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1386. [역경의 열매] 김정란 <1-12> 17세에 단돈 100원 들고 고향 떠나 사회 첫 발
밑바닥서 100억대 매출 회사 키워… 어려울 때마다 기도와 간구로 헤쳐
수입 명품 도자기숍을 운영하는 김정란 대표가 23일 경기도 성남의 푸른언덕 매장에서 도자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한여름의 강한 햇빛도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다음 달이면 이곳 청계산 입구의 ‘푸른언덕’ 주변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 것이다. 벌써부터 온 산을 붉게 수놓을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 설렌다.
푸른언덕은 해외 명품 도자기 판매와 카페를 겸한 사업장이다. 내가 가꾼 두 번째 일터다. 상호는 같지만 30년 넘게 해왔던 출판유통 분야 사업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 푸른언덕 1층은 유럽풍 카페로, 2층은 세계 명품 도자기 전시 판매장으로 꾸몄다.
서울 인근에서 자연과 더불어 유럽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도자기 사업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가치, 문화를 공유하고 내가 받은 복을 나누는 공간이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청계산의 풍경, 카페 입구에 놓인 예쁜 꽃들, 케이크와 차를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노부부를 볼 때면 절로 웃음이 난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마주할 때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아마 피조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삶의 가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떠할까. 전남 완도의 사후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어서 돈을 벌어 엄마를 편히 모시자’란 생각뿐이었다. 한편으론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해 학비를 벌면서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연간 100억대 매출의 회사로 키우기까지, 또 30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가 뒤늦게 찾아온 배움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물론 인간인지라 때론 가족 간에 갈등을 겪고 이혼 위기에 처한 순간도 있었다. 사업체가 휘청일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길을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받은 복을 나누기 위해 언제나 낮은 곳에 마음을 두면서 그 길을 걷고 있다. 이제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이 길의 끝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정란아”라고 칭찬을 받는 것. 17세에 단돈 100원을 들고 고향 사후도를 떠나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그 날부터 줄곧 품어온 생각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정란 <1> 17세에 단돈 100원 들고 고향 떠나 사회 첫 발
* [역경의 열매] 김정란 <2> 어머니 홀로 다섯 남매 키운 가난했던 섬 생활
* [역경의 열매] 김정란 <3> "학비 벌어 진학" 열일곱에 섬마을 떠나 취업
* [역경의 열매] 김정란 <4> 합판회사 다니며 주경야독… 21세에 고교 졸업
* [역경의 열매] 김정란 <5> '시집살이 스트레스'에 마음도 몸도 바닥으로
* [역경의 열매] 김정란 <6> 부부가 신앙으로 하나 되자 사업·가족관계 순풍
* [역경의 열매] 김정란 <7> 집중호우로 사무실 침수… 책이 쓰레기 더미로
* [역경의 열매] 김정란 <8> 늦게 공부 시작했지만 지난해 박사학위 받아
* [역경의 열매] 김정란 <9> 회사에 재정 위기 …"남편·신용 지키자" 최선의 선택
* [역경의 열매] 김정란 <10> '주님께 하듯 남편 대하자' 행복 찾아와
* [역경의 열매] 김정란 <11> '부도 위기' 겪고나서 나눔과 봉사의 기쁨 발견
* [역경의 열매] 김정란 <12·끝> "인생 2모작은 은혜와 감사를 나누며 살기로"
◇약력=△1960년 전남 완도 사후도 출생 △상명대 경영중소기업대학원 석사(2006년), 안양대 경영대학원 박사(2015년) △중소기업청장 '모범여성기업인상' 수상(2015년) △현 푸른언덕 대표, 국민일보기독여성리더스포럼 회장, ㈔국민여성리더스포럼 이사장, 여성경영자총연합회 이사, (재)평통여성장학재단 이사, 대림대 겸임교수, 온누리교회 권사
***[역경의 열매] 김정란 <2> 어머니 홀로 다섯 남매 키운 가난했던 섬 생활
중학교 진학하면서야 출생신고… 4년 빨리 태어난 것으로 기록돼
군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사후도 부둣가에서 언니와 함께한 김정란 권사(오른쪽).나는 1960년 전남 완도의 아름다운 섬 사후도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호적상에 난 ‘1956년생’이다. 1, 2년도 아니고 무려 4년이나 빨리 태어난 것으로 기록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군대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어머니의 삶은 너무도 팍팍했다. 당시엔 출생 신고를 하려면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정도로 생계가 버거웠던 어머니는 미처 출생 신고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둘째 오빠가 취직한 덕분에 나는 군산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출생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급하게 수기로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출생 연도를 오기(誤記)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 일은 가슴 아프다. 숫자를 잘못 기록해서가 아니라, 당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됐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섬에서의 삶은 가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가 김 양식을 해 육지로 내다 팔아도 여섯 식구가 입에 풀칠만 겨우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몸소 보여주신 어머니 덕분에 우리 다섯 남매는 구김살 없이 반듯하게 자랐다.
