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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년도 :2023년
제42회 수상자 : 이은희
수상 작품집 : 『불경스러운 언어』
대표 작품 : 「묘사, 그 치열함의 세계로」
묘사, 그 치열함의 세계로
-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
대상을 향하여 상체를 한껏 구부리고 살찐 엉덩이를 삐죽 내민 형상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오른손으로 치켜 올려 대상을 톺아보는 중 노인.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엉덩이를 내밀고 그림을 바라보는 모습은 차마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다. 그의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화폭으로 들어갈 태세이다. 어디선가 요원이 나타나 노인의 행동을 저지하며 실선 밖으로 나가란다. 이름난 전시장에서 내로라하는 작품을 감상하는데 격을 갖춰야 하는가. 그들의 수다스러운 행위의 장은 바로 ‘힘의 응집 리얼리즘 구자승展’ 정물화 앞에서다.
노인은 그림에 이끌려 들어갔으리라. 몸이 먼저 그림에 반응한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멋진 경치나 대상을 보면 감탄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정녕코 구자승 화백의 그림을 마주하면 물상이 실제인가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유리 화병에 꽂힌 알록달록한 꽃의 향기를 맡고자 코를 박고 싶어질 정도이다. 아니면 진짜 꽃인지 아닌지 확인하느라 그림 속 꽃을 손가락으로 만지고야 말리라.
지난달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한국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 구자승 화백의 회고전이 열렸다. 유학 초기 시절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린 150여 점의 작품이 걸려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구 화백은 ‘숨을 쉬는 그림, 그 대상들이 주는 미세한 호흡 찾으려 늘 탐구한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치열한 ‘사실주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던 화백이다. 정물화와 인물화, 누드화와 데생까지 오감을 충족할 전시를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나랴. 그림에 문외한인 시골 무지렁이도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간 것이다.
진정 전시를 관람하지 못한 사람은 아쉬워해야 한다. 그의 그림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떤 느낌을 말하는지 감흥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리라. 정물이 눈앞에 있는 듯 착시가 일어나는 세밀한 터치이다. 그림을 바라보며 순간 묘사가 그림에만 있는 것이 아닌 걸 깨우친다. 문학, 글 속에도 정교한 묘사가 살아있다. 그리고 사실주의 문인은 오래전부터 존재한다. ‘글쓰기 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로 당대의 생생한 이야기를 남긴 효전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의 고백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초상화를 좋아해 화공만 만나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졸라댔다. 몇 명의 화가를 거쳐 수십 본(本)을 바꾸어 그렸으나 하나도 닮은 것이 없어서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다면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글이라면 굳이 남의 손을 빌릴 필요 없이 차라리 내가 직접 써서 후세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편이 낫다. - 심노숭, 『자저실기』
후인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 문인 심노숭의 『자저실기(⾃著實紀)』에서 옛사람의 일상과 풍속을 확인할 수 있다. “심노숭은 자신이 지나온 삶의 자취가 춘몽처럼 스러질까 봐 76년의 인생역정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라고 말한다. 일상의 신변잡사가 그 시대의 문화를 짐작하게 한다. 어디선가 들은 소문이나 일화 또한 우습게 볼일이 아니다. 사실적 묘사와 풍부한 감성의 기록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선인의 삶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치열하게 그려낸 심노숭의 글 덕분에 고전과 현대 문학을 아우른다. 그가 ‘글쓰기 병’에 걸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 시대 문인의 삶과 문화의 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랴.
심노숭은 역시 남다른 사람이다. 양반사대부라면 가문이나 행적, 자기 모습도 미화하여 그려내리라. 누구라도 자신의 껄끄러운 부분은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죽기 전에 스스로 옷을 벗어 나상이 된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남들이 숨기는 단점까지도 적나라하게 밝힌다. 그의 고백과 폭로의 글은 요즘처럼 사진을 찍어 보기 좋게 포장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임이 틀림없다. 바로 사실주의 작가의 전범이 아닐까 싶다. 효전이 그린 자기 모습과 성격과 기질 등을 살펴 본다.
