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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직 신도비명(李景稷神道碑銘) 김류(金瑬)
이 비는 1668년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산 57-10번지에 건립된 이경직신도비명(李景稷神道碑銘)으로 김류(金瑬)가 비문을 지었으며, 이정영(李正英)이 글씨를 썼다. 이경직(1577∼1640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고(尙古), 호는 석문(石門)으로 정종의 8세손으로 이수광(李秀光)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李恒福) ·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선조 34년(1601년) 진사시에 오르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광해군 1년(1609년) 승정원 주서, 이듬해 정자 · 봉교, 1611년 전적 · 호조좌랑 · 수찬 ·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613년 병조정랑 재임시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황해도 도사로 복직되었다. 1617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이후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假島)에 주둔하자 철산 부사(鐵山府使)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었고, 인조 2년(1624년) 수원 부사, 1627년 병조참판, 1634년 도승지를 거쳐 병자호란 후인 1640년 강화 유수에 이르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글씨에 능했고,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이경직신도비명(李景稷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행자헌대부 호조판서 겸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行資憲大夫 戶曹判書 兼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증시효민(贈諡孝敏) 이공신도비명병서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는 글을 짓고
아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령부사 겸형조판서(行判敦寧府事 兼刑曺判書) 정영(正英)은 삼가 글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한다.
숭정(崇禎) 기원 13년 경진 7월 강화유수 이공(李公)이 임지에서 졸(卒)하였다. 관찰사가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해당 관리에게 명하여 부의를 내리도록 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올렸다. 이조에서 증직을 논의하여 의정부우의정에 추증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서는 시호를 의논하여 충민(忠敏)이라고 정하였으니 모든 의례가 갖추어졌다.
이때에 공의 아우인 전임 이조판서 백헌(白軒)공 경석(景奭)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이에 내가 고개 들어 생각해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대의 형과 사귄지가 근 50년쯤이나 되었으며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즐거움도 대략 같이 겪었다. 따라서 공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공을 위하여 명(銘)을 짓는다면 어떻게 문장으로 꾸미겠는가? 그러나 명(銘)을 짓지 않는다고 하여서 어떻게 차마 공을 저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우선 행장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공의 이름은 경직(景稷)이고 자는 상고(尙古)이며 석문(石門)은 그의 호(號)이다. 집안은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공정대왕(정종대왕)의 8세손이다.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과 함풍도정(咸豐都正) 계수(繼壽)가 바로 공의 고조와 증조이며, 조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수광(秀光)이다. 부친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인 유간(惟侃)으로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개성고씨(開城高氏)로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정국공신 개성군 수겸(守謙)의 증손녀이자 대호군 한량(漢良)의 딸이다. 공이 높은 관직을 역임한 까닭에 이대(二代)의 조상이 추증된 것이다.
공은 천성이 뛰어나 평범한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조금 자라서는 점점 그 뛰어남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재상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당시에 인물을 보는 눈이 상당히 높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는데, 공을 보자 그 비범함을 알아채고 곧 학문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공을 아끼었다. 재상 상촌(象村) 신흠(申欽)공도 공을 칭찬하니 두 어른이 입을 모아 칭찬하자 이미 어릴 때부터 이름이 났고 조금 더 커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하루는 여러 학생들과 함께 예조에서 실시하는 과강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예조의 강관에게 부탁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학생 하나가 선생에게 청하자 공이 곧 편지를 찢으며 “시험에 공정치 못한 짓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고 하였다. 사계(沙溪) 공이 이 말을 듣고 특이하게 여겼다. 겨우 십오 세를 넘기자 임진년 섬나라 도적들의 난리를 만나게 되었다. 험난한 도로와 관문을 지나며 자주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구차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난리가 조금 평정되자 부모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이제 막 난리에서 벗어난 터라 명나라의 병사들이 도성에 가득하였다. 공은 매일 군사들의 명적을 정리하고 베끼는 일을 하여 부모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양하였다. 더욱더 공부에 힘썼으며 특히 사부(詞賦)에 뛰어나서 품격이 훌륭하였으며 재기가 번득이니 공의 명성이 성균관에 가득하였다. 신축년에 생원과 진사의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을사년에는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였는데 세 번을 모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자 칭송이 더욱 자자하였다. 이해 겨울 선조대왕께서 성균관의 유생에게 귤을 하사하시고 이어 과거를 실시하셨는데, 공이 또 여러 유생들 중에 일등을 하자 곧바로 전시에 응시하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이어 승문원에 소속되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으며 기유년에는 승정원주서에 천거되어 임명되었고 시강원의 설서를 겸하였다. 공이 6품아래의 지위로 동궁을 보좌하고 인도하는 직무를 겸한 것은 매우 높게 발탁된 것이었다. 얼마 후 사국의 천거를 받아 검열을 거쳐 대교에 이르렀으며 여전히 설서를 겸하였다. 경술년 봄에는 홍문관의 정자가 되었는데 더욱 높게 발탁된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눈을 부비며 다시 쳐다보았다. 공이 전에 사관에서 재직하고 있을 때 명망이 높은 선비 몇 사람을 천거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동료 중에 꺼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공은 별다른 뜻 없이 세 명을 천거하게 되어있는 규정에 따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이 멋대로 천거하는 차례를 바꾸었다고 죄를 얽어 드디어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특별히 서용되어 규례에 따라 봉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전적으로 승진되었고 호조 좌랑에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옮겼다.
