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날, ‘쿠무다 카페’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가을비 내리는 송정 바닷가 카페에서 클레식 기타 연주를 듣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감동이다. 흥분된 마음에 저녁 빗길을 마다하지 않고 집을 나선다.
작은 공간 ‘쿠무다 카페’안은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처음 본 안형수 기타 연주자는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라 믿기지 않는다. 그의 표정은 깊은 절간에서 마음을 닦다가 내려온 수도자의 얼굴처럼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게 보인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첫 연주부터 감동이 밀려오게 한다. 기타에서 울려 나오는 선율은 사람의 손끝에서 튕겨 나온다는 느낌이 아니다. 좁은 카페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직접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풀어내는 곡들은 오래전 즐겨 불렀던 가요나 가곡, 동요들이지만 처음 듣는 듯 감미로운 음색은 풍부한 감수성이 묻어났다. 그만의 독창적인 편곡으로 ‘섬집 아기.’ ‘오빠 생각.’ ‘등대지기.’ 등 동요들을 차례차례 듣노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달콤하고 포근함이 밀려왔다. 그가 연주하는 선곡들이 가을비와 어울려 묘한 울림으로 촉촉하게 젖어든다.
기타를 껴안고 ‘등대지기’를 연주할 때면 안형수 역시 등대지기만큼 고독하다. 별처럼 맑고 쓸쓸한 기타 연주가 신선하고 신비롭다. 연주는 빗방울 소리처럼 영롱하게 들린다. 기타 한 대로 익숙한 가락을 이리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나 싶다. ‘쿠무다 카페’ 안 구석구석까지 채워진 멜로디가 귀를 타고 가슴으로 흘러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감미롭고 서정적인 연주에 모두가 푹 빠져 녹아든다.
자신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려는 듯한 안형수는 기타에 미친 사람으로 보인다. 미친다는 말은 집념과 열중의 다른 말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앞설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신나게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예술은 미쳐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의 표현이다. 자신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이란 것쯤은 알 수 있다. 아마도 기타를 안고 연주하는 안형수도 기타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소년이 신기에 가깝게 연주 실력자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힘든 고통을 견뎌냈을까 싶다.
하루라도 손에서 붓을 내려놓지 않았던 남편이 그랬고, 요즘 한국 문학의 맨 앞자리에 서 있는 한 수필가 선생님도 여전히 밤낮으로 집필에만 빠져 사신다. 역시 미치지 않고서는 무엇이든 이루어 내지 못한다는 걸 실감한다. ‘예술가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던가. 고통을 인내하면서까지, 조건이라면 선천적인 재능과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노력만이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여전히 창밖에서 비가 내린다. 안형수 기타 연주 선곡들도 나만을 위한 연주처럼 빗물 먹은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준다. 동요 멜로디에 어린 시절 추억들이 들썩인다. ‘섬 집 아기’는 정전이 되듯 깜깜하게 잊었던 섬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려준다. 그 시절 섬 아이들은 엄마가 일일이 챙겨주지 못했다. 바다에 물이 빠질 때면 엄마는 굴을 따고 조개나 고동을 캐기 위해 갯벌에서 살다시피 했다. 초등학교에서 이 노래를 배운 뒤에는 갯가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친구들과 즐겨 불렀다. 섬에서 자란 사람들이면 이 노래를 들으면 누구라고 친구들과 보낸 그 시절을 추억할 것이다. 잔잔한 클래식 기타연주가 ‘쿠무다 카페’ 통유리를 후드득 치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오빠 생각’연주가 잔잔하게 흐른다. 방학 때가 되면 오빠를 기다렸다. 부산 여객선이 오는 시간이면 뱃머리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깔끔한 교복에 교모를 쓴 오빠는 잘생기고 멋졌다. 모처럼 집으로 온 오빠는 낯선 손님처럼 느껴졌다. 오빠 역시도 어린 동생들을 살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오빠였지만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늘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오빠가 보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나이 든 오빠는 내색하지 못했던 성격 탓을 후회하는 듯, 소소한 일까지 챙겨주며 자상하고 든든한 의자가 되어준다.
‘꽃밭에서’를 연주할 때는 꽃 같은 멜로디에 취해 입속에서 어물거리던 노래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뻔 했다. 안형수는 마지막 기타 줄로 음률을 퉁겨낸다. 줄의 미묘한 떨림은 하얀 여백에 아주 작은 먹물 방울이 떨어져 화선지에 번져가는 듯 나도 모르게 숨이 멈추어진다. 작은 소리가 큰 충격으로 여운을 남긴다. 특히 악기에는 더욱 그렇다. 안형수만의 열망과 독창적이고 섬세하고도 분명한 자기만의 독특한 연주 언어로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감미롭고 아름답게 가슴을 울려주는 기타 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 이렇게 멋진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싶다. 송정 바닷가 ‘쿠무다 카페’에서 마음에 맞는 아들과의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누구에게라도 절절한 사연을 담아 카톡이라도 띄우고픈 ‘쿠무다 카페’ 비 오는 가을밤이다. 빗줄기가 그치고 연주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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