나는 초등학교 때 제법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섬마을 분교라 전교생이 50명 정도였지만 섬 축제나 운동회 같은 행사에 학생 대표로 나가 웅변을 할 정도로 성격도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주목 받는 학생이어도 작은 섬마을에서, 그것도 여자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사후도에는 당시 중학교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는 중학교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나만 공부를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둘째 오빠가 군산의 한 회사에 취직하면서 “정란이는 내가 중학교까지 가르치겠다”며 초등학교 5학년인 나를 군산으로 데리고 갔다. 구암초등학교로 전학한 나는 오빠 집에서 학교까지 2시간 남짓 걸어 다녔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신앙생활도 이때쯤 본격 시작했다. 사실 교회에 처음 간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사후도에서 주말이면 배를 타고 완도 인근 교인동의 교회에 친구를 따라 다녔다. 교회에 대한 첫 느낌은 ‘아름답다. 또 오고 싶다’는 거였다. 언덕 위에 자리한 교회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군산에선 나보다 한 살 어린 앞집 친구를 따라 성원교회에 나갔다.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데도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던 목사님,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 주시던 사모님을 잊을 수 없다. 신앙이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유치부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맡았는데, 매주일 아이들을 데리러 집집마다 찾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배 시간엔 아이들에게 공과책을 읽어주고, 예배를 마치면 또 일일이 아이들을 데려다주면서 나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했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3> “학비 벌어 진학” 열일곱에 섬마을 떠나 취업
어머니 김 양식 도우면서 고입 꿈꿔… 고향 언니 “일자리” 편지에 인천으로
김정란 권사(가운데)가 중국 단둥 압록강변에서 어머니, 딸을 보듬어 안고 있다. 어머니는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몸소 실천한 분이라고 김 권사는 회상한다.인생에 밑그림을 그린다는 건 곧 삶의 계획이나 꿈, 목적을 세운다는 의미다. 밑그림을 그린 사람과 그리지 않은 사람은 당장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살면서 뜻하지 않게 고난이나 역경을 만나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꿈과 목적이 있는 사람은 잠시 당황할 수는 있지만 결코 길을 잃고 헤매지 않는다. 좌절하거나 절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 막연하게나마 이런 밑그림을 그렸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자가 돼 엄마를 편히 모시자.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자.’ 이 꿈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더욱 구체화 됐다. 잠시 학업을 중단했을 때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 됐다.
군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형편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사후도로 돌아가 김 양식을 하는 어머니를 도우며 지냈다. 김은 차가운 바닷물에서 자란다. 때문에 김 양식은 한겨울 차가운 바닷바람을 헤치고 바다로 나가 파도와 싸우며 작업한다. 어머니를 도와 김 양식 일을 하면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하든 고등학교에 다녀야 한다.’ 학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김 양식에 필요한 말뚝을 팔던 여수 사람 양 사장이 어머니에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왔다. 우리 사정을 잘 알던 그는 내가 자신의 집에 와서 초등학생, 유치원생 두 아이를 돌보는 가정교사 일을 해주면 나를 고등학교에 보내 준다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딸을 남의 집에 맡기는 것도 그렇고, 신세지는 일을 할 수 없다며 반대하셨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나의 간절함에 결국 어머니는 허락하셨다.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됐구나’라며 벅찬 가슴을 안고 양 사장네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처음 두어 달은 잘 지냈다. 그런데 양 사장 부인이 집안일을 외면한 채 외출이 잦다보니 나는 그 집 살림까지 도맡게 됐다. 양 사장은 학교를 보내주겠다던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학교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미련을 갖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여수에서 버스를 타고 선착장까지 가서 완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내가 처한 막막한 현실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다시 사후도로 돌아간 나는 어머니 일을 도우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옆집 언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며 소식을 전해 왔다. ‘정란아, 여기 회사에 일손이 부족해 사람을 구하고 있다. 네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을 잘 알지만 우선 여기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어 보는 건 어떨까?’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편지를 잘 접어 가방에 챙겨놓고 언니를 만나기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한 번 탈 수 있는 단돈 100원을 들고서 말이다. 그렇게 열일곱 살 내 인생에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렸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4> 합판회사 다니며 주경야독… 21세에 고교 졸업
어머니는 좀더 편안한 혼처 찾았지만 홀시어머니·시누이 3명과 ‘시집살이’
김정란 권사는 첫사랑인 정용주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와 7년 연애 끝에 1984년 2월 결혼했다.“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설렘 가득했던 행복의 문은 닫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새로운 희망의 문을 스스로 열 수 있도록 나를 이끄셨다.