당시에 지관(地官)인 이의신(李懿信)이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선동하며 광해군을 현혹시켰다. 조야에서 모두 내심 분개하고 있었지만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가르는 이변이 생기자 공은 동료들과 함께 글을 올려 시정을 논하며 이의신(李懿信)을 힘을 다해 공격하니, 공의 바른 주장을 칭찬하는 여론이 높았다. 얼마 후 수은어사(搜銀御史: 使臣의 銀 휴대량을 조사)로서 의주에 갔다가 돌아온 후 병조좌랑이 되었고 아울러 지제교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비록 다른 관직으로 옮겨도 항상 지제교를 겸직하였다. 계축년에는 정랑에 올랐다.
판서 박승종(朴承宗)은 사람이 매우 잘난 체하고 교만하여 여러 낭료(郎寮)들을 멸시하였지만 단지 공에게만은 예의를 다해 대우하였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공에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해에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먹고 사형수 박응서(朴應犀)를 부추겨 변란을 고발하게 하였으니. 그 흉계는 영창대군을 핑계로 우선 선왕의 유명(遺命)을 받은 일곱 신하를 제거하고 나아가서 영창대군까지 해치려는 음모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시에 체포되고 장차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충숙공(忠肅公) 서성은 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과 사돈지간이라 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그 서성(徐渻)은 공의 부친인 찬성공의 막역한 친구였다. 부친이 울면서 “내가 차마 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이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이첨(爾瞻)에게 가서 구명을 청하였는데 때마침 평소에 이첨(爾瞻)과 사이가 좋지 않던 이첨(爾瞻)의 일가가 공이 찾아온 것을 보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공은 그 길로 수성찰방에 나가게 되었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구실로 오래도록 험담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충숙공(忠肅公)의 아들인 대사헌 경우(景雨)가 “내 벗이 나의 부친을 구하려다 험담을 듣게 되었는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글을 올려 바른대로 고해 바치니 그제서야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갑인년 봄에 부모님을 뵈러 서울에 왔다가 오랫동안 임소로 돌아가지 않자 파면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사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병조에 들어가 정랑을 두 번 지냈으며 당차접반관과 진휼종사관, 평안도경차관을 역임하니 수년간 하루도 편안히 조정에 있던 날이 없었다. 정사년 여름에 재상인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회답사의 정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공을 종사관으로 불러 함께 가게 되자 오(吳)공이 마음속으로 공을 형제처럼 생각하였다. 일본의 관사에서 머무는 동안 일본에서 제공하는 곡식이 남아돌자 일행이 그것을 팔아 쓰려하자 공이 꾸짖어 말리며“먹지 않고 살 수가 없어서 마지못하여 이 곡식을 먹는 것인데 차마 어떻게 팔아서 이익을 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남는 곡식을 모아 뜰에 가득 쌓아 놓으니 왜인들이 모두 놀라며 탄복하였다. 왜인의 문서중에 조금이라도 불손한 말이 있으면 모두 고치게 하니 왜인들도 끝내 옛일을 끌어들여 감히 강력히 주장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의 글씨를 얻으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뜰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돌아가려고 하자 몇천금에 달하는 백금을 일행에게 선물하는 등 현란하게 빛나는 진기한 보물들이 많았지만 모두 물리쳐 받지 않고 텅 빈 행낭만 가지고 돌아왔다.
무오년 봄에 흉측한 의논이 날로 심하여져서 모든 신하들이 매일 조정에 나아가 모후를 폐위시키라고 청하니 그 기염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눈빛은 탐욕에 이글거렸다. 공은 양친을 모시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끝까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양사에서 모두 먼 곳에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이때에 죄를 입은 자가 십여명인데 공과 나를 더욱 더 흉하고 참혹한 말로 탄핵하니 보는 이마다 위태롭게 여기며 앞으로 더욱더 흉악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않자 위급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공은 일본에 사신을 다녀온 공로로 관례에 따라 당연히 승진되어야 하는 데에도 당시에 탄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승진명령을 받지 못하고 거의 오년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조정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철산군의 가도(椵島)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그곳은 바다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명(明)군과 협의해야할 사항도 매우 많다는 논의에 따라 부로 승격시키고 칩거 중이던 공을 발탁하여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부사로 파견하였다. 공이 떠난 후 사헌부에서 대신을 모욕하였다고 탄핵하니 곧 면직되어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당시에 대신은 권력을 잡고 있던 재상 박승종(朴承宗)인데, 공이 항상 당시의 일에 울분을 품고 불평이 쌓여 있다가 취중에 터져 나와 승종(承宗)을 건드리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승종(承宗)이 전해 듣고 정말 화가 났지만 여론이 일어날 것을 꺼리어 광해군에게 청하여 그대로 부임하게 하는 한편, 사헌부에서 뒤이어 탄핵하게 하여 마침내 통정대부로의 승진을 환수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철산의 백성들은 무사처럼 난폭한 성품을 갖고 있었지만 공을 부사로 맞게 되자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품의 갓난아이처럼 온순하게 되었다. 당시에 오갈 데 없는 명나라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곳곳에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날마다 약탈을 자행하였지만 공이 부임하자 모두 두려워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 모(毛)장군도 명령을 내려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 중국인은 공에게 경중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중국인을 꽁꽁 묶어 잡아오기도 하였는데 공은 맨발로 뛰어 내려가 손수 결박을 풀면서 “이 백성들은 전에 만력(萬曆)(=明 神宗皇帝)께서 다시 살려주신 사람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모(毛)장군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감히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니 중국인들이 더욱더 공을 공경하고 흠모하였으며 모(毛)장군 역시 공을 깊게 믿었다.
