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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하였다는데 데뷔년도를 빨리 올리기 위한 이야기로 추정된다. 실물 음반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실물 레코딩 노래는 1968년 8월 16일 내 사랑이 확인된다. 천리길은 1969년 5월 29일 발표되었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하다.
2024년 2월 27일, 2024년에 열리는 마지막 콘서트를 예고하며 은퇴를 시사했다. 적어도 데뷔년도와 출생연도에는 논란이 많지만 은퇴연도는 2024년으로 확정된 셈이다.
2. 위상 및 평가
트로트의 전설적인 카리스마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이자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로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가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어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1,2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3,0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롯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3. 나이를 둘러싼 논란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45년생인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자신보다 5~6살 어리다고 했다.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시절 야구를 했는데 청소년 야구대표팀 감독과 포철공고, 서울고 야구팀 감독을 역임한 유태중(대동중 18회, 1967년 2월 졸업)과 동기였다고 하며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1951년생, 경남중 24회 1967년 졸업)이 'MBC FM4U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2013.12.27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다.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선수생활을 했다"면서 장기자랑을 할 때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서양화가 이목일 (1951년생, 서라벌고 13회 1970년 졸업) 화백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소풍을 갔었어요. 그때 홍기(나훈아의 본명)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함께 소풍 왔던 이웃 동덕여고생들까지 환호성을 질러 골짜기가 온통 함성으로 뒤덮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국 이후 가수로 데뷔한 이 자랑스러운 홍기를 위해 친구들이 너도나도 엽서를 사서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또한 80년대 중반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후배들은 선생님들이 과거 나훈아 학생에 관해 뒤쪽에 앉아 조용했고, 나중에 스타가 되어 학교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고 한다.
나훈아는 빠른 51년생으로 50년생들과 함께 1963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바로 중학교를 입학하지 않고, 1년 후 자신과 같은 51년생들과 함께 1964년에 중학교를 입학했다. 그래서 중학교 동창들부터는 전부 나훈아와 같은 51년생이다. 위에 굵은 글씨로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정황상, 나훈아는 51년생이 정설이라고 한다.
4. 특징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특허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 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당시 땡벌을 부르는 나훈아 방송 영상).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5. 대표곡
1966. 천리길: "돌뿌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길"
나훈아의 첫 데뷔곡으로 한동안 큰 인기를 누렸지만 배호의 노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 하여 문제가 되었고, 이후 새로운 홍보곡으로 내세운 노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1969.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첫 히트곡은 '천리길'이었으나, 이 곡은 표절시비가 있었으며, 나훈아를 가수로 부상시킨 곡은 '사랑은 눈물이 씨앗'이었다.
1969. 님 그리워
사촌동생인 가수 나진기씨가 가요무대에서 불렀고 다른 가수들도 많이 부른다.
1970. 가지마오
라디오에서 나오기 시작하며 엄청난 히트를 쳤던 나훈아의 '가지마오'는 원곡이 있는데 박철이라는 가수가 불렀다. 자세한 사연은 '나훈아 - 가지마오 (1970) (1970 박철 원곡 포함 Karaoke)' 설명에서 확인하시길.
1972. 물레방아 도는데: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
사랑: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아내들이 남편에게 듣고 싶어하는 노래 1위. 각종 대중가요 관련 조사에서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선정되는 국민 애창가요이다.
영영: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데뷔 25주년 기념 앨범의 타이틀곡.
울긴 왜 울어: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고까짓것 사랑 때문에"
1982년 [나훈아 1982' 3집] 앨범의 공동 타이틀인 '울긴 왜 울어'와 '잡초'는 동반히트를 기록했는데, 이 두 곡은 모두 뽕짝, 트로트 등의 단어로 불리며 쉽게 폄하되기 일쑤던 한국 성인가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노래들이었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잡초: "아무도 찾지 않은 바람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무시로: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일본어라고 오해받지만, 무시로의 뜻은 정한 때가 없이 수시로라는 단어이다. 2011년 백지영이 나는 가수다에서 열창해 재조명을 받았으나 그 후 모종의 문제로 2017년까지 음원서비스를 하지 않았던 비운의 곡. 최근 저작권 협의가 되어 들을 수 있게 됐다. 박우철 그리고 훗날 조항조가 불러 유명해지게 된 '남자라는 이유로'의 모티브가 되어 다시 화제가 되었다.
