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 (Gary Cooper,1901~1961)
'게리 쿠퍼'는 1901년 美國 몬타나 주 헬레나에서 유복한 영국계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에 가족이 L.A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옛 고향 친구들을 만나 그들이 " '헐리우드'에서
서부영화의 엑스트라 (달리는 말에서 총 맞고 떨어지는 역할)를 하고
있다" 는 말을 듣고 구미가 당겨 그들과 같이 엑스트라를 한 것이 계기가 돼
헐리우드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고향인 '몬나타'의 초원에서 어린 시절부터 말타기를 좋아해서 승마를
즐겨했기에 말을 다루는 솜씨가 몸에 베어 있어,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스타가 된 계기는 엑스트라 생활을 몇달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
말고도 그의 용모가 감독의 눈에 띄었던지, 몇몇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됐고, 그러다가 1926년 당대의 명배우 'Ronald Coleman'이 주연한
"The Winning of Barbara Worth' 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단연 주위의
호평을 받아,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29년에는 'The Virginian'에서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올랐죠.
이듬해 1930년 '마리네 디트리히'와 공연한 '모로코'(Morocco)이후 단연
인기스타가 되면서 순풍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는 헐리우드의 다른 인기스타들과는 달리 사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여 출연
영화에서 공연한 'Marlene Dietrich', 'Grace Kelly', 'Patricia Neal' 등의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1933년에 첫 결혼한 'Veronica Balfe'와 이혼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결혼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가 끝내 조강지처와 헤어지지 않았던 것은 두사람 사이에 난 딸 마리아에
대한 父情 때문이었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게리 쿠퍼'는 1941년 '요크상사(Sergeant York)'에 출연, 첫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수상했습니다
1943년에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잉글리드 버그만'과 열연을 했고,
1952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High Noon)'에 출연하여 두 번째
아카데미 주연 남우상을 받습니다. 이 때 그는 몸에 약간의 암(癌)증세가 나타나
건강상태가 나빠져 나이보다 더 늙어보입니다.
그런 것이 오히려 연기에는 도움이 됐는지 극한상항에 처한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해냈습니다. '하이 눈'은 백악관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후 그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惡의 花園(1953)' '베라 크루즈(1954)' 등에 출연
했는데, 'Vera Cruz' 에서는 '버트 랑카스타'와 공연하여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서부극' 이란 찬사를 받았죠.
1956년에는 '윌리암 와일러' 감독의 '우정있는 설복'에서 좋은 연기로 많은 감동을
선사 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는 델마 데이비스 감독의 '교수목'에 출연, 마리아
쉘과 공연 했으나, 차츰 암(癌) 증세가 악화되어 1960년 '데보라 커'와 공연한
'The Naked Edge'를 끝으로 영화 출연을 중단했습니다.
마침내 '게리 쿠퍼'는 1961년 5월 13일 60세를 일기로 L.A에서 폐암으로 타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