“몸은 깡마르고 허약하며, 키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작다.”라고 “어려서는 옷을 가누지 못할 만큼 허약해서 혼담을 하러 온 사람이 내 모습을 보고 혼사를 물렸다. 요절할 관상이라는이유에서였다.”라고 적는다. 성격은 급하고 결벽증이 있지만, 모질지 못해 남을 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근엄한 얼굴, 꾸며대는 언사, 남을 속이는 술책, 과장하는 말투’ 따위를 보면 혐오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심한 말이 튀어나온단다. ‘윗사람에게 대들기 좋아하고 아랫사람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라고, ‘쉰 살 이후에도 여전히 한 번에 6, 70개를 먹었고’, ‘정욕은 남보다 지나친 면이 있어’ 젊을 때는 하마터면 ‘패가망신할 지경이었다.’라고 토로한다.
선비가 자신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고백하기는 쉽지 않다. 글 속에서 자신의 단점을 가감 없이 그려낸 진정한 사실주의 작가이다. 효전이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은 어떤 장치일지도 모른다고 후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글 속에서 스스로 나상이 되어 서 있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글로 표현한다. 스스로 문제가 많은 인간임을 솔직하게 그렸기에 독자는 거부감보다 호기심이 더 커진다. 치열한 작가 정신이 빚어낸 결과이다.
수필가인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다. 글쓰기 초반에 수필을 어떻게 그려내야 할지,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까 고민하였다. 공모전 수상 작품 대부분이 주제가 되는 주된 소재를 이야기 형식으로 끌고 나간다. 이럴 때 핵심이 되는 장면이나 캐릭터를 사실적 묘사로 표현하면 글의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실제 대상을 바라보는 듯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재미나 흥취가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속 묘사는 저절로 그려지진 않는다. 대상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경이 되는 것과 조화로워야 한다. 또한, 대상과의 소통과 작가의 사유 등을 고려해야 한다. 문인 심노숭은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려는 묘사의 진실성에서 글이 초상화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고, ‘문학이든 삶이든 허위와 허세를 극도로 배격하며’ 진정성을 강조하였다. 자기 모습과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정겹다. 구 화백 또한 화폭에 정물을 옮기며 대상이 숨쉬기를 원했고, 그가 바란 대로 관객은 그림과 하나가 되고자 화폭으로 뛰어들었다. 두 분은 스스로 자문하며 사실주의란 길을 냈고, 그 길로 오롯이 걸어간 예술가이다. 미술과 문학, 분야는 다르지만 치열한 작가 정신을 무장한 묘사의 대가들이다.
다시 그림 앞이다. 초원이 펼쳐진 거실 창 앞에 서 있는 듯 착각이 일어나는 정물화이다. 저절로 심신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화백은 화폭에다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켜 놓은 듯하다. 그림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투영한 것 같지만, 보는 이마다 각자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화백의 말대로 한 폭의 정물화는 “무수한 꿈의 파편들이 부서져 그 잔해의 흔적을 극복하고, 온전한 오브제”로 글 속에서 꿈틀거린다.
수상 소감╻이은희
불경스러운 언어가
인정받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고전과 현대의 맞물린 글쓰기 인문학서 『불경스러운 언어』가 내로라하는 한국수필에서 인정받아 참으로 기쁩니다. 고문(古⽂)을 주로 쓰던 조선 후기, 조선 지식인들이 소품문을 지어 문체반정이 일어났죠. 18, 19세기 박지원, 심노숭, 김려 등 특히, 낯선 글을 쓴다고 징병을 두 번이나 간 이옥이 수상 소식을 들으면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시대를 초월한 그의 명문을 후 인이 알아주니 그의 억울함도 조금은 누그러지리라 봅니다.
