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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패공(覇公) 탄생 (8)
제환공(齊桓公)이 견 땅에서 회합을 갖고 처음으로 중원 동맹국의 맹주에 오른 지 10년이 지났다.
격정의 시대답게 그 사이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과 변화들이 있었다. 그 주요 사건들을 간략하게나마 지금까지 기술했던바, 이 기간에 제환공은 관중(管仲)을 앞세워 제(齊)나라 경제를 탄탄히 구축하고 군사력을 더욱 크게 키워나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원 곳곳에는 수백 개의 도시국가 - 즉 한 고을을 한 나라로 하는 소국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대부분이 강대국의 부용(附庸)으로 존립했지만, 그래도 나라는 나라였다.
제환공(齊桓公)이 패공에 오른 이후 가장 주도적으로 벌인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소국들의 병탄(倂呑)이었다. 때로는 군사를 파견하기도 했고, 때로는 항복 사자를 보내어 귀속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병탄한 나라의 수만도 35개국. 여기에는 물론 오랑캐로 불리는 이족(夷族)의 나라도 포함되어 있다.
<춘추좌씨전>에 보면,
제(齊)나라, 오랑캐를 치다.
라는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의 오랑캐란 변방의 이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회수(淮水)나 제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소수 이족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따라 제나라 영토는 점점 넓어져갔고, 애매모호하던 국경 개념도 점차 명확해졌다. 일찍이 주무왕은 태공망을 제나라 제후에 봉하면서 다음과 같이 영토를 정해준 바 있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황하에, 남쪽으로는 목릉(지금의 산동성 임구현 남쪽 일대)에, 북쪽으로는 무체(지금의 하북성 무체현 북쪽 일대)에 이르는 땅을 다스리되,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九州)의 수령들이 잘못을 하면 제(齊)나라가 징벌하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토가 모두 제나라 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수십 개의 소국과 제수를 따라 산재해 있는 이족(夷族) 집단들이 바로 이 국경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무왕의 이러한 영토 설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이 지역을 완전히 통일하여 제(齊)나라 땅으로 삼으라는 임무 부여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 후 태공망은 주무왕의 요구대로 광대한 지역을 제나라 영토로 삼는 데 성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태공망 이후 제(齊)나라 힘은 쇠약해져 다시 이족(夷族)들이 판을 치게 되었고, 국경이라는 것도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제희공 때에는 산융(山戎)의 침략을 받아 정장공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하였을까.
이런 상태가 3백 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중에 제환공(齊桓公)이라는 명군과 관중(管仲)이라는 명신이 등장하여 수년 사이 주변의 이족들을 모두 흡수, 통합하니 제나라 영토는 태공망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제환공 18년, 지금의 안휘성 사수현에 위치한 제후국인 서(徐)나라마저 병탄함으로써 제환공은 마침내 산동성 일대의 모든 소국들을 통합하였다. 그러고는 그 이듬해인 19년 6월에 다시 송, 노, 진(陳), 정나라 임금들을 송나라 영토인 유(幽)땅으로 불러내 네 번째로 회맹을 갖고 자신이 패공(覇公)임을 재확인했다.
회맹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제환공(齊桓公)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천자 부럽지 않은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궁정안에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든 신하를 초청해 위로했다.
제환공(齊桓公)은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나서 신하들을 향해 외쳤다.
"즐겁구나, 오늘이여!"
"만수(萬壽)하소서."
모든 신하들이 화답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유독 포숙(鮑叔)만이 술잔을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제환공이 보았다.
"그대는 과인이 패업을 이룬 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그러자 포숙(鮑叔)이 얼굴빛을 바로하며 말했다.
"신이라고 해서 어찌 오늘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다만 총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는 비록 즐거울지라도 지난날의 근심하던 때를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군신이 모두 즐거움에만 취해 있을 뿐 지난날의 일들을 잊은 것 같아 잠시 마음을 추스렸을 뿐입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지난날 망명하던 시절을 잊지 마시고, 관중(管仲)은 지난날 함거속에 갇혀 <황곡의 노래>를 부르던 때를 잊지 말 것이며, 영척은 소 치던 촌부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포숙(鮑叔)의 이같은 말에 제환공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포숙을 향해 읍을 한 뒤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두들 들었는가. 과인과 모든 대부는 지금 이 순간부터 포숙의 말을 절대로 잊지말라. 이것은 우리 제나라 사직의 무궁한 복이로다!"
그제야 포숙(鮑叔)도 얼굴빛을 풀며 술잔을 높이 쳐들었다.
어느 날, 낙양의 주왕실로부터 사자가 제나라에 도착했다.
