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윤리기반을 튼튼히 하고, 도덕적 질서를 절로 순화됨이 목적
한문수 성균관 석전교육원 교수
육례(六藝)를 살펴보자. ‘독서’는 단순 글읽기가 아니다. 천경신고(天經神誥,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익히고 인문, 역사, 과학, 기술을 망라하며, 산천을 보고 익히는 것 또한 독서이다.
“이 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國子師傳國子師有爲子獻策曰惟我神市實自桓雄開天納衆以佺設戒而化之)”라 하여 대종(大倧, 한인과 한웅과 왕검)의 가르침을 읽히는 등 독서의 범위가 광대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글자는 어떠했을까. <태백일사>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는 널리 쓰여졌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문자의 보급 또한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활쏘기(習射)’는 활을 당김도 그저 과녁을 맞추는 것이 아닌 정신수양의 하나로 궁도에 전해지는 몸가짐을 익히는 자리이다. ‘말 타기(馳馬)’ 또한 몸과 마음을 다지는 집단체육으로 힘과 기능, 속도, 비월(飛越)에 대한 순종성을 배운다.
▲ 말을 타고 화살을 쏘아 사냥하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예절’은 자신의 뿌리인 ‘하늘과 조상’에 경외(敬畏)하고,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규범을 포함한다. <단군세기>편에, "(조선의 2세) 부루 단군께서 임인 2년(서기전 2239)에 소련과 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루었으니(先是少連大連善居喪) 삼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을 느슨해 하지 않았고(三日不怠 三月不懈) 한해를 슬퍼 애통해 하고 삼년을 슬픔에 젖어 있었다(朞年悲哀 三年憂) 이때로부터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섯 달로 하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自是擧俗停喪五月 以久爲榮)"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받아 공자는 <예기(禮記)> 잡기 하편에 효의 상징으로 이들이 “동이의 아들이다(三日不怠 三月不懈 朞年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라 하고, 소학(小學) 제4편인 계고편(稽古篇)에도 같은 내용을 썼다. 예기의 근원이 이에서 나왔음을 증빙한다. 후일 조선 유학자들이 단군조선은 미개하여 문명이 없었다고 평가 절하한 사례는 제 스승마져 부정하는 모양세가 되지 않았는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참전계경(參佺戒經)의 총론에 “신성지역인 태백산 밑에 옛날에 사선각(四仙閣)이 있었는데, 이는 발귀리, 자부선인, 대련, 을보륵 네 선인이다, 모두 하늘에 제사지내고 수련하여... 도를 넓히고 백성을 이롭게 하고...”라 썼는데, 여기서 말하는 대련이 바로 효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선인이며, 일명 묘전랑(妙佺郞)이라고도 했다.
BC 2182년 가륵(嘉勒) 단군이 삼랑 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신왕종전지도(神王倧佺之道)에 대해 하문했다. 을보륵은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하고서 “종(倧)은 나라에서 선발한 스승이요 전(佺)은 백성이 천거한 스승이니, 모두 이레(7일)를 한 회로 하여 삼신께 나아가 맹세합니다. 세 고을[三忽]에서 뽑은 사람은 전(佺)이 되고 구한(九桓)에서 뽑은 사람은 종(倧)이 됩니다. 그 도를 말하자면 아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비다워야 하고, 임금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 신하, 제자가 된 사람 역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 합니다.”라 진언(進言)하였다.