계해년 봄에 지금의 주상께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등극하자 곧 부윤인 정준(鄭遵)을 의주에서 참수하시고 공을 통정대부로 승진시켜 의주부윤을 맡기었다. 의주는 철산의 옆에 있는 까닭에 백성들이 평소부터 공의 명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서로 모여 축하하면서 “성상의 은혜를 우리들이 가장 먼저 받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공은 철산에서보다 더욱 원려로서 정사를 폈으며 괴로운 일은 백성보다 먼저 하고 즐거운 일은 모두 백성을 앞세우니 사람마다 매우 감격하여 모두 기쁘게 일을 하였다. 마침 전염병이 창궐하자 병자들의 거처를 성 밖에 마련하고 세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격리시키고 날마다 몸소 성위에 올라가 죽을 끓여 먹였다. 일 년도 못되어 치적이 매우 높게 되었지만 공은 늙으신 부모를 염려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병을 얻어 점점 심해져 갔다. 중신이 여러 번 주상에게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지만 주상은 감당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수(元帥)에게 물어서 공의 병세를 확실하게 알고 난 뒤에 비로소 직책을 바꿔 주니 공은 돌아와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갑자년 정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그날 밤으로 즉시 공을 전라도절도사에 임명하였다. 공이 급히 여산으로 내려가 군사를 징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군하여 공주에 이르렀다. 그때 흉악한 적의 군사가 이미 황해도 서쪽 가까이에 당도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보졸(步卒)을 모두 중군(中軍)에게 맡긴 뒤 기병 백여명과 정예 오백여명을 뽑아 서울로 달려와 호위하니 주상이 불러 만나보시고 위로하였다. 이어 강남에 병사를 주둔시키도록 청한 후 한강에 돌아오니 강변의 촌락에는 사람의 종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공이 장교를 보내어 배 몇 척을 찾아 기다리게 하고는 주상의 행차를 호위하여 강변에 도착하였는데 칠흙같은 어두운 밤이어서 주위를 구분할 수 없었다. 공은 촌락의 울타리를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는 손수 검을 잡고 다투어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을 진압한 후 주상을 모시고 배에 오르니 모시는 자가 겨우 서너명밖에 없었다. 당시에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나 공이 훈련되지 못한 병졸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느라 미처 제대로 부대를 편성할 틈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주상이 수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머무르다가 후군이 매우 무질서한 것을 보시고는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체직시켰다. 중신들이 부산의 왜관에서 머물고 있는 왜인을 데려다가 적을 토벌하는 것이 좋겠으며, 아울러 공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어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공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즉시 주상께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는 몇 가지 곤란한 일을 조리 있게 아뢰니 주상이 중지시켰다. 주상의 행차가 공주에 이르자 적병이 패주하였다는 보고가 다다랐다. 공은 수원부사에 임명되자 겨우 며칠 만에 음식과 장막등을 빠짐없이 갖추어서 서울로 돌아가는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3월에 임금을 수행한 공로로써 가선대부에 올랐다. 가을에는 체찰사의 명령에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가 의병을 일으킨 한 무인의 법을 어긴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가 이 말이 권력있는 신하의 뜻에 거슬리자 사간원에서 임소를 멋대로 떠났다고 공을 탄핵하였다. 주상이 따르지 않고 다만 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그 대관이 다시 부당한 말을 했다고 제기하여 덧씌우려 하였다. 그러자 주상은 대관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여 체직시키니 사헌부에서 공을 변방에 군졸로 내보내는 벌에 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주상이 또 죄를 면해주도록 명하자 공은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병을 구실로 파직되어 돌아왔다.
이해 겨울 주상이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고 대사령을 내리자 공은 동지중추부사 겸 특진관에 서용되었으며 가을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병인년 여름 한림 강왈광(姜曰廣)과 급사중 왕몽윤(王夢尹)이 와서 조서를 내렸다. 공이 중국어에 익숙하여 서울로 돌아와 장예원판결사 겸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체찰찬획사로 옮기었다. 이때부터 항상 비국에서 제조의 직무를 겸직하였다.
정묘호란에 공은 왕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있었는데 금나라가 강화를 요구하자 공에게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및 신풍군 장유(張維)과 함께 주선하도록 명하였다. 금나라에서 반드시 주상이 직접 맹세의 의식을 주관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여러 신하에게 직접 주관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주위에서 모두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공이 나아가 “만백성을 위하여 강화를 허락한다고 하늘에 고하고 맹세의 의식은 대신들이 대신 주관하도록 하시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마침내 공의 말대로 결정되었지만 당시의 중론을 매우 거스르게 되었다. 강화가 이루어지자 양사가 함께 처벌할 것을 주청하자 주상이 “상줄 만한 공로는 있지만 벌할 만한 처사는 없다.”라고 답하시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양사에서 계속하여 주청하자 상은 다만 참판만을 면직시켰다. 공이 상소를 울리어 스스로를 탄핵하자 상은 아끼는 말로서 대답하셨으며, 환도한 후에 공이 다시 상소를 올리어 겸직한 관직까지도 사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다시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기사년 봄에 도체찰부사가 되었는데 공이 병사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서 군대를 끌어안고 소식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매우 비밀스럽게 하자 조정에서 중신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청하였다. 공이 왕명을 띠고 가도(椵島)에 들어가니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고 내당에 주연을 베풀어 공을 상석에 앉히는 등 충심을 다하여 예우하면서 조금도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듯이 하였다. 공이 백성을 위한 식량을 요청하자 즉시 수백곡(斛)의 양식을 내어 구휼하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공에게 노부모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는 관례에 지나치는 선물을 하였다. 공이 돌아와 모문룡(毛文龍)이 반드시 편안하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아무도 수긍하지 않았지만, 모문룡(毛文龍)이 죽자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호조참판을 거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경오년에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전에 체찰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교동에서 군대를 살펴보고 돌아와 “교동은 섬이기 때문에 농지가 적고 척박합니다. 따라서 부세가 너무 많으니 줄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아뢰어 주상의 재가를 받았다. 이번에도 부임하자 군읍의 실정에 맞도록 부세를 고르게 하니 교동의 백성들이 감동하여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임기를 마친 후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다.
