여 삼봉산 전투에 돌입하자, 장평리 김금례는 국군의 밥을 했으며 남편 박덕용(朴德用)은 노무자로 밥과 탄약을 나르게 되었다. 국군이 북진을 하자 남편 박덕용은 이들과 같이 떠났다. 그러나 남아있던 김금례는 오히려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1950년 8월 19일 CIC군인에게 연행되었으며, 다음 날 새벽 용남면 장평리 건너편인 거제 사등면 덕호리 선창가로 끌려 가 총살당했다.
장평리 장봉립은 통영읍내인 정량동에 살고 있었는데 전쟁 발발 후 용남면 장평리로 피난하면서 정량동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1950년 8월 17일 인민군들이 통영을 점령한 후에도 정량동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CIC요원으로 추정되는 군인에게 알려져 잡혀가게 되었다.
당시 장봉립은 정량동에 다녀온 후 마을에 나갔다가 친구 김발식을 만났으며, 김발식이 “오늘 통영읍 공기가 어떠냐”고 묻자, 장봉립은 “별 이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그 옆에 있던 삼베옷 차림의 사람이 이 대화를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CIC요원으로 밝혀진 이 사람에 의해 장봉립이 배에 태워 거제 견내량(거제 사등면 덕호리)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시신은 거제 사등면에 살던 친척이 발견하여 가족들에게 연락되어 수습하였다. 이때 다른 마을 주민 7명이 함께 연행되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국군의 통영 수복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사 3』(295쪽)은 “8월 19일 12:00에는 통영읍내의 질서가 회복되어 피난하였던 시민들도 되돌아 왔고, 점령당한지 3일 만에 신속하게 통영을 탈환하게 됨으로써 무엇보다도 무고한 읍민들이 적의 만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복된 지역에서는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연행되어 항남동 멸치창고에 감금되었다가 학살당했으며, 국군이 통영을 탈환한 후에도 원문고개의 전선의 긴장은 1950년 9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1950년 8월 18일 통영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망일산 정상에 주둔하였고 국군은 견내량으로 상륙하여 정량동 독매산에 주둔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던 주민들은 인민군의 협박으로 쌀과 밥을 날라야 했다. 1950년 8월 19일 국군이 통영을 탈환하자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통영경찰서로 연행되기 시작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헌병대가 주둔한 항남동 멸치창고에 감금되었다.
통영여자중학교 배속장교(계급은 소위) 박숙경 등 통영 주민들은 헌병대 문관 문창섭 등에게 잡혀갔다. 통영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8월 20일 태평동에서 연행된 나임숙(나임숙은 탁복수의 경우처럼 항남동 헌병대 창고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생존자이다)은 통영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던 2일 동안 경찰들로부터 쇠파이프로 온 몸을 맞았으며 물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나임숙을 비롯한 구금자들은 5~6일 후 다시 항남동 멸치수산회사에 있던 헌병대 창고로 이송되었다. 통영경찰서 경찰관들은 이들을 항남동 헌병대로 이송하면서 “푸른 동산에 가서 고이 잠들어라”며 조롱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푸른 동산’은 처형장인 명정동 절골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임숙은 인민군 점령당시 통영 시내에 있었다는 이유로 통영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고문을 당한 후 다시 헌병대가 주둔해 있던 항남동 멸치창고로 이송되어 3주 동안 갇혀 있었다. 감금되어 있던 동안 새벽 1시경 5명 또는 15명 정도의 주민들이 4~5회 불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태평동 안승관과 그의 부인 탁복수는 계엄사령관 박태진, 헌병대장 오덕선에게 직접 취조를 당했다. 연행된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던 헌병대 멸치창고에서는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안승관은 1950년 8월 23일에 탁복수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탁복수는 그 뒤로도 20여 일 동안 고문을 당하다 풀려났다. 풀려난 뒤 암매장 당한 남편의 시신을 찾았는데, 수습 당시 시신에 총상은 없었다.
1960년에 있었던 이양조의 증언에 따르면, 헌병들이 때려서 죽인 사람이 안승관 외에 또 있었는데, 그는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끌려 온 주민으로 헌병들에게 매를 맞은 후 멸치창고 안에서 사망했다.
당시 "ㄷ“자 형이었던 멸치창고에는 서병대를 포함하여 70여 명의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당시 창고 벽 칠판에는 생선이 크게 그려져 있었으며, 그 위에 ”도마 위에 놓인 물고기떼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군인들은 학살이 있는 날에는 새벽 1시에 ”기상“을 외치고 다녔다. 이들은 불려 나온 주민들에게 멸치부대를 씌우고 붉은 글씨로 ”이적“이라고 써 붙인 채 손을 뒤로 묶고 데리고 나갔다.