고향역: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나훈아의 무명시절을 날려 준 곡.
공: "살다보면 알게돼 일러주지 않아도"
대동강 편지: "대동강아 내가 왔다. 을밀대야 내가 왔다"
1981년 발표곡으로 오랜만의 컴백 앨범이었다. 당시 보기 드물었던 8페이지 풀컬러 화보집이 LP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태양음향 전속으로 발매.
갈무리: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1989년 발표곡으로 나훈아가 재기할 수 있게 해 준 결정적인 곡 중 하나.
홍시: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1992년 후배 가수 김지애의 앨범에 '석류가 웃는 이유'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김지애의 앨범에 레퍼토리로 자주 나왔음에도 뜨지 못 했고, 나훈아 본인이 리메이크하여 대박이 나자 김지애가 아예 수록곡으로만 치부했던 곡으로 새 앨범을 내서 활동 중이며, 모친을 회상하는 곡으로 많은 이들이 이 노래를 듣고 떠나가신 어머니와 부모님을 생각해 눈물을 흘렸다는 댓글이 많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가사가 너무 애절하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가사이기 때문이다.
애정이 꽃피던 시절: "첫 사랑 만나던 그날 얼굴을 붉히면서"
너와 나의 고향: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 세상"
머나먼 고향: "머나먼 남쪽 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강촌에 살고 싶네: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해변의 여인: "물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어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감나무 골: "산제비 넘는 고갯길 산딸기 피는 고갯길 재 넘어 감나무골"
인생길 나그네길: "사나이 한번나서 고향에만 살수있나 젊어서 한때라면 고생을 사자"
가라지: "간다면 누가 너를 못 보낼 줄 알고 가라지 누가 너를 잡을 줄 알고"
사내: "큰 소리로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진 것은 없어도 비굴하지 않았다"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했어요. 당신을 사랑이 이렇게 아픈줄도 모르고 당신을 사랑했어요"
18세 순이: "살구꽃이 필때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
건배: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세상은"
모정의 세월 : "동지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나훈아의 '모정의 세월'은 1972년 TBC 드라마 《어머니》의 주제가로 쓰였으나, 노래는 흥행하지 못했다. 무명가수였던 한세일(본명: 박현진)이 1973년 이 곡을 리메이크하면서 히트를 거두고 MBC 10대 가수 신인상까지 차지했다. 관련 기사
고장난 벽시계 :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2005년에 발표한 나훈아의 히트 넘버 중 하나. 상세 내용은 항목 참조.
땡벌 : "나는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너무 추워요"
흔히 트로트 곡 제목 '땡벌'이라고 한다면 강진이 부른 노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훈아가 부른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나훈아판 땡벌과 리메이크 땡벌은 가사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트로트 가수들끼리도 다른 가수가 히트친 곡을 본인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해서 출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나훈아 버전이 아닌 강진이 리메이크한 가사와 구성을 바탕으로 리메이크를 하는 일이 잦다.
녹슬은 기찻길: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1972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끊어진 경의선 철길을 ‘녹슬은 기찻길’로 표현해 실향민의 아픔을 드러냈다. (한국경제신문)
평양 아줌마 : "오늘따라 지는 해가 왜 저다지 고운지"
이 곡은 1985년 대한적십자사와 북한 적십자사의 주최로 분단 40년 만에 처음 남북 이산가족 교환 상봉 및 남북 예술단 교류로 나훈아, 하춘화, 김희갑 등 많은 연예인과 MC, 국악인 등 예술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예술인들이 처음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개최한 역사적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나훈아가 평양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이 곡을 작사, 작곡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곡이 발표되고 방송과 공연에서 불리우자 많은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고향 생각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청춘을 돌려다오 :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발표 당시 가수 신행일의 노래로 녹음됐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80년대 들어 나훈아와 현철이 다시 불어 비로소 히트됨.
고향으로 가는 배 : "고향으로 가는 배 꿈을 실은 작은 배 길을 잃은 사람아 고향으로 갑시다"
2017년 11월 3일 나훈아 Dream 서울 콘서트에서 지난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피살된 북한의 김정남 얼굴을 스크린에 띄우고는 "난 정치를 모르지만 이 사람이 생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10번 불렀다고 한다"며 '고향으로 가는 배'를 부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가수 정여진과 TULA가 이 곡의 작곡가인 '정민섭'씨의 자녀들이다.