이듬해 계유년 금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가 오자 주상이 하교하기를, “접대하는 사람이 적절하지 않으면 자주 문제가 발생하니 그가 상중(喪中)에 있지만 잠시 이모(李某 : 李景稷)를 기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고 아뢰자 곧 명을 거두었다. 갑술년 가을에 삼년상을 마치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모상 때와 같이 예에 벗어남이 없었다.
병자년에 공은 호군에 임명되었고 다시 비국당상을 경직하였다. 12월에 적병의 침입을 알리는 급보가 매일 날아들었다. 청나라는 겉으로 강화를 표방하면서 선봉대를 이끌고 밤새달려 졸지에 서쪽 교외의 사현까지 침입하였다. 임금의 행차는 강도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도성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숭례문 앞에서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과 공을 보내어 적장을 만나 보도록 하였다. 모화관에서 적과 만난 공은 그들의 의도가 강화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뒤따라갔는데 성에 들어가자마자 적병이 성을 포위하였다. 매번 청인과 교섭을 위하여 대신을 내보낼 때는 언제나 공이 함께 가도록 하였는데 공이 말을 하려고 하면 청인이 성을 내며 “이시랑(李侍郞)은 말하지 마시오.”라곤 하였다. 공은 이전에 왕명을 띄고 여러 번 접대하였는데 항상 뛰어난 공의 달변으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던 저들은 평소부터 공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포위된 가운데에서 공은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정축년 봄에 왕의 행차를 수행하여 도성으로 돌아와 의정부의 천거를 받아 호조판서로 등급을 뛰어 임명되었다. 난리 끝의 어지러운 속에서 모든 일이 새로 정하여 졌는데 궁중에 필요한 음식물의 구입과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의 등급 및 도량형을 바로잡은 일은 모두 공의 품의에 따라 결정되었다. 당시에 대신중 공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주상께 아뢰어 공이 파직되었지만 공의 사실 추호도 잘못이 없었다. 가을에 특별히 서용되어 도승지가 되었다.
10월에 공은 일찍 일어나 조정에 나오려다 갑자기 중풍을 만나 일 년간 병석에 누워있었다. 이듬해 겨울 강릉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관이 공을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체직시키기를 청하자 지중추에 임명되었으며 도총관을 겸하였다. 경진년 봄에 다시 비변사의 천거로 강화유수에 임명되자 병들어 감당할 수 없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제단을 쌓아 난리 중에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고 남은 백성의 호적을 작성하여 호구를 파악하였으며, 병장기를 거두고 군졸을 보충하는 등 공이 시행한 여러 가지 일은 모두 칭송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직무에 쌓인 피로로 종기를 앓다가 (·····마멸·····) 임소에서 순직하였다. 가족에게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간곡하게 당부하는 말은 모두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에 대한 근심뿐이었다. 삼십여 년 간 조정에서 벼슬하였지만 집안에 남긴 유산이 없었으며 마지막 가는 길에도 수의 이외에는 모두 값싼 천을 사용하였다. 공이 졸한 해로부터 그가 태어난 정축년까지는 모두 64해이다. 이해 구월 과천 관악산의 북쪽 기슭 자▨▨좌에 장사지내니 선영의 아래이다.
공은 처음에 정경부인에 추증된 보성오씨(寶城吳氏)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장영(長英)인데 음직으로 통진현감에 올랐고 둘째인 기영(起英)은 아직 벼슬하지 못했으며 셋째 정영(正英)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성균관전적으로 옮겼다. 첫딸은 별좌인 이시중(李時中)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으며 둘째는 선비인 강홍익(姜弘益)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로 고성이씨(固城李氏)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니 선비인 윤세창(尹世昌)에게 시집갔다. 장영(長英)은 사남일녀를 두었고 기영(起英)은 1남 1녀를 두었으며 정영(正英)은 일남일녀를 두었고 강홍익(姜弘益)은 사남일녀를 두었는데 내외의 여러 손자는 모두 어리다.
공은 천성적으로 효성과 우애를 지닌 성품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 부모께서 혼인시키려 하자 공은 부모 모시는 일을 다 하기에도 벅찬 어려운 시절이라고 굳게 사양하였다. 난리가 끝난 후 비로소 장가를 들었지만 어린아이 때처럼 부모곁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에 사사로이 모은 재산이라곤 없었으며 노비를 부리거나 집안일을 돌보는 등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공이 몸소 하였다. 심지어 청소를 하거나 부모님을 마중하는 일도 때때로 직접하여 머리가 세어지고 재상이 되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몸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날마다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모님의 친구를 초청하여 즐겁게 노시도록 하였다. 경사스러운 날이나 생신날이면 언제나 가무와 함께 주연을 베풀고 손님을 초대하여 술잔을 받들고 헌수를 올렸으며,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려 부모님을 기쁘게 하더니 돌아가신 후에야 그쳤다. 부모님께서 병이 나시면 옷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다. 병이 심하여지면 반드시 변을 맛보고 변기를 닦았으며 몸소 부모님의 속옷을 빨고 옷을 입혀 드렸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약에 타서 올렸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전후로 육년간을 복중에 있었지만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한시도 상복을 벗어본 때가 없었다. 둘째 동생이 젊어서 세상을 떠난 것을 애통해 하여 묘소에 심은 나무가 굵어지도록 세월이 흘러도 중씨의 말만 나오면 슬픔을 못이겨 눈시울을 적시곤 하셨다. 동생의 딸이 넷이었는데 공은 하나도 혼기를 놓치지 않고 시집을 보냈다.
