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2회 풀꽃 문학상 수상작 / 이재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외 9편) / 이재무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무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폐선들 / 이재무
신발장 속 다 해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
여름날 아침 제비가 처마 떠난 들판 쏘다니며
벌레 물어다 새끼들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
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
세상 바다에 나가
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
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었다
밑창 닳고 축 나간,
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
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
들여다볼 적마다 뭉클해지는 저것들
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추석 / 이재무
쉰다섯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부지 나이, 엄미 돌아가신 뒤
두어 해 뒤꼍 그늘처럼 사시다가
인척과 이웃 청 못 이기는 척
새어머니 들이시더니
생활도 음식도 간이 안 맞아
채 한 해도 해로 못하고 물리신 뒤로
흐릿한 눈에
그렁그렁 앞산 뒷산이나 담고 사시다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놓으셨다.
그런 무능한 아비가 싫어
담 바깥으로만 싸돌았는데
아, 빈 독에 어둠 같았을 적막
내 나이 쉰다섯, 음복이 쓰디쓰다.
크게 병들었는데 환부가 없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 이재무
아내는 비정규직인 나의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로는 더욱 그렇다
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 먹는다
흰 대접 속 희멀쑥한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밥 벌러 간다
미역국을 끓이다 / 이재무
외박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찬바람 도는 아내와 냉전의 사흘 보내고 나서
맞는 일요일 아침
식구들 몰래 일어나 미역국을 끓인다
엊저녁 물에 담가두었던 마른 미역
한 밤새 퉁퉁 살이 올라
바가지를 흔들 때마다 철썩철썩 파도를 부르고 있다
한 솥 가득 바다를 끓여내어
밥상에 올려놓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더운 국물로 식은 몸 덥히는 동안
아내 가슴에 옹골차게 박힌 돌
슬그머니 자취 감출 것인가
거실에 훈기가 돌고
영하의 날씨 베란다 얼어붙은 유리창에 핀
성에꽃들 죽죽 눈물 흘리며 창문 떠나고 있다
생활의 한 굽이,
또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돌아가고 있다
가을계곡 / 이재무
처서 백로 거쳐 추문에 들자
계곡은 더욱 맑고 투명해졌다
바닥 환히 드러내 보이는 물빛
밝아진 시력으로
제 몸보다 훨씬 더 큰 것들을 담고는
평상심으로 제 갈 길 가고 있었다
손을 담그면 서늘한 기운 솟구쳐 올라
쭈뼛, 머리끝이 곤두서기도 했다
가끔, 나는 그곳에 들러
문장 연습을 하다가 오고는 하였다
얼굴 / 이재무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추운 날 난로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뒤꼍에 고인 오후의 산그늘처럼
적막한
공책에 옮겨 쓴 경전 같은
약속 / 이재무
자주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리.
하늘엔 갑자기 생겨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겠지
가장 일찍 떠서 가장 늦게 질
하늘의 아이들아,
욕된 이름들이 지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잊지 말고 굽어보고 지켜보렴
흐르지 못한 시간들이
쌓이고 고여서 썩어가는
골목과 거리와 집과 강물과 늪에
너희 아픈 빛을 오래오래 비추어다오.
폐허의 가슴에
떠나버린 사랑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약속을 되새기리.
자주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리.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을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두부에 대하여 / 이재무
두부가 둥그런 원이 아니고
각이 진 네모인 까닭은
네메모가 아니라면 형태를 간직할 수 없기 때문
저 흔한 네모들은
물러 터진 속성을 감추기 위한 허세다
언제든 흐물흐물 무너질 수 있는 네모
너무 쉽게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네모
행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네모
제가 본래 단단하고 둥근 출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네모
우스꽝스러운, 장난 같은 네모
지가 진짜 네모인줄 아는 네모
언제든 처참하게 으깨어질 수 있는 네모
둘러보면 그런 두부 같은 네모들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