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7일 수요일(甲辰년 丙寅월 辛丑일)
乾
□辛丙甲
□丑寅辰
癸壬辛庚己戊丁
酉申未午巳辰卯
설날 연휴(連休)가 시작되었다. 지금 글을 쓰는 날짜하고 실제 날짜가 다르다. 매일 하나씩 쓰려고 애를 쓰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춰지곤 한다. 시간 있을 때는 더 많은 글을 미리 써놓으려고 하는데 미뤄진 경우가 많다. 달력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으면 매일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걸어가는 세월이 느껴진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시간은 하루 한 걸음씩 나아간다. 개인적인 사정은 봐 주지 않는다. 무정(無情)한 세월이다.
지금 설날보다 어릴 때 설날이 더 성대(盛大)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설날이 다가오면 방앗간에서 떡을 했다. 당시 방앗간에 따라갈 때가 있었는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긴 줄이 생각난다. 밤늦게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아 한숨 자고 일어나도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새해 떡국 안 먹으면 어쩐다고 없는 살림에 그렇게 고생하며 추운 밤 방앗간에서 기다렸나 모르겠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지금 내 나이는 그때 어머니 나이보다 20년 이상은 더 들어버렸다. 또 한 가지 아버지는 왜 그 바쁘고 번잡한 설날에 꼭 산소에 갔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설날 휴일이면 쉬고도 싶고 다른 일을 하고도 싶은데 모두 성묘(省墓)에 동원되었다. 불평불만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강한 힘 앞에서 동생들과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 집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성묘갈 때 보면 이곳저곳에서 우리와 같이 떼를 지어 성묘 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떡국을 먹으면 아버지는 대부대를 거느리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와 거의 1시간 이상 걸어서 시외버스를 탔다. 시외버스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찼다. 버스는 고물이었고 사람들 또한 왁자지껄했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버스 속에서 싸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도 시끄럽다고 했다. 나는 한 소리 듣고 쪼그라져 있는데 잠시 후 내 바로 밑 동생이 나섰다. “오랜만에 가족들 만나 시끄러울 수도 있제!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동생의 생긴 모습도 그렇고 우리도 사람 수로는 밀리지 않아서인지 그 야단쳤던 사람이 조용해졌다. 손발을 쓰는 그 동생은 내가 꽥 소리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항상 방패가 되어 주었다. 가족이 많으니 각자 필요할 때 필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팔자가 다 소중하다. 그런 면에서 팔자를 사흉신(不善)과 사길신(善)으로 나눈 자평진전 심효첨(沈孝瞻)은 나와 의견이 다르다.
선산이 광주(光州) 옆 화순(和順)에 있으므로 가까운데도 당시는 터널이 없어서 시외버스는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야 했다. 지금은 고속도로처럼 뚫린 터널이 있어서 시원스럽게 차가 다닌다. 세월이 지나 등장인물들이 바뀌어 지금은 딸랑구가 매일 이 길로 출퇴근하고 있다.
화순 터미널에 내리면 끝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성묫길은 시작된다. 지금 생각하면 두어 시간이면 갈 길인데 당시 아버지는 중간에 있는 친척 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대부대를 몰고 반드시 들려 술 한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은 휙휙 지나갔다. 어떤 날은 그 친척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당시는 없이 산 사람들이 왜 그리 정(情)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부대가 지나가면 그 집의 떡국이나 음식이 동이 나도 전혀 못마땅하다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게 살아도 참 인정(人情)이 많았던 시대였다. 그 친척들도 광주(光州) 우리 집에 오면 우리는 열심히 막걸리를 사다 날리는 심부름 해야 했다. 지금도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이따금 그런 친구들이 있다. 일차 이차하고 자기 집으로 기어코 가자는 친구들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지만, 그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은 높이 평가한다.
어쨌든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모두 가족들과 만나 즐겁고 행복한 설날 연휴 보내시길 바란다.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빼시고, “왜 시집 안 가냐?” 등 사생활 묻지 마시고 좋은 추억만 공유하시길...^^
乾
□辛丙甲
□丑寅辰
癸壬辛庚己戊丁
酉申未午巳辰卯
丙辛합이 있으면 두 글자가 없는 글자처럼 된다는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 결과를 보고 짜 맞추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천간합은 반대편 천간 글자 조합이다. 밤과 낮과 같다. 밤에는 밤이 일하고 낮이 쉬면 된다. 낮에는 낮이 일하고 밤이 쉬면 된다. 반대로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의 법을 지키지 않고 실패한 후 팔자 탓을 하는 사람이 많다.