공의 동생인 이조판서 경석(景奭)은 공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손수 회초리로 한두 대 때리다가 말고는 곧 동생을 껴안고 울면서 본받을 만한 옛날 사람들의 훌륭한 행실을 누누이 말해주곤 하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르치고 경계하니 판서공의 높은 문명은 역시 공의 가르침에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공은 인척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언제나 재물을 내어 도와주었고 또한 이웃까지도 공에게 의지하였으니 공은 진정 독실히 행동하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춘추관에서 붓을 잡으면 뛰어난 사관(史官)으로 일컬어 졌고 경연에서 주상을 모시고 경서를 강론하면 진실한 학자로 불리워 졌다. 하위직에 있을 때나 고관이 되었을 때나, 철산에 있든 의주에 있든 아니면 강화에 있든 공은 크고 작은 벼슬과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언제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왜인이 공경하고 감복하였으며, 왕명을 받들고 가도(椵島)로 들어가서는 명나라 장수가 예를 다하여 겸손하게 대하였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이라도 공에게는 사나움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공은 진실로 국가의 동량이며 충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정도로 공의 전모를 밝혔다고는 할 수 없다. 호란을 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을 때 십만명의 강한 군사가 성을 포위하여 협박하니 천지는 뒤집히고 지혜와 용기는 모두 없어졌다. 이때 공은 칠척의 한 몸을 일으켜 시퍼런 칼을 면전에 두고 그들과 교섭하였지만 그 기상은 더욱 편안하였으며 모두들 머리카락이 서고 이를 부딛히는 데도 공은 담소를 나누듯 이야기 하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가두었을 때 흉악한 무리가 칼끝을 모아 온세상을 협박하며 영화를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라고 하여 사생이 한 순간에 매어 있었지만 공은 가혹한 형벌도 달게 여기어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이러한 공의 확고부동한 마음은 죽음도 이겨낸 것이니 눈앞의 죽음도 이미 잊었는데 산성을 에워싼 십만의 군사가 어찌 소용이 있겠는가? 이로써 공의 평생을 대강이나마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재주는 높고 기상은 호탕하여 감정에 따라 가식없이 행동하는 등 세속을 따라 적당히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미워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공의 평생은 충효로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다만 지난날의 망년된 말로 벌떼처럼 일어나 공을 헐뜯었지만 끝내 공을 곤액하게 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분명히 잘못될 일인 줄 알면서도 구구한 변명이나 늘어놓고, 옛사람에 대하여도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들은 태산같은 공에 비하면 한 손가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그 영욕과 득실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공은 성품이 솔직하고 꺼려하는 바가 없어 구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노유귀천을 막론하고 마음을 열어 정의를 다하였으며 항상 성실하고 참되었다. 이전에 공을 공격하던 사람이라도 나중에 호의를 가지고 찾아오면 처음과 같이 대접하여 마음속에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바른 일을 따르고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데에는 용맹하게 나아가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유독 권세가나 이권에 대하여는 마치 겁먹은 사람처럼 물러나곤 하였다. 공은 시문에도 뛰어났지만 문장으로 명성을 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당대에 명망이 높은 분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재상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 자는 輝世),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자는 叔度) 숙도 등 몇몇 분과 가장 친하였는데 청음(淸陰)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절의를 지킨 분이다.
나는 일찍이 공의 부친을 모신 적이 있고 또 공과 함께 백사(白沙)공을 모시기도 하였으며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었다. 동생인 판서공이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며 공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 어떻게 감히 아는 바를 버려둔 채 글을 꾸밀 수 있겠는가! 아래와 같이 명(銘)을 짓는다.
하늘이 내신 재주는 상제께서 만든 바며,
크고도 문채 나니, 주상께서 옥처럼 아끼셨네.
넓은 길 열어놓아 앞으로 가게하고,
왕실을 보호하니, 크도다 공이시여.
지난번 어리석은 임금때는 인륜이 끊어져,
재앙으로 협박하고 작록(爵祿)으로 꾀었지만,
공은 태연하여 혹형을 모르는 듯,
한마음으로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했네.
어리석은 군주가 제거되니 천지가 새로워지고,
문무를 겸전하니 왕의 총애 받으셨네.
이르시길 네가 재주 있으니 어려운 일 맡기노라.
공의 처리 순리따라 막힘이 없어라.
아첨하기 싫어하여 여러 사람 질시받고,
미움은 함께하지 않았지만, 슬픔은 나누었네.
힘들고 어려운 일 가리지 않았고, 피난하는 주상 따라 있는 힘 다했네.
호부의 장관에 오르니 호조의 직무라,
난리 수습 명을 받아 몸과 마음 다 바쳤네.
강화의 뒷수습에 일은 더욱 늘어나고,
쌓인 걱정으로 애태우니, 병은 날로 깊어갔네.
예순하고 네해 만에 음택으로 돌아가니,
관악산의 북쪽에 굽이도는 한강이 보이는 곳,
우뚝한 공의 묘지 푸른 돌 세우나니,
천백년 지나도록 상서공의 집이로세.
숭정(崇禎) 기원후 41년 무오 3월 일 세움
아아! 아버지의 충성과 효행은 모두 비문에 실려있지만, 조정에서 효행을 표창하여 정려를 내린 사실은 비문을 지은 김(金)공이 돌아간 후에 있었기에 이 한 줄을 삼가 추가하여 기록한다.