남자의 인생
2017년 11년만에 컴백하면서 발표한 타이틀 곡. 현대적인 느낌의 가사와 중장년 층 남자의 삶에 대 하여 나훈아 특유의 구성진 목소리와 새로운 느낌 의 신곡.
몰라
아이라예(아닙니다)
찻집의 고독
70년대 초반 발표한 곡. 서정적인 가사로 남녀의 애틋한 마음을 그 시대의 분위기에 잘 맞게 세련된 느낌으로 부른 곡. 1972년 6월 4일, 젊을 적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 괴한에게 흉기로 칼을 맞아 얼굴을 다쳤던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왠만한 공연에서 이 노래만 부르면 그때가 생각난다해서 잘 안부르긴 하는데, TV쇼에서는 간간이 사연을 얘기한 다음에 (27분 30초경)패널 옆에서 부르거나 보디가드를 세우고(30분경) 불렀다.
아리수
2005년 한강 아리수 기념으로 만든 곡. 무대 위에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병사 300명의 코러스와 함께 부르면 그 모습이 천하제일대장군이다.아리수 실황 거북선을 타고 부르는 모습도 장관이다. 공연 아리수 엔딩
아담과 이브처럼: "난 그냥 니가 왠지 좋아 이유도 없이 그냥 그냥 좋아"
먼저 솔로곡으로 발표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후에 탤런트 배종옥과 듀엣곡으로 부르면서 히트하게 되었다. 2001년 취입, 동명의 KBS 일일드라마 삽입곡이기도 했다. 나훈아씨의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곡. 래퍼가 피처링한 버전도 있다. 2001년 명예의전당 무대에서 가수 장나라씨와 이지훈씨가 이 노래를 헌정곡으로 불러 나훈아씨의 미소를 자아냈다.
낙엽이 가는 길
나훈아의 노래 중 몇 안되는 가을 곡.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간간히 너를 그리워 하지만 어쩌면 너를 잊기도 하지"
나훈아 특유의 창법과 애절하고 예쁜 가사로 만들어진 곡. 1998년 IMF 외환위기 시절 발매되어 나훈아가 90년대에도 건재함을 알렸다. 발라드 풍의 곡으로 수많은 남녀 커플이 이 노래를 좋아한다.
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 "늙은 산 노을 업고 힘들어 하네 벌겋게 힘들어하네"
오로라
인도풍 느낌이 나지만 나훈아 특유의 간드러지고 감성적인 목소리가 느껴지는 애절한 느낌의 노래.
꿈속의 고향: "가고파도 갈 수없는 고향이기에"
한백년: "이왕에 만났으니 한백년은 살고 갑시다"
행복을 비는 마음: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후회: "내가 먼저 사랑하던 그 사람 버려놓고"
공항의 두 얼굴: "떠날 시간 남겨놓고"
자네! (8자는 뒤집어도 8자): "자네는 아는가 진정 아는가 팔자는 뒤집어도 팔자인 것을"
테스형!: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2020년 신곡.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공개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명자!: "자야자야 명자야! 불러샀던 아버지 술 심부름에 이 골 났었고 자야자야 명자야! 찾아샀던 어머니 청소해라 동생 업어줘라"
체인지
6. 라이벌 남진과의 비교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다.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출신 지역도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나뉜 건 덤.