『불경스러운 언어』는 제가 갈구하던 책이기도 합니다. 고전 명문장이 집약된 작품집을 찾아 헤매었지요. 옛 문인들의 저서를 수백 권을 탐독하다가 결국, 제가 쓰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고전을 꼬리 잇기로 만나며 예나 지금이나 일상사는 이어지고, 그걸 기록으로 남긴 문인은 남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불경스러운 언어’로 취급된 문장에 전율하며 밑줄을 수없이 그었답니다. 저의 마음을 뒤흔든 문장 덕분에 삶의 철학도 담게 되었습니다. 8년이란 세월을 고전 속에 머물며 ‘이은희의 수필여행법’이란 제호로 수필 전문지에 연재한 결과물은, 충북문화재단 우수창작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책을 엮게 되었습니다. 부디 『불경스러운 언어』로 영감을 얻어 좋은 글을 낳는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작가의 삶은 겉으로 변함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무언가를 꿈꾸는 남다른 사람입니다. 필자도 하루 한시도 수필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정녕 수필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지요. 직장 생활하며 치열하게 글을 쓴 생애 응답을 받는 듯 『불경스러운 언어』를 수상작으로 선정해주시니 기운이 절로 납니다. 저의 남은 생의 나날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틈나는 대로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가꾸며, 한국의 전통 문화 유산을 찾아 유람하며,그 감상을 글로 적고 있을 겁니다.
다시금 저의 작품집을 영예로운 한국수필문학상에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국수필 문학 발전을 위하여 애쓰는 (사)한국수필가협회와 월간 한국수필 그리고 함께하는 문인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한국수필문학상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이은희 ehleeup@daum.net
『월간문학』등단(2004).수상 :동서커피문학상 대상,구름카페문학상수상,박종화문학상 다수. 수필집 『검댕이』 『화화화』(아르코문학창작선정도서) 『불경스러운 언어』 외8권. 계간『에세이포 레』 주간, 청주문화원부원장, 충북문화재단 이사, 한국문인협회이사, 충북 펜문학 부회장, 충북수 필문학회 감사, 수필문우회 외.
심사평
심사위원|유혜자ㆍ지연희(글)ㆍ최원현
제42회 한국수필문학상 심사를 맡으며 한국수필 문단 필자들의 역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경중을 재단하기 어려울 만큼 선명한 주제와 적절한 소재로 문장을 다듬어 의미를 개진하는데 손색이 없었다는 점이다. 여섯 분의 응모자들 속에서 예심을 거쳐 이은희의 수필집 『불경스러운 언어』와 박원명화의 수필집 『달빛 사랑』을 본심에 올려놓고 심사위원 모두 만장 일치로 제42회 수필문학상 수상자를 확정지었다.
이은희의 수필집 『불경스러운 언어』 중 「묘사, 그 치열함의 세계로」를 감상하며 습득한 테마는 필자의 문체가 매우 주제의 관점에서 피력한 ‘묘사’적 수필쓰기의 담론이라는 점이다. 대상을 바라보고 우려낸 묘사의 강도가 단단한 철근과도 같아 어느 곳 하나 버릴 데 없는 문장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해학적인 묘사를 곁들인 언어를 맞이하고서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엄중한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어 쏟아내는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상을 향하여 상체를 한껏 구부리고 살찐 엉덩이를 삐죽 내민 형상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오른손으로 치켜올려 대상을 톺아보는 중노인.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엉덩이를 내밀고 그림을 바라보는 모습은 차마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다.’ 이같이 제시한 이은희의 문장들 모두는 섬세한 묘사수필로 배태한 기법이 아닐 수 없다. 산문 문장에서 묘사문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필자의 사고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세계이다.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빚어낸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리한 감각으로 격조 높은 명품수필을 그려주었다.
전통과 권위의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을 하는 두 분께 축하를 보내며 좋은 작품들임에도 이번 수상에 들지 못한 분들에겐 다음의 기회가 분명 주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끝
첫댓글 이은희 선생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