목사를 지낸 큰형님은 6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집성(集成), 민성(敏成), 구성(九成), 관성(觀成), 노성(老成), 현성(玄成)이고 딸은 조상우(趙相愚), 조태동(趙泰東)에게 시집갔다. 작은 형님은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익성(翼成)과 덕성(德成)이며, 딸은 임봉지(林鳳至), 민사노(閔師魯), 한세보(韓世輔)에게 시집갔다. 나는 이남칠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만성(晩成)과 대성(大成)이며 딸은 송광연(宋光淵), 김창국(金昌國), 홍치상(洪致祥), 윤지인(尹趾仁), 조하언(曺夏彦), 심정보(沈廷輔)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아직 어리다. 강홍익(姜弘益)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璡), 인(璘), ▨, 민(珉), ▨이며 딸은 권수만(權秀萬)에게 시집갔다. 윤세장(尹世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다. 불초 정영(正英)은 삼가 쓴다.
李景稷神道碑銘
贈右議政行戶曹判書諡孝敏李公神道碑銘(篆額)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行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孝敏李公神道碑銘并序
奮忠賛謨立紀明倫靖社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昇平府院君金瑬撰
男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刑曺判書正英謹書并篆
崇禎紀元之十三年庚辰七月 江華留守李公卒于官 道臣以訃聞 上震悼輟視朝 命所司賜賻 遣禮官賜祭 吏部議贈 贈至議政府右議政 太常議謚 謚忠敏 禮之成也 於是公之季原任大冡宰白軒公景奭 以其狀來請文麗牲之石于瑬 瑬仍仰而思曰 瑬之獲私於伯子公 厪五十年所 所閱歷禍福升沉 又略與之同也 則不可謂不知公者也 余所爲公銘也者 則焉用文爲所不爲公銘也者則焉忍公負 試據狀而叙之曰 公諱景稷 字尙古 石門其號也 系自出璿源 恭靖大王八代而公也 有諱貴丁莞城君 諱繼壽咸豐都正 寔公高曾祖考也 祖諱秀光 贈吏曹叅判 考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諱惟侃 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 妣開城府高氏 贈貞敬夫人 靖國功臣開城君守謙之曾孫 大護軍漢良之女 用公貴 贈及其上二世 公生而穎異 異凡兒 才齔 稍稍見頭角矣 白沙李相恒福素負鑒裁一世人物 見而異之 仍授之學 且愛甚比諸子行 又爲象村申 相欽所賞二公交口譽 其在童丱 已有名 中又從金沙溪長生學 一日偕諸學子 將詣禮部講有請師書禮部官先容者 公遂裂其書曰 私而講可乎 沙溪公聞而奇之 甫成童 値壬辰島寇之亂 間關徑竇 雖顚沛數窘急 取於人不少苟 時事初定 隨親入京城 京城新去難 天兵滿城 公日傭書軍簿 供甘毳無闕 益自力於文 尤長於詞賦 風信秀發 才思捷敏 聲名籍甚學宮 辛丑中司馬兩試 乙巳 連中大比增廣別試 三觧俱高等 華聞彌大 是年冬 宣祖大王賜黃柑于泮宮 仍試士 公又多士 特賜直赴殿試 分肄承文院權知副正字 己酉 薦授承政院注書 兼侍講院說書 叅下 兼春坊 甚選也 俄被史局薦 由檢閱至待敎 兼說書則仍故矣 庚戌春 錄入玉堂爲正字 尤選也 人皆拭目而改觀 前公在史館 引士流之標望者數人 同僚有忌之者塞之無他端 構公擅易薦次 遂論罷 辛亥 別叙 例授奉敎 陞典籍 遷佐郎戶曹 轉弘文館修撰 時地者李懿信鼓遷都之說 瑩惑光海 朝野咸憤而莫敢言 因白虹貫日之變 公與僚員上箚論時政 仍力攻之 公筆也 物議多之 尋以御史搜銀灣上 遷佐郎兵曹 兼知制敎 自是雖它遷 常帶三字御矣 癸丑 陞正郎 判書朴承宗張甚 奴視諸郎寮 顧獨禮遇公 有難事 輙屬公裁處 是歲 賊臣李爾瞻包藏禍心 嗾死囚朴應犀上變 盖其兇計假永昌大君 先去受先王遺七臣者 仍及東朝也 諸公一時逮繫 禍將不測 