사실 나훈아 집안도 이미지만큼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어서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도 가지고 있는 등 제법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래도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던 남진 집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 전 의원은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인사였다.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한 때 전라남도 전체에 승용차가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전라남도청에서 쓰는 전라남도지사용 관용차, 하나는 아버지 김문옥 의원의 것이었다고.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80년대 칼럼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 작사를 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방탄소년단, 이승환, 한국시리즈 7차전, 빅뱅, 명절 전 일반 열차, LCK 결승전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남진의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 외모와 같은 외적 이미지조차도 이를 따라갔는데 남진은 친근하고 편안한 아저씨의 이미지로 바뀐 반면 나훈아는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요계에 비유하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맞고 틀린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7. 개인사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부친이 외국에서 구매해 온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 덕에 형과 더불어 고향 부산에서 서울특별시의 서라벌예술고등학교로 유학도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보듯 원래는 성악가를 목표로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심형섭이 오아시스 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에게 소개해줬고, 그가 LP판을 무료로 녹음시켜주겠다고 하면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등생이었던 그가 꼭 의사나 판검사 같은 엘리트 직업을 갖기를 바랬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2년 6월 4일, 어느 스토커 같은 이에게 테러 당해서 한동안 입원한 적도 있다. 사이다병 파편으로 왼쪽 얼굴을 찔렸는데 무려 72바늘이나 꿰맸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다. 1990년대 TV에 나와 과거를 회상할 당시 가수 위기를 겪었다고...
목격자인 이상벽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괴한이 처음 난입했을 때는 무대에서 싸우는 퍼포먼스인 줄 알았는데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사태 파악을 해서 괴한을 제압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남진이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남진은 "재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으며, 또한 수사 결과 남진이 관련됐다는 증거도 하나도 안 나오면서 결과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남진의 증언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들을 스토킹하고 공격하던 사람이었고, 남진의 생가도 방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라이벌 남진도 테러당한 적이 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그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질 당시 그녀에게 수천만원의 돈을 건넸는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당시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군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 한편으로 김지미와 나훈아의 혼인이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으며, 김지미는 주위에 간혹 나훈아와의 혼인이 조금 후회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말한 적도 있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 했지만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김지미와 이혼 후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하다 아들을 얻었고, 1983년 연말에 3번째 결혼을 한다. 1988년 딸이 태어났으며, 정수경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1993년 하와이로 거처를 옮기며 나훈아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아들의 결혼식에 나훈아가 불참한 이후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던 박경춘 아시아레코드 사장에게 상무라고 칭한 서희덕 아시아레코드 기획이사를 때려 입건된 적도 있다.
2008년에는 일본 야쿠자와 여배우 K를 놓고 시비가 붙어 고자되기를 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헛소문이 너무 돌자 이런저런 의혹에 답변하고자 1시간짜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말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자 회견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제가 지금부터 이 위에 올라가서,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고 단상 위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서는 "자,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대표로 얘기해 주십시오.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며 원한다면 아예 바지를 벗어 증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 당연히 기자회견장은 그가 단상에 올라갈 때부터 술렁이고 셔터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때 나훈아의 팬들이 나훈아를 굳게 믿는다고 외쳐서 진짜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일단락됐다.
글로만 보면 우스운 해프닝처럼 보일 법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초강수였다. TV에 많이 나와야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지도를 많이 쌓고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들은 이때만 해도 진짜 누구 뒷배가 있지 않는 한 기자들 앞에선 그냥 일개 광대 취급을 받았다. 기자가 기사 한 줄만 작심하고 써도 힘 없는 연예인은 잘못하면 연예계에서 강제 은퇴당할 수도 있을 정도로 권력의 추가 언론에 기울어진 그런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전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할 말 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기자들에게 일갈한 나훈아의 이 퍼포먼스 덕에 여배우 K나 고자 스캔들은 한 방에 묻혀 버렸다. 반면 기자들은 이전에 루머 유포에 앞장선 것도 있고 이 때 나훈아가 저렇게까지 하는데도 사진이나 찍느라 바빴다는 것 등도 포함해 기레기 소리를 들으며 욕만 실컷 먹었다. 나훈아는 추가로 인터뷰에서 "여러분(기자)들이 펜으로 사람(연예인들)을 죽이는 겁니다."라고 다시 한 번 강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대중문화 기자 백은하는 이 퍼포먼스를 "땅으로 내려왔던 셀러브리티가 그렇게 다시 하늘에서 빛나는 별로 올라갔다."라고 평했고,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이런 카리스마는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교주님이라 외칠 만하다."라며 극찬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네티즌이나 기자들의 명예훼손, 허위사실유포, 모욕 등에 대해서 연예인들이 무대응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훈아의 이 기자 회견 이후로 서서히 법적대응을 하는 기조로 바뀌었다. 이 기자 회견은 이후 2024년 민희진의 민희진-HYBE 간 ADOR 경영권 분쟁에 대한 기자회견 내용이 '나훈아 이래로 최고로 기자들을 당황시켰다'는 말까지 나오며 연예부 기자의 세대를 가르게 되었다.
