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신후담→16세 신의정→17세 신진→18세 신종원
18세 신종원(辛宗遠)
생년:1551년 9월 13일 명종6년 신해(辛亥)
졸년:1607년 12월 6일 선조40년 정미(丁未)
과거:1588년 2월 24일 선조21년 무자(戊子) 식년시 생원3등 29위(100명)
관직:장례원 사평(司評).금부도사.연천현감.호조좌랑.
증직:증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配:남양홍씨 1608년 졸
묘:충남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산5-17
◇신종원(辛宗遠)께서 1600년 연천현감을 퇴직후 예산으로 1602년 귀향했다 장자 손으로는 처음으로 예산에 귀향하셨으며 이때 아들 진사 신계영(27세)도 함께 귀향 했다 하여튼 1602년 신종원 신계영 부자가 함께 예산 신암에 귀향하여 살게 되었는데 귀향후 신암의 음택지가 협소함에 음택지를 찾아 나서신것 같고 두 부자(父子)께서 찾으신 곳이 현재의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이다 신종원 께서는 예산에 5년을 사시고 1607년에 졸 하셨고 묘를 대술면 송석리의 명당터 학정혈에 쓰게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때 송석리의 토지는 음택지와 함께 신종원 신계영 부자(父子) 가 예산에 함께 사시던 기간에 마련 하셨다 구전에 의하면 송석의 토지가 신계영(선석공)의 사패지 라는 설도 있는데 신계영의 교지가 거의 모두 보존되었는데 사패교지가 없는것을 보면 아버지 신종원께서 터를 잡으신게 맞을것 같다는 생각이다 혹은 아버지 신종원께서 생전에 음택지등 일부의 토지를 소유했는데 후일 신계영(선석공)께서 벼슬이 높아지면서 일때의 많은 토지를 넓혔을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경자(1600) 1월 10일(을묘)
정창연ㆍ강연ㆍ오백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창연(鄭昌衍)을 대사헌으로, 강연(姜綎)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오백령(吳百齡)을 집의로, 황민중(黃敏中)을 장령으로, 최철견(崔鐵堅)을 필선(弼善)으로, 이성(李惺)을 문학(文學)으로, 박효생(朴孝生)을 정언으로, 최흡(崔洽)을 공조 정랑으로, 박사제(朴思齊)를 전적(典籍)으로, 김선여(金善餘)를 봉교(奉敎)로, 신종원(辛宗遠)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삼았다.
선조 33년 경자(1600) 9월 12일(임자)
경리 접반사 한응인이 접대를 소홀히한 연천 현감 등을 죄줄 것을 청하다
경리 접반사 한응인이 서장을 올리기를,
“경리의 행차가 오목원(梧木院)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병정관(幷定官)인 교동(喬桐)에서는 하인 2~3명만을 보내고서 현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연천 현감(漣川縣監)은 일찌감치 참(站)에 나왔다가 피해 도망쳐서 대접하는 일이 말이 아니게 되었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이유홍(李惟弘)과 신종원(辛宗遠)의 죄를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 서장에 있는 수령은 모두 나국하도록 하라. 미리 알리라고 하였었는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경기 감사도 함께 나국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전
송암집 속집 제2권 / 시(詩)
도성으로 들어가 묵지동 집에 우거하고 있는데, 박홍중과 신술고가 찾아왔기에 차운하여 읊조리다
〔入城寓墨池家朴弘仲辛述古來訪次吟〕
앵무새가 짝 부르는 녹음이 짙은 곳에 / 流鶯喚友綠陰深
두 명의 시인이 차례차례 찾아왔네 / 兩箇騷人取次尋
채근을 잊은 채 산수를 즐기다가 / 忘却采芹思樂水
주막에서 술 사 먹느라 돈만 허비했네 / 靑帘沽酒費南金
( 신술고(辛述古) : 신종원(辛宗遠, 1551~1607)으로, 술고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동강(東崗)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신진(辛鎭)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2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사평(司評), 연천 현감(漣川縣監), 호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증직교지
대술 송석 학정날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