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 꺼져가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1. 잊혀져 가고 있는 중세기의 역사
중세기에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것은 그 당시에 큰 개혁과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사실이 거의 감추어지고 말았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로마 천주교회는 종교 개혁자들을 이단자라고 지명하였고 그들을 없애기 위하여 천여 년 이상 동안 성공적 이라고 증명된 계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깊은 자연의 요새 속에 숨어서 격리되어 있던 몇 몇의 충실한 그리스도인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로마 천주 교회의 핍박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은 국가의 강력한 군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은 수 백만의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역사 학자들은 순수한 성경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략 5천만명에서 1억명으로 추정된다. 교황권이 지배하던 중세기 시대에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성경을 따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일은 거의 모두가 교황권을 추종하는 세속적인 국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6 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판도가 달라졌다. 교황권의 부패와 만행에 질려버린 많은 군주들과 왕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선언을 받아 들였고, 더 이상 교황권의 모든 명령에 복종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절대권을 수행 할 유럽 국가의 군대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들은 자연히 로마 천주교회를 놀라게 하였다. 교황권은 이런 상황들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을 휩쓸고 있었던 종교 개혁의 빠른 확산에 대항하기 위하여 새로운 계책이 고안되어야 하였다.
이 새로운 계책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세기의 사건들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그 때에는 사방에 종교적인 투쟁이 있었다. 새로운 교황, 얼반 6세가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7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교황의 위치를 회복하여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추기경들 중 많은 이들이 얼반의 완고한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뇽으로 되돌아 가서 제네바의 주교인 켄바레이의 로버트를 교황 크레멘트 7세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그 당시에 두 교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때가 1378년 이었다. 그 후 31년 동안 로마와 아비뇽에서 서로 자기들의 교황이 절대무오이며, 베드로의 계승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선언 하였다. 영국 루터월트 교구의 목사이며 유력한 성직자인 존 위클립은 그들 서로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사단은 더 이상 한 교황 안에서 군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두 명의 교황 안에서 역사하므로 사람들이 더 쉽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적 그리스도는 나누어 졌고, 한 교황이 다른 교황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Emma H. Adams, John Wycliffe, Pacific Publishing Association, Oakland, 1890)
교황권의 과세에 반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위클립은 위험에 처할 뻔 하였지만 그의 친구들과 영국 왕가와의 특별한 친분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40여년 후, 보헤미야의 위대한 개혁자인 존 허스와 프라하의 제롬은 교황권에 대항하다가 결국 화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위클립에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교황권이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입증은 종교 개혁의 변함없는 주제가 되었다. 마틴 루터는 교황 개인에 한한 것이 아니라 교황권 전체가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다. 쯔윙글리, 칼빈, 낙스, 그리고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마틴 루터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몇 몇의 종교 개혁자들의 언급이다. 그들의 의견들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