한때 개그맨 황기순의 전처 불륜 상대가 나훈아였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는데, 이 역시 그냥 루머인 채 끝났다.
2012년 12월에는 인도와 티베트를 돌아다니며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말한 바로는 거의 도사의 모습이 됐다고...
2013년 1월, SNL 코리아 최민수 편에서 최민수가 패러디하기도 했다. 다만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뭘 패러디 한 건지도 알 수 없게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아들어갔다.
2013년 4월, 세 번째 부인 정수경과의 이혼 소송에 들어갔다. 제1심에서 승소했으나 정수경 쪽에서 상고를 결정했다. 또한 지병이 있다는 게 알려지고 칩거했고, 양평에 있던 자택도 내놓았다고 한다.
나훈아의 아내 정수경이 2014년 10월 8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나훈아 본인도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결국 조정 절차 거쳐 이혼에 합의하였고 재산분할로 12억을 지급했다.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때 북한에서 나훈아 참석을 요구했던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김정은이 도종환 장관에게 나훈아는 안 왔냐고 묻자 도종환 장관이 스케줄 때문에 못 왔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김정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고 한다. 나랏일하면서 가수 하나 못 불러내는 게 김정은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나훈아는 일부러 불참했다 밝혔다. 그는 80년대만 해도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평양으로 공연을 가기도 하고, 다른 가수 이상으로 북한 땅이 고향이지만 남한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나 북한 동포에 관심이 많아 대동강이나 평양 등을 주제로 하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주도한 장성택 처형 사건, 김정남 피살 사건에 심한 충격을 받고 이 사건의 장본인 앞에서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1년만의 공연에서 '통일 쾌지나'를 부르는 등 북녘의 주민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분단의 아픔에 공감했으나 김정은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공연이 대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삼성 개인파티 공연도 유일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8. 여담
어린 시절부터 체력과 폐활량, 근력이 남달랐다고 한다. 저음을 불러도 단순히 목소리 내리깔며 부르는 게 아닌, 힘있는 저음처리였기 때문에, 이를 보고 반하는 음악팬들도 있었다고...
공연료가 부르는 게 값인 단 3명 뿐인 가수 중 하나이다. 다른 두 사람은 조용필, 서태지이다. 음악활동 외 방송 출연이나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셋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삼성 일가가 개인적 파티에서의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한 연예인이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 끊어라"고 했다고 한다.
'스타란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며 신비주의를 장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인데 가수의 뒷무대가 보여지면 환상이 깨질 수 있다고 말하였다. 다만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에서 김동건과의 토크에서 말하길, 자신에게 신비주의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고 밝혔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작사, 작곡을 하기 위해 꿈을 채우고 많은 책을 읽는 등 단단한 준비를 하므로 6개월 이상의 제법 긴 준비기간을 갖게 되는데 이 사이에 언론이 떠들며 신비주의라 윤색한 것이라고. 또한 해당 인터뷰에서 언론들이 자기가 뇌경색에 걸려 걷기도 어렵고 말도 어눌하다던데 이리 멀쩡히 걸어다니는게 미안해 죽겠다며 농담을 섞어 언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본래 슈퍼스타는 30%의 안티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남기기도 했는데, 이것이 2020년 전후로 여초 사이트에서 '진정한 슈퍼스타는 까와 빠를 둘다 미치게 만든다'는 발언으로 와전되어 2021년 경에 재조명받기도 했다.
(나훈아의 철저한 신비주의가 역으로 반감을 사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서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이 발언이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모두 미치게 한다'로 바뀐 것은 정반대의 해석이니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까는 슈퍼스타가 꼴보기 싫어 미치고 빠는 그런 까를 보며 더욱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에 잘못된 해석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이와 별개로 와전된 발언이 더욱 자극적이고 인상적인 면이 있어 나훈아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다.
일반인은 말할것도 없고 동료 연예인들조차도 실물 영접하기 정말 어려워하는 연예인들 중 하나다. 오죽하면 2021년에 데뷔 30년을 맞은 유재석 조차도 나훈아는 개인적으로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야말로 연예인들의 연예인. 집사부일체에서도 섭외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모양.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다. 2위는 쿨. 덕분에 지금도 들어오는 저작권료가 월 5,000만 ~ 1억원이 된다고 한다.