"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가 제나라의 왕 경공에게 답한 내용으로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 나온다. 출처가 어디인가?. 바로 을보륵(三郞乙普勒)이 진언한 내용을 공자가 답습한 것이다. 이는 배달국 이전부터 가르침을 베푼 신시개천의 도(神市開天之道)라 을보륵이 설명했다.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따름”이라는 홍도익중(弘道益衆), 바로 홍익인간을 말함이다. 예(禮)의 근본이념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래와 음악은 단군세기에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之樂)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했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의식을 올리니 이 것이 참전의 계(參佺戒)가 되었다.”라 했다. 전시에는 군사의 사기를 돋우는 군가로써 오랜 세월 불리워 온 배달겨레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격투기와 검술은 장소가 제천단이 있는 성스러운 성역인 소도라는 것은 당시 무예를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유위자와 같이 지극히 높은 도에 이른 선인(仙人)들이 교육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천하 제후들이 찾아와 임금을 섬기겠다는 자가 수십 명이나 있었다. 그리하여 어아가를 지어 사람과 신을 기쁘게 했다. 어아(於阿)라는 것은 기뻐서 하는 말이다”라 썼다. 육례는 이처럼 목표와 목적을 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교육의 시행으로 오상지도(五常之道)와 치신득도(治身得道)하여 선인의 경지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고조선이 왜 교육에 심혈을 기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도지(符都誌)에서 그 답변을 찾아보자. 천지창조 후 오미(五味)의 변(變)이 생기고 마고(麻姑)가 천부(天府)를 거두어 자재율이 파괴되다 보니 생존을 위한 수단인 식습관으로 인하여 뱀과 같은 독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와 육신이 탁해지고 인간의 마음의 기운인 심기가 모질게 변하는 과정을 부도지에서는 심기혹변(心氣酷變)라 표현하였다.
부도지 12장에는 “천부를 조증하여 수신하고, 해혹복본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익혀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더라. 이것은 후일에 회강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더라.(照證天符修信 盟解惑復本之誓 定符都建設之約 此 地遠信絶 諸族之言語風俗 漸變相異故 俗講天符地理於會同協和之 而使明之也 是爲後日會講之緖 人事煩忙 不講則忘失故也.)”라 했다.
태초에 무극(無極)이 있으니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사상(四象) 팔괘(八卦), 육십사괘(六十四卦)로 나눠지면서 황극(黃極)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극에 이르면 다시 무극으로 환원을 한다고 보자. 인류의 큰 스승은 천년에 한명씩 나오게 된다고 보면 황궁씨, 유인씨, 한인씨 등이 천년을 이어오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당시는 힘으로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자율적으로 따르는 세상이어서 큰 스승의 법이 천년을 내려간다고 보면 될 것이다.
천웅의 도(天雄之道)의 일념, 홍익인간을 이루려는 노력이 바로 경당의 교육 이념일 것으로 본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인간을 진정 이롭게 하는 것은 그저 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 개개인이 본래 자기 모습, 즉 ‘참나’를 실현해서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후일 격암(格庵)은‘생초지락(生初之樂)’에서, ‘천지가 뒤집어져 원위치로 돌아가는 때를 지금 오늘이라고 할 것이다. (부도를 둘러싼) 보성은 밝은 빛을 빈 하늘에 쏠 것이요, 사람의 몸이 높이 솟구쳐 유리세계의 경계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왕래할 것이다. 번쩍이는 해가 지는 일이 없고 달이 이지러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天地反覆此今日寶城光輝空天射 人身通秀琉璃界 日光無落月無虧)”라고 두 번째로 오게 될 해혹복본의 시대를 예언했다.
천웅의 도를 이은 경당 교육 목적은 마고시대의 본성, 즉 신성(神性)을 찾아 나라의 윤리 기반을 튼튼히 하고, 도덕적 질서를 저절로 순화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제도는 고조선에서 부여를 거쳐 고구려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전해진 것으로 본다.
한편 경당의 육예명칭이 주례(周禮)에서 바뀐다. 독서는 서(書), 습사(習射)는 사(射), 치마(馳馬)는 어(御), 예절은 예(禮), 가악은 악(樂), 권박(拳搏)은 수(數)로 바뀌었다. 속칭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가 되었다. 여기에 육덕(六德: 知·仁·聖·義·忠·和)과 육행(六行: 孝·友·睦·婣·任·恤), 육경(六經)을 덧 붙였다. 후일 사대에 목맨 조선의 사대부들의 덕목으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