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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문학상 - 자선 대표작 20편
달맞이꽃
한 아이가 돌을 던져 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내 마음 속 당나귀 한 마리
내 마음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당나귀 한 마리 살고 있다
귀가 몹시 커다랗고
고개를 잘 숙이는 당나귀
그 당나귀가
잘 우는 당나귀인지, 잘 안 우는 당나귀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오랜 친구를 찾아가거나
한없이 느린 걸음으로
이 도시의 외곽을 배회할 때
어느덧 내 마음속에 들어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당나귀 한 마리
나는 이 당나귀가 좋아
풀만 먹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다
꽃 피지 않았던들
그대 사랑
꽃 피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꽃 피지 않았던들
우리 사랑 헤어졌을까요
밤에 듣는
빗소리, 천 년의 시간을 펼쳤다 접는
저 연잎의 하염없음으로
우리 사랑, 밤을 건넜겠지요
그대 사랑
꽃 피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꽃 피지 않았던들
우리 사랑 언제까지나
후두둑, 후두둑 피어났겠지요
꽃 피지 않았던들
꽃처럼 피어났겠지요
오동꽃
오동꽃이 왔다
텅 빈 눈 속에
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
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
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
오랜 시간 이 신전 밑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불을 붙인 적 없었으니
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
그 덧없는 도끼질처럼
나는 바다로, 깊은 산 속으로 떠돌았다
내 울음을 내가 들을 수는 없는 일
自己를 붙잡고 운 뒤에야
울음이 제 몸을 텅 텅 비우고 난 뒤에야
쇠북처럼 울음은 비로소 가두어지고
먼 곳에서 오동꽃이 왔다
갸륵한 신전이 불을 밝혔으니
너는 오래오래 울리라
두고 온 소반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서귀포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절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세상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만히 그 모습 떠올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보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세라
제풀에 꺾여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 내 자식이 또한 영글어
제삿날 내 절하는 모습을 뒤에서 훔쳐볼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길
그리워져서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생각해 주길 내처 기대하며
나는 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만히 발끝을 모아보는 것이다
벌초
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 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 조카들이 신식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 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 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 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젊은 날, 절에 들어와 처음 의문을 품었던 말은
무슨 거창한 화두 같은 것이 아니라
바람결에 들은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이었다.
화두를 잘못 들어 한평생 행려병자처럼 살아가야할 스님이나
화두를 잘 들어 한 소식 한 스님이나
간장종지 같은 머리가 깨지기는 마찬가지.
종재기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종재기가 깨지도록 가야하는 그 무엇이기에
이 말 속에는 더덕 애순 같은 지순함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철마다 골짜기, 골짜기를 온통 뒤덮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뿌리 속으로 스며드는 더덕 향 같은 것이
이 종재기가 깨진다는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기저귀
도립병원 구석진 6인 병실에서
노인들은 모두 기저귀를 차고 있다
먼 옛날 어머니 대신
이제는 낯선 간병인이 똥기저귀를 둘둘 말고 있다
정신은 멀쩡하나 똥오줌을 못 가리는 막내노인은
또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다
죽어도 기저귀는 안 차겠다고 버티다
오늘 아침 가족들 손에 이끌려 왔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긴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 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 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을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머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었다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자작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이 아침은 깨우쳐 주네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 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
멀미
어머니와 함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 넘어 친척집으로 가는 길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자꾸 말을 시키셨다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그러다보면
어느덧 버스는 대관령을 넘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잠이 드시곤 했다
일흔 넘으시며
어디 한 군데 몸 성한 곳 없는
늙으신 어머니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조르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이 없으시다
한계령
사랑하라 하였지만
나 이쯤에서 사랑을 두고 가네
길은 만신창이
지난 폭우에
그 붉던 단풍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집도 절도 없이
애오라지 헐떡이는 길만이 고개를 넘네
사랑하라 하였지만
그 사랑을
여기에 두고 가네
집도 절도 없으니
나도 당신도 여기에 없고
애간장이 눌러 붙은 길만이
헐떡이며, 헐떡이며
한계령을 넘네
진또배기
젊은 날, 해변을 떠돌다
진또배기를 만나면 반가웠다
푸른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녔지만
사람이 깎아 만든 새가
그토록 정다웠던 이유를 몰랐다, 새를 쳐다보며
아득히 외로웠던 이유를 몰랐다
이제는 외로움의 경계를 아는 나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나와 당신의 경계를,
발아래 사무치는 파도의 외로움을 아는 나이
하늘에는 새가 날고
사람이 깎아 만든 새는
영원히 고독을 나느니
오늘은
서쪽 구름이
새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지누아리
일곱살배기가 무슨 맛을 알겠냐만, 밥숟가락을 들고 지누아리를 얹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피를 통해 전해지는 입맛이 따로 있긴 있는 것이리. 명색이 시인인 애비가 죽을 때까지 꼭 시로 쓰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 오묘한 지누아리 맛이라. 애비가 말 배운 뒤부터 평생 보고 자란 동해에서 나는 이 지누아리는, 그 맛의 빛깔이 동해의 물빛만큼이나 층층이 달라서 바다 속으로 잠겼다 떠오른 해와 달의 흔적을 다 머금고 있는 거라. 거기에는 평생 간절함으로 애간장이 다 녹은 사람의 구절양장한 사랑도 남아 있어서, 씹으면 씹을수록 해와 달이 바다 속에 잠겼다 떠오르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니, 누가 있어 이 첩첩한 맛의 빛깔을 다 널어놓을 수 있겠는가.
아들아, 먼 훗날 이 애비가 너의 사랑의 빛깔을 다 볼 수 없을지라도,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고통에 대하여 애비와 함께 나누게 되지 못할지라도, 오늘처럼 늙은 애비가 흰밥위에 얹어주던 이 지누아리의 맛으로 세상을 비춰보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네를 타면서 바다 속에 잠겼다 떠오르는 해와 달의 노래에 귀 기울여보아라.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 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터미널 2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간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맘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은
저 넘치는 울음을 받아줄 수 없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돌아오는 터미널에서
저기 앳되고 앳된 한 여인이 울고 있다
터미널 9
아난다야,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이 터미널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아난다야, 나는 평생토록 병원과 터미널에 쪼그리고 앉아 생을 구경(究竟)하여 왔으니, 나의 경전 또한 그곳에서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마라. 이 세상은 만나서 아프고, 또 헤어져서 아픈 것이다. 슬픔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고, 기쁨은 별똥별처럼 사라지고 만다. 아난다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픈 것이다. 저 모텔의 불빛처럼 우리는 모두 지나가는 객일 뿐이다. 아난다야, 그러니 문고리를 붙잡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제 버스가 오면 나는 다시 객으로 돌아간다. 아난다야, 슬퍼하지 마라.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픈 것이다.
* 아난다- 붓다를 오랫동안 곁에서 시봉한 제자. 붓다의 마지막 유행길도 함께 했다.
주인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하는 세상이 저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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