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항일 애국지사의 집 장산 ‘모정원’ 강귀철 선생 -2
청산리대첩 승리 이끈 애국지사 아버지의 여정
1920년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토벌 작전을 펼쳤다.
이에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좀 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위협이 적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어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르쿠츠쿠 공산주의 계열과 상하이 공산주의 계열 사이의 내분)과 러시아의 간계로 러시아 적군에 의해 조선독립군이 무장 해제당하였다. 그 후 독립군 간의 군권 장악 파쟁으로 일어난 사변에서 지청천 장군을 비롯한 강근호(강화린) 등 70여 명이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혹독한 수형생활을 하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로 전향하면 면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독립군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석방된 후 ‘우르 광 금광’에서 일하면서 고려혁명군 사관학교(교장 지청천)에서 교관을 맡았다. 하지만 금광이 실패로 끝나자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캐나다 선교사가 운영하는 영신중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하였다.
한때 사회주의 단체 ‘화요회’에 가입 핵심적인 자리인 선전부장, 단장 등을 맡았고, 북만주 조선인 청년 총동맹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사건으로 피신하면서 1931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화요회 출신 간부가 주동이 되어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사건이 결정적 동기가 되어 사회주의자와의 단호히 결별을 하였다. 그 사건 이후 평생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강근호 애국지사는 소련에서 2년 동안 걸어서 한국으로 왔다. 귀국 후 이범석 장군이 2년이나 후배였지만 찾질 않고 육사 8기로 입교하여 소위부터 시작하여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영도에서 63세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청산리 백운평 전투가 벌어지기 전야 만주벌 강추위와 허기 속에서 대규모 일군 병력을 기다리며 일체의 각오를 다지는 가운데 김좌진 사령관의 비서 이정(李楨) 선생이 쓴 진중시(陣中詩)를 소개한다.
陳中詩 (청산리전투 전야)
木落山容靜 목락산용정
天高月影肥 천고월영비
壯士意萬馬 장사의만마
得旦野萬長 득단야만장
나뭇잎 떨어져서 산 모습 조용한데
하늘 높고 달빛 더욱 밝구나
장사들 마음속은 말무리가 달리는데
날새기만을 기다리자니 밤이 이리도 길구나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