徐忠肅渻與先朝國舅金悌男爲姻家 故事益急 徐渻賛成公執友也 泣而曰 吾不忍徐死而吾獨生 公迫於賛成公命 始一徃爾瞻許請解 有族分也 爾瞻一家人素與爾 瞻不相能者見而大 公卽出爲輸城察訪 呶呶者籍以爲口實 久而弗已 後忠肅之子大司憲景雨謂吾友救吾親獲謗 吾獨何心默然而已乎 上書直之 事乃白 甲寅春 以省覲久不還坐罷 叙復爲黃海都事 還復入兵曹 爲正郎者二 爲唐差接伴官 爲賑恤從事官 爲平安道敬差官 數年之間 亡一日安於朝 丁巳夏 楸灘吳相允謙爲日本回答上价 號公從事與之偕 吳公卽心許公如弟兄然 留日館穀甚豐 一行頗用餘市利 公呵止曰 縱不能飢 飲食於此 又安忍圖嬴利乎 遂聚餘米 積峙于庭 倭皆驚歎 書契中語 稍涉不遜 盡使改之 終不敢援舊强爭 且爭來索公筆蹟 屨滿乎館下 將還 用白金贐行 不啻累千 襍他玩奇瓌 錯落眩耀 並麾不受 歸槖蕭然矣 戊午春 凶論益甚 率百僚日日造庭 請廢母后 氣熖干天 光鋩閃鑠 公上有父母而奮不顧身 終不一叅 兩司合請遠竄 時被叅者十數人 論公與不佞 辭益兇慘 觀者危之 謂將有餘地 光海寢不下 事得緩 後以使日本勞格當加資方在白簡 故告身不及 里居殆五年 朝議以天將毛文龍駐箚椵島鐵山郡 而綰轂海口 策應多端 陞爲府起廢公 加通政階以遣 旣行 憲府論以詬辱大臣 遂削職 白衣從軍 大臣 柄相朴承宗也 公常憤時事積不平 乘醉而發語觸承宗 承宗聞之 實怒公 忌公議申 請光海仍遣行 諫院繼論 竟收其加資 鐵人若武人虐 使及得公如嬰乳於玆母 時遼民之失所而東者 繡處村落 日肆侵奪 公至 皆歛縮弗敢縱 毛將亦出令如遇漢人之擾害者 任公輕重治 民有縛致作挐者 公卽跣而下手釋其縛曰 若生疇非萬曆再生乎 雖老爺令 若敢爾 以此漢人愈益敬慕悅 毛將亦心服 癸亥春 今上初撥亂涖 斬府尹鄭遵于義州 卽進公通政而代之 義隣於銕 聞政聲有素 相聚而賀曰 吾屬首被聖主新化矣 其治法征謀 益加於鐵 而苦居衆先 甘在衆後 人人感奮 咸樂爲之用 屬疫癘大熾 盧病者城外 三其區而異處 日躬臨城上粥食之 未期而治化大行 顧悶親老弗自克心 忽忽病且甚 重臣請遆再三益懇 上難其代不許 竟問于元帥 知實病狀 始遆之 還拜刑曹叅議 甲子正月 适叛書至 是夜卽除全羅道節度使 馳到礪山促收兵 兼程而進 及到公州聞凶鋒已近海西 悉屬步卒中軍 抽輕騎百餘 銃卒五百 入衛京師 上召見慰諭 仍請屯兵江外 還到漢江 江村虛無人 公發遣將校獲數船以候 車駕出次江上 夜黑不辨色 公令撤村籬燃之 手劒麾爭渡者 奉上登舩 從者僅數三人 是時變起倉卒 公提不敎之卒 奔遑道路 未暇整治 日夕上駐駕水原之路左 見後隊亂次行 以不能軍譴遆 庙議將請釜山貢倭之留館者以討賊 以公嘗使日本 諳委事情 請遣之 公卽拜辭 條難處事五六上之 命姑停 到公州 賊敗報至 除水原府使 才數日 迎扈回鑾 供頓亡缺 三月 陞嘉善以其扈從勞也 秋 因體府令入城 語及擧義中一武人不法事 見忤權貴 臺官劾之以擅離直所 上不從 只推考 其臺官復提起悖言欲重之 上不直臺官而遆其職 法府勘當謫戍邊遠 又命贖之 不敢自安 移疾罷歸 是年冬 上號大妃有赦 叙爲同知中樞兼特進 秋爲開城留守 丙寅夏 翰林姜曰廣 給事中王夢尹來頒詔 以公雅華語廼召 還拜副捴管掌隷院判決事 遷兵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都體察賛畫使 自此常兼備局有司之任 丁卯之亂 公扈行江都 金人來請平 命公接待 兵判李公廷龜・新豐君張公維實與之周旋 金人必欲上躬蒞盟 引諸臣問躬蒞與不躬是否 左右多依違弗敢對 公進曰 告諸天以爲生靈許和 使大臣代之盟恐是 竟如公議 而大忤時論 旣平 兩司合啓請罪 答以有可賞之勞 無可罪之事 終不允 而特以持之久 只遆叅判 公陳䟽自劾 又寵答之 還都後復上章 力辭兼帶不許 再入戶曹爲 叅判 己巳春 爲都體察副使 辟以知兵機也 毛文龍擁兵椵島 機事甚秘 朝廷請遣重臣詗之 公御命入島 供帳甚設 置酒樂宴于內堂 坐之東壁 而禮貌之盡情素 示無間然 請糶救飢民 卽捐倉實數百斛俾賑之 且知公有老親 禮贈有加 還言毛必不良死 人不以爲然 及死始服其先見 由戶曹遆拜禮曹叅判 又辭遆 庚午 復爲戶曹叅判 拜京畿觀察使 先是 以體察副使 視師喬桐 還上請喬 邑海島 厥壤小 厥田下 厥賦弗貞 宜所蠲減 遂報可 及是役 郡邑夷以分數 喬民感頌 瓜遆付西樞 丁內憂 毀不欲生者屢矣 翌年癸酉 金差龍骨大來 上敎曰 接待不得人數生事 暫起復李其如何 備局對以非金革不可 遂寢 甲戍秋服關 拜都承旨 丁外艱 執制又如前喪矣 丙子 公除付護軍 復兼備局堂上 十二月 敵報日急 淸人聲言講和 率先鋒星夜馳 猝迫西郊之沙峴 