丙火는 정관(正官)이고 더 확산 더 상승하는 속성이 있다. 寅월에 태어났으니 장생급 정관(正官)이다. 연간의 정재 甲木은 확산 상승하는 속성이 있고 甲木은 월지와 일지에서 건록(建祿) 중 쇠(衰)로 힘이 있다. 초반 寅卯辰 대운을 지날 때 甲木 재성의 기운은 록왕쇠(祿旺衰)가 된다. 재성(財星)은 밀고 나가는 힘이니 자기 방식의 추진력이 몹시 강할 듯하다. 반장 학생회장 등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외부의 강한 힘이 팔자를 뒷받침해 주었을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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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천수 자평진전 난강망 등 명리학 3대 보서(寶書)라는 책을 새로운 명리학 이론에 근거해서 재해석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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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作祿堂 不獨無是理 抑且得祿避位 文法上下不相顧 古人作書 何至不通若是
만일 득록(得祿)을 녹당(祿堂)으로 해석한다면 이치에 어긋난다. 또 득록(得祿)하면 자리에서 물러난다니 문법 상하(上下)도 맞지 않다. 고인(古人)이 책을 쓸 때 이런 말도 되지 않은 글을 썼을 리가 있겠는가?
해설) 득록(得祿)으로 논쟁하고 있다. 원국과 운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보통 록(祿)은 녹봉(祿俸)으로 월급을 의미하니 관직(官職)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득록(得祿)은 관직(官職)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운(運)에서 득록(得祿)을 하면 관직(官職)을 잃는다니 말이 되냐고 항변(抗卞)한다. 하나의 직(職)을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얻는다고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원국에 관(官)이 좋으면 관(官)에 소질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운(運)에서 힘을 실어 주어야 현실로 이룰 수 있다. 물론 실력을 갖추고 준비가 이루어졌을 때이다. 팔자의 모든 글자는 운의 도움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다. 벚나무도 봄이 왔을 때 꽃을 피울 수 있다. 운이 돕지 않으면 모든 노력은 허사(虛事)가 된다.
又若女命 有云歸衆則舞裙歌扇 貴衆者 官衆也 女以官爲夫 正夫豈可疊出乎 一女衆夫 舞裙歌扇 理固然也
여자의 사주에서 귀중(貴重)이면 기생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귀중(貴重)이란 정관(正官)이 많은 것이고 여자의 사주에 정관(正官)이 많다는 것은 남편이 많은 것이다. 어찌 마땅한 일이겠는가? 한 여자가 여러 남편을 모시면 기생이 되는 것이니 이렇게 보면 옛말에 일리가 있다.
해설) 귀중(貴重)이라고 할 때 귀(貴)가 남자인지 아니면 귀인(貴人)이라는 신살(神殺)인지 논쟁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용어도 정리하지 않고 학문이라고 하니 어떤 취급을 받겠는가? 용어의 개념 정리 즉 정명(正名)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재성, 여자에게 남자는 관성이라는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인가? 물론 기득권을 가진 남자 관료들이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음(陰)과 양(陽)은 대등하다. 남자와 여자는 대등하다. 여자 사주에 관(官)이 많으면 남자가 많다? 웃기는 이야기이다. 관(官)이 많으면 남자나 여자나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관(官)의 성향이 강할 것이다. 관(官)이 강하면 정관격 또는 편관격이 되어 남자든 여자든 조직 생활에 적합하다. 그러나 과거에 여자에게 조직에서 근무할 기회나 주어졌는가? 명리학에는 남녀평등 사상이 들어있다. 음(陰)과 양(陽)은 대등하다.
若作貴人 乃是天星 竝非夫主 何碍於衆 而必爲娼妓乎
만약 귀중(歸重)이 정관(正官)이 아니라면 귀인(貴人)은 하늘의 별일 뿐이지 남편이 아니니 많아도 나쁠 것이 없다. 그러면 반드시 창기(娼妓)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해설) 귀중(貴重)에서 귀(貴)를 신살로 본다면 귀중(貴重)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런데 옛 책에 귀중(貴重)하면 기생이 된다고 했으니, 남자가 많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자평진전의 주장이다. 귀(貴)가 관(官)이고 관(官)이 남자인가?
첫댓글 대운 수정 부탁합니다^~^
넵
수정하였습니다.^^
본적도 서울인 난 어려서 외갓집 (수원) 갈 때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명절때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부러울때도 있었다 ~ 이런 날 지방이 고향인 친구들은 이해 할 수 없다고 ㅋ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고 ~ 그래도 결국 남의 떡이다 ㅋ
나에게 주어진~ 내 손 안에 있는 내 떡을~ 늘 맘 편히 감사하는 맘으로 먹으면서 살겠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은 없다~ 부모님의 사랑 & 친구들의 우정 & 건강 기타등등~~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늘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이글은 다시 읽어도 우리 옛적 명절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 집니다. 그 시절의 정겨운 모습이 한폭 수채화 같습니다^~^
성묫길! 아버지 돌아가시고 부터 흐지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