사자로 온 사람은 소백 요였다. 소백 요는 '왕자 퇴(頹)의 난'이 일어났을 때 주공 기보(忌父)와 더불어 줄곧 주혜왕을 보호하며 따라다녔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제환공(齊桓公)은 소백 요를 정중히 영접하긴 하였지만 주혜왕이 그를 보낸 까닭을 알지 못해 은근히 불안했다. 관중을 불러 물었다.
"난데없이 주혜왕이 사자를 보낸 까닭이 무엇일 것 같소? 지난날 왕자 퇴(頹)의 난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제나라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을 탓하러 온 거나 아닌지 모르겠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일과 관계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윽고 소백 요가 제궁(齊宮)으로 들어와 주혜왕의 명을 제환공에게 전했다. 관중(管仲)의 추측은 맞았다.
"이제 제환공을 방백(方伯)으로 삼고 태공(太公)의 직위를 내리노니, 제나라는 불의를 정벌하는 데 온 힘을 쏟으라. 지난날 왕자 퇴가 난을 일으켰을 때 위나라 혜공은 퇴(頹)를 도와 왕위에 앉힌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의 분한 마음을 잊지 못한 채 10년의 세월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아직 위(衛)나라를 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다행히 제나라가 동방에 있어 맹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방백은 위나라를 토벌하여 이 분한 마음을 씻어주기 바라노라."
지난날의 일을 원수 갚음 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주혜왕은 제환공(齊桓公)에게 공식적으로 방백(方伯)의 지위를 내린 것이었다. 다소 치졸한 방법이기는 하였지만 힘이 없는 주왕실로서는 이 방법이 가장 최선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주혜왕의 이러한 명은 제환공에게 있어 또 다른 시각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누려왔던 패공(覇公), 혹은 맹주라는 지위는 왕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중원의 여러 동맹국 제후들 간에만 통용되는 호칭이었다. 주왕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공식적으로 주혜왕에게서 '방백'이라는 직위를 제수받았으니, 어찌 스스로 패공이라 자처하는 것과 같을 수 있을 것인가. 방백(方伯)이란 믓 제후들의 우두머리라는 뜻. 일찍이 주무왕이 태공망에게 방백이란 지위를 내린 적이 있었다.
제환공(齊桓公)은 위나라를 징벌하라는 주혜왕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이듬해 봄, 제환공은 친히 병차를 거느리고 위(衛)나라로 쳐들어갔다. 쳐들어가는 이유도 밝히지 않고 대뜸 국경을 돌파했다.
이때 왕자 퇴(頹)를 도와 주혜왕을 핍박했던 위혜공은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고, 그의 아들 적(赤)이 새로이 군위에 올라 있었다. 그가 위의공(衛懿公)이다. 위의공 역시 제환공이 침략해오는 이유를 묻지 않고 곧장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웠다.
그러나 첫 싸움에서 위의공(衛懿公)은 패했다.
도성으로 쫓겨가 제군(齊軍)의 포위를 받고 나서야 제환공의 이번 침공이 '왕자 퇴(頹)의 난'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선군의 잘못이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위의공은 큰 아들 개방(開方)에게 황금과 비단 다섯 수레를 내주고 제환공에게 가 강화(講和)하도록 명했다.
제환공은 공자 개방(開方)이 가져온 뇌물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 선왕의 법에 의하면, 아비가 지은 죄는 자손에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 어찌 진심으로 위의공(衛懿公)을 핍박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강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자 개방(開方)은 제환공이 패공으로서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자 불현듯 제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성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다시 제환공을 찾아갔다.
"제(齊)나라로 들어가 군후를 모시며 지내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제환공(齊桓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는 위의공의 장자(長子)이다. 차례로 말하면 다음날 위(衛)나라 임금에 오를 것인데, 어찌하여 군위를 버리고 신하로서 나를 섬기려 하느냐?"
"군후께서는 천하의 명군이십니다. 그런 군주를 옆에서 모실 수 있는것만으로도 평생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어찌 임금 자리만 못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위공자 개방(開方)의 말에 제환공은 마음이 흡족했다. 이에 그를 데리고 제나라로 돌아가 대부 벼슬을 내려주고는 한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제나라 사람들 사이에 삼귀(三貴), 혹은 삼총(三寵)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거세하고 시종이 된 수초와 자신의 아들을 죽여 제환공에게 사람 고기를 맛보인 역아, 그리고 세자 자리를 버리고 제나라로 옮긴 위공자 개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모두 제환공으로부터 끔찍한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총애는 화(禍)를 키우는 온상인가.
훗날 이 세 사람으로 인해 제나라는 큰 어지러움에 빠지게 되니, 제환공(齊桓公) 같은 명군도 아첨하는 자에게만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 열국지 2권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