車駕發向江都 未及出城 御崇禮門 遣吏曹判書崔公鳴吉及公往諭之 遂撞遇于慕華館 時知意不在和 追詣南漢 才入城 城已被圍矣 每遣大臣 出接淸人 必使公偕 公將發言 淸人輒怒曰 李侍郎勿言 盖先前屢受命接應 率常詘其辭 抑遏其所欲 渠軰之素所憚也 卽圍中又拜都承旨 丁丑春 扈駕還都 用庙堂薦 超拜戶曹判書 新當板蕩 庶事草創 所市御膳第稍食正斗斛 皆公禀旨裁定也 時相有不悅者 因事啓罷 公實毫亡所失 秋 特叙爲都承旨冬十月 晨起將造朝 忽遘風疾 經歲沉綿 翌年冬 除江陵府使 臺議重公外請遆 仍授知中樞 兼都捴管 庚辰春 又以備局薦 留守江島 䟽陳病不堪狀 不得請 如設壇而祭死亂 造籍而數餘民 收兵械補卒伍 凡所經營布置 咸有可稱道積勞瘁病疽▨▨求至屬纊 亡一言及家 諄諄如夢中語 皆南北憂也 立朝三十餘年 家無遺貲 送終衣襚表以外 皆用紬素 自公卒之年 距其生丁丑 得年六十四 是年九月葬于果川冠岳山之北麓子▨▨坐之原 從先垂也 公初娶寶城吳氏 贈貞敬夫人男三人女二人 長長英 蔭仕通津縣監 次起英 學諸生 季正英 擢文科 由翰林轉成均典籍 女長適別坐李時中夭 次適士人姜弘益 繼娶固城李氏女一人適士人尹世昌 長英生四男一女 起英生一男一女 正英生一男一女 姜弘益生四男一女 內外諸孫皆幼 公孝友天至 年及勝室 父母欲授室 以時艱不得專於○事固辭 亂定而始娶 仍依親側如童稚時 平生不蓄私貲 御臧獲治居第 一切家秉亡細大 皆身任之 如執箒應門 亦時自爲之 至白首宰列而亡倦 家雖窘 親供養備 日置酒邀親所善樂飮 每遇佳辰初度 盛賔客聲伎 捧觴稱壽 依依膝前孺子戯 竟親世 親有癠弗解帶 弗就寢 疾革 必嘗糞洗厠 牏浣衣帬必以躬 大夫人病屬危 刺指取血 調藥以進 年踰六十 而喪前後六年 血泣哀毀如一日 衰絰未嘗斯須去身 慟仲氏蚤世 墓木拱矣 語及必涕涔下 爲嫁其四女不失時 嘗授冡宰公學 誦所讀弗甚習 手下楚一再 已卽前抱而泣 且歷擧前人懿行之可則者 日加之警誨 冡宰公文華雅望之盛 亦未必不由公發也 又好族施黨 有緩急請 捐槖而周之以至閭左右 亦有賴焉 公其篤行君子者非耶 秉筆史閣則曰良史 侍講經幄則曰眞學士 爲 郎署 爲列卿 于銕于義于江都 卑鉅外內 莫不能稱 奉使日域 蠻俗敬服 御命海島 天將禮下 接遇羯羠 不敢生獰 公其貞幹藎臣者非耶 然謂之盡公之終始則未也日南 漢之急 十萬銕騎 環城而逼 天地飜覆 智勇俱盡 公廼挺七尺之身 頡頏於白刃之前而 氣益舒 人所髮灑齒擊而談之者 而曰猶未也 當光海幽母后之日 群凶注刃 驅脅一世 謂從榮貳戮 死生呼吸 視鼎鑊如飴 確乎不拔 盖其所定有以勝死也 目前已亡死 何有山城十萬騎哉 此庶幾盡公之終始也 然公才高氣豪 任情直行 不肯隨世頫仰 故不悅者滋多 揜一生忠孝大節 徒襲曩時簧鼓之說 群起而齮齕之 終不能阨公 而其徵來世而有辭 求古人而亡媿者 則有若一指於泰山 失得榮辱果何如哉 公爲人虛懷坦夷不設畛閾 亡少長貴賤 披心盡情 一以誠信 前所攻公者 後以好意來 則待之如初 弗置纖介於胷中 趍義急人 勇往不顧 獨於名門利路 歛退如怯夫然怵公於詩文才格 有過人者 亦不屑得名於翰墨也 所與遊皆一代名勝 而最與之深者 如鶴谷洪相公輝世・淸陰金判書叔度三數公 而淸陰期以伏節死義 不侫卽從事公父 又同事白沙公 已又與之同急難 冡宰公之屬之以銘 謂知公也深 又安敢舍所知而文辭乎 銘曰 疇降之才 帝所篤疇賁而文 王用玉 發軔亨衢 進塗闢 王室攸毗 猗公族奧在明夷 人紀熄 怵我以禍 餌以祿 公弗愓疚 亡鼎鑊 忠無二致 維孝則 南狩得志 天地革 允矣文武 宸眷屬 曰維爾材 畁盤錯 奏刀砉然 物無格 忌以譽仇 睢衆目 弗與之惎 與之戚 險夷燥濕 靡所擇 執靮從難 走且踣 陟長民部 司徒職 受命板蕩 單志力 掇拾留都 務益劇 積憂焦心病曰惡 周甲有四 就窀穸 冠岳之陰 漢之曲 巍峨佳城 屹翠石 於千百世 尙書宅
崇禎紀元後四十一年 戊午 三月 日立
鳴呼 先君子 忠孝之行 具載於碑文中 獨朝家 以孝旌閭之典 始擧於金公旣 沒之後 故此一節 玆謹追記云爾 伯兄牧使 六男二女 男 集成 敏成 九成 ▨成 老成 玄成 女 趙相愚 趙泰東 仲兄 二男三女 男 翼成 德成 女林鳳至 閔師魯 韓世▨ 有二男七女 男 晚成 大成 女 宋光淵 金昌國 洪致祥 尹趾仁 曺夏彥 沈廷輔 一女幼 姜弘益 五男一女 男 璡 璘 珉 琂 女 權秀萬 尹世章 一男 㴠
不肖男 正英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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