이들은 명정동 뒷산 등에서 총살당했는데, 당시 명정동 뒷산의 총살은 공개처형이어서 많은 주민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서병대, 조문주 등 항만동 멸치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중앙시장을 한 바퀴 돈 후 명정동 충렬국민학교를 지나 절골 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총살은 3~4일 동안 매일 있었는데 한 번에 15~20명을 총살했다.
당시 헌병대 문관들은 학살지에 미리 구덩이를 파 놓았으며 희생자들이 도착하자 일렬로 구덩이 앞에 세우고 총을 쐈다. 희생자들은 15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희생자들과 같은 수의 군인과 문관들이 총을 쐈으며,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당시 명정동 뒷산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7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안승관이 의식을 잃은 채 실려나간 후로 20여 일간 항남동 헌병대 창고에 갇혀 있던 탁복수는 며칠에 한 번씩 갇혀 있던 주민을 새벽 1시에 깨워 둘씩 짝을 지어 30명 또는 36명씩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탁복수는 이렇게 본인이 직접 목격한 수만 15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또 다른 생존자 나임숙의 증언에 따르면, 추석 무렵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나와 당시 창고에 남아 있던 15명 정도의 생존자들을 개별 면담한 후 9월 30일경 석방했다. 헌병대 수석문관 이양조는 이 때문에 문관들이 진해 헌병대(대장 서소령) 군인들이게 마구 맞았다고 증언했다. 진해헌병대가 통영에 온 날은 1950년 9월 23일이었으며, 당시 멸치창고에서 생존한 사람으로 나임숙, 탁복수, 박숙자 외 13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1950년 8월 20일 국군은 통영읍내를 수복하였으나 9월 11일까지 통영지역 전체를 수복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도산면에서는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황이었다. 국군은 바다에 머물면서 마을에서 인기척만 보이면 총격을 가하였고 청년들이 보이기만 하면 모두 잡아갔다. 통영공립수산중학교 학생이었던 광도면 용호리 박철진과 도산면 법송리 박선병이 1950년 9월 8일 산에 있다가 용호리에 상륙한 군인 7~8명에게 잡혀갔다.
도산면에서는 1950년 8월 20일경 도산면 저산리 서촌마을 1구장 정선화와 동촌마을 2구장 차용수가 저산리에 상륙한 국군에게 잡혀가 바다에서 살해당했다. 정선화와 차용수 두 사람이 국군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은 주민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광도면 용호리에서 도산면 저산리까지 해군이 오르내리면서 바닷가에 보이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갔으며 저산리 구장 2명이 붙들려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박선병, 박철진과 함께 끌려간 주민들이 7~8명 더 있었으나 누군지 확인되지 않았다. 군인들에게 끌려간 주민들은 이끼섬 부근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산면이 완전히 수복되고 경찰에 의해 치안이 확보된 후에도 도산지서에 의한 희생사건이 있었다. 도산지서 경찰관들은 1950년 8월 16일 후퇴하였다가 9월 23일 복귀하였다. 복귀한 경찰관들은 지서주임과 지서 소속 순경 나정숙, 이을수 등 5명이었는데 이들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던 주민들을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하여 취조하거나 이들에게 감정적인 보복 행위를 자행하였다. 특히 이을수 순경은 복귀일인 9월 23일 도산면 법송리 주민 박성도가 부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형이 살던 집을 태워 없앴으며, 9월 24일에는 도산면서기(총무계장)였던 조권환을 연행하여 고문했다.
면서기였던 조권한이 인민군에게 협조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었다. 연행된 조권환은 순경 나정숙으로부터 취조를 당했는데, 순경 나정숙은 “공무원으로서 부역행위를 했으니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들은 순경 이을수가 조권환를 지서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도산국민학교뒷산의 방공호(사격용 구덕)에 꿇어앉히고 그 뒤에서 휴대한 칼빈총으로 사살하였다. 이어서 오후 4시 20분경 이을수 순경은 같은 날 오전 9시경 도산지서 앞에서 연행하여 감금 중이던 청년 2명을 끌고 나와 조권환을 살해한 같은 장소에서 또 총살하였다. 조권환의 시신은 수습되었다. 당시 함께 희생된 시신이 2구가 더 있었다고 하나 당시 희생자의 신원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950년 10월 1일(음력 8월 20일)경에도 원산리에서 통영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여의치 골짜기에서 10여 명의 도산면 주민들이 총살당했는데 희생자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가해자는 도산지서 소속 경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통영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