야구선수 강정호가 나훈아와 닮았다. 강정호에게 한때 붙었던 별명이 '목동 나훈아'였지만 강정호 본인이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 강정호가 어떤 위치로 추락했는지 생각해보면 강정호를 나훈아에 빗대는게 나훈아에 대한 엄청난 실례겠지만.
심쿵! 프리큐어에 등장하는 벨도 나훈아와 닮았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수염을 기르고 백발이 섞인 머리를 하여 마라훈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KBS 개그맨 정태호가 신인 시절에 나훈아를 따라했다. 폭소클럽2에서는 나훈아를 패러디한 나온나로 등장했으며, 개그콘서트에서도 간간히 나훈아를 따라했다.
1970년대에는 수려한 외모의 남진에 비해 투박한 외모로 평가받았으나, 현재는 푸근한 아저씨상이 된 남진에 비해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에서 공천을 제의받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난 가수가 천직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적이 있다. 정치인들이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 않고, 자기 당이 한 석 더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있다고 비판적인 태도를 비쳤다.
1996년 9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공연을 하며 노래 중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당당히 부른 적이 있다. 공연 마무리로 2천여 관중과 함께 '쾌지나 칭칭나네'를 합창하면서 그 가사 안에 즉흥적으로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을 넣어 부른 것. 이후 SBS 방송 《김혜수 플러스 유》에서 이러한 사실과 함께 일본 우익 세력들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훈아는 그 협박범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때리 직일라면 지기삐라 캐라(때려 죽이려면 죽이라 해라)."
1998년 11월 25일, SBS 방송 《김혜수 플러스 유》 10회 나훈아 스페셜에 나와 미국에서 공연을 제의받았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외국 가수들은 한국에 와서 공연할 때 과한 조건을 불러대는 반면, 한국 가수들은 미국을 구경하러 가는 기분으로 공연을 하던 것이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해서 거절하려는 마음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굉장히 허세를 부린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에이전시에서 그가 말한 모든 조건을 전부 들어줘서 결국 공연을 했다고...
2017년 8월 9일, 사촌지간인 나진기가 KBS2 방송 《뮤직 토크쇼 가요 1번지》 91회 나훈아 편에서 강진과 나와서 나훈아의 어릴적 비하인드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다.
2017년 11월, 나훈아 컴백 무대인 "나훈아 Dream 콘서트"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에서 각각 3일씩 열렸다. 쉽게 티켓을 예매할 수 있도록 온라인으로 전용 페이지도 개설한 것이 특징.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재촉에 티켓 판매를 기다리며 예매를 했고, 인터넷에서는 나훈아 콘서트 티켓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로 효자와 불효자가 나눠진다며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결국 서울 콘서트는 3분만에, 대구와 부산 콘서트는 10분만에 매진되었고, 예매 당일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8년, 팬들의 성원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깊은 고민을 했다며 앙코르 공연과 전국 순회 공연을 추진하였다. 2월 8일 오전 10시부터 전용 홈페이지에서 표를 구입할 수 있고 이번에도 전석이 초고속 매진되었다. 앙코르 공연은 같은 장소인 서울(올림픽홀/ 3월23~25일), 부산(벡스코 오디토리움/ 4월13~15일), 대구(엑스코 컨벤션홀/ 4월 20일~22일)에서 이루어졌다. 몇몇 공연 후기에 따르면 효도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가 본인이 입덕하고 말았다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공연의 퀄리티가 우수하다고. 실제로 커뮤니티에서 장문의 리뷰글이 많이 올라왔다.
2019년에도 상반기 전국 투어 콘서트 일정이 잡혔다. 공연 장소 및 일정은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5월 17일~19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6월 8일~9일), 대구 엑스코 1층(6월 15일~16일), 청주 청주대 석우문화체육관(6월 29일), 울산 동천실내체육관(7월 6일). 지난 공연 예매와 마찬가지로, 3월 20일에 열린 서울 공연 온라인 티켓팅도 3분만에 매진되었다. 이번에도 효자판독기 명성에 걸맞는 고난이도 피켓팅. 그리고 본인과 공연 주최측이 서울시내버스에 매진 감사 광고를 내기도 했다.
강진이 말하길 0번째 은인이라고 한다. 강진이 가수로 데뷔한 이후 확실한 히트곡이 없어서 히트곡이 될 만한 신곡을 찾다가 아내가 땡벌을 이야기했고, 강진 본인도 땡벌이 마음에 들어서 결국 나훈아를 직접 찾아가서 저에게 이 곡을 주시면 유명한 가수가 되어보겠다고 부탁했는데, 이때 나훈아는 왜 신곡이 아니라 자신의 땡벌을 부르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고 강진은 신곡보다 땡벌이 좋다고 했더니 강진이 부른 노래들을 사무실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을 들어본 나훈아가 연락해서 강진이 가보니 직접 강진에게 맞게 멜로디와 가사를 추가하는 편곡까지 끝내놓았다고 한다. 이 편곡된 버전의 땡벌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강진의 땡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강진은 편곡에 대한 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나훈아는 후배에게 돈 한푼도 요구하지 않았고, 작업실에서 한번 직접 불러서 녹음까지 해주며 가이드 역할까지 해주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훈아의 보컬 스타일때문에 계속 듣고 따라 부르다보면 나훈아의 모창으로 끝나버리는 상황을 염려해서 강진에게 한번만 들려주고 지워버리는 세심한 배려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2020년 TV CHOSUN에서 방영된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나훈아의 곡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본선 1차전과 레전드 미션을 제외하고 그의 노래가 꾸준히 선곡되었으며, 선에 오른 영탁 역시 예선전 곡으로《사내》를 불렀으며, 미에 오른 이찬원이 중요한 고비마다 《울긴 왜 울어》, 《18세 순이》 등을 불러 높은 인기를 얻었다.
2020년 2월 28일,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구에 익명으로 3억 원의 통큰 기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2020년 9월 23일,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위해 추석 기념으로 콘서트를 열어 TV로 방영하였다. 이 공연에서 앞으로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이훈희 KBS 제2본부장의 질문에 자신은 "흐를 유, 행할 행, 노래 가, 유행가 가수다. 남는 게 웃기는 거다. 뭘로 남는다는 말 자체가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답하였으며, 어떤 가수로 남을 지에 대해선 묻지도 말라며 호쾌한 모습을 보였다. 재밌는 건 2002년도 인터뷰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는 것.
그의 노래는 정말 인기도 많고 많은 후배 가수들이 존경심을 담아 불러주지만 정작 단 한 번도 그들의 앞에 나온 적이 없다. 2020년 트로트 돌풍 중일 때 다른 트로트 거장들이 다 한 그 흔한 심사위원조차도 나훈아는 하지 않았다. 대중들과의 소통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콘서트가 아닌 이상 나훈아를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콘서트가 어쩔 수 없이 매진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2021년에는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의 10대 소년들이 나훈아의 노래 ‘사내’를 비롯한 여러 한국 노래를 영상으로 보고 따라부르다 주민을 감시하는 인민반장의 아들의 신고로 발각되어 노동교화소라는 감옥에 보내졌다고 한다. 국가보위성은 체포한 소년들에게 ‘남조선 노래 중에 너희를 유혹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어서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고 물었는데 소년들은 ‘사내답게 살다가 사내답게 갈 거다’는 노래 구절이 너무 가슴에 와닿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이 보위성의 가족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유포되어 한국 가요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고 한다.
하와이에 Nahuna(나후나)라는 이름의 작은 섬이 있다. Chang's Beach 및 Five Graves에서 왼쪽에 있다.
2~30대에겐 생소하진 않아도 인기는 없는 편이지만 상술한 코로나 퇴치 기원 콘서트와 맞짱의 뮤비연출로 인해 코리안 게롤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특히 맞짱의 뮤비는 진짜로 게롤트처럼 검 하나 들고 괴물들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젠 역으로 게롤트가 리비아의 나훈아로 불릴 지경.
최신 유행어에 은근히 밝은 듯 하다. 직접 작사한 곡들에 '너와의 썸', '웃프다' 같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에 연배가 높은 가수를 표현할때 나후나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나후나로 소개되지만 묘사를 보면 영락없는 나훈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