이웃집 언니의 도움으로 커다란 합판을 만드는 인천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솔직히 일은 고됐다. 객지에서 생활을 하려니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생계마저 빠듯했다. 어떤 날은 라면 하나로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다짐했다. ‘이 일도 못하면 앞으로 더 어려운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견뎌야 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결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각 한 번 한 적 없었다. 근무 중에 꾀를 부린 적도 없다. 근무 성적은 늘 일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리부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정란이 너를 지켜봤는데, 뭐든 성실하게 열심히 하더구나. 그래서 네게 더 좋은 직장을 소개해주고 싶다. 혹 원하는 곳이 있느냐?” 나는 서슴지 않고 답했다. “부장님, 전 좋은 직장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장님의 도움으로 회사 근처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 나이 19세 때 일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잠자는 시간이 줄어 몸은 피곤했지만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마냥 행복했다. 나는 더 큰 계획도 세웠다. ‘언젠가는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리라.’
남들보다 조금 늦은 21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잠시 한 도자기 회사 경리부에서 일했다. 그러다 서울 신길동에 예식장을 세운 고모가 일을 봐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예식장은 주로 주말에 바쁘니 주중에는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모네 예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식장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주중엔 예약을 받고 정산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주말이면 결혼식을 치르느라 정신없었다. 대학에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예식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해야 할지,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 무렵 남자친구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만난 사람으로, 당시엔 사촌 형의 출판 유통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성실함과 따뜻한 품성으로 내게 큰 믿음을 준 사람이었다.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우리의 결혼을 허락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생만 하는 막내딸이 좀 더 편안한 혼처를 찾기를 바라셨다. 홀시어머니에 시누이 셋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첫사랑인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설득해 1984년 2월 26일 우리는 결혼했다. 이후에도 나는 예식장 일을 계속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 경기도 부천에 작은 빌라 하나를 샀다. 하지만 신혼의 달달한 꿈도 잠시, 우리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어머니, 세 명의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 나는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5> ‘시집살이 스트레스’에 마음도 몸도 바닥으로
난소종양 수술로 직장생활도 한계… 주님 부르심 깨닫고 다시 교회 찾아
김정란 권사(맨 오른쪽)가 경기도 부천의 예식장에서 근무할 때 직장 동료들과 함께한 모습.‘인생은 파도와 같다’라는 말이 있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높이 칠 때가 있고 낮게 칠 때도 있다. 또 잔잔할 때도 있다. 만약 우리 인생이 평탄하니 잔잔하게 흘러간다면 과연 행복할까. 살면서 수차례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결혼 후에도 예식장 일을 계속했던 나는 직장 다니랴, 집안일 하랴, 쉴 틈이 없었다. 시어머니, 시누이들과 함께 살다 보니 집에서조차 긴장된 채 살아야 했다. 게다가 시누이들은 주말에도 밖에 나가 일하는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집에서조차 맘 편히 쉴 수 없었던 나는 정신·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짐을 싸들고 군산의 오빠 집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산으로 부랴부랴 나를 데리러왔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된 우리는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했다.
남편과 대화를 하다보니 그동안 나만 괴로웠던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도 나만큼이나 힘들었다고 했다. 남편은 “퇴근해 집에 들어와 봤자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집이 싫어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분가를 선언하고 이사를 했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만 멀어졌을 뿐, 시누이들의 간섭은 여전했다. 이를 못 견딘 내 몸에선 결국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기다리던 아이의 소식이 없자 산부인과를 찾아갔는데, 검사결과 난소에서 악성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아직 젊은데, 아직 아이도 못 가졌는데….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요.” 하염없이 원망의 눈물을 흘렸다. 큰 병원에서 제대로 다시 검사를 받았다. 일주일을 기다려 들은 결과는 악성이 아닌 양성. 일주일새 원망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로 바뀌었다. 병원에선 종양의 크기가 크다며 수술을 권했다. 수술을 받으니 몸은 더 약해졌고 체중도 43㎏까지 빠졌다.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는 건 무리였다.
문득 이런 큰일을 겪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간 예식장에서 주말까지 일하느라 어느새 교회를 잊고 산 지 5년이나 됐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쩌면 시댁과의 갈등도 하나님의 간절한 부르심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여보, 우리 교회에 가자.”
그날 이후 말씀을 곁에 두고 기도와 찬송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생겨도 주일은 꼭 지켰다. 예배를 통해 나는 서서히 회복됐다. 그렇게 상한 감정을 치유하니 먼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내가 더 순종하고 그들을 따랐다. 부부 관계 역시 돈독해졌다. 우리 부부는 어떤 일이든 대화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남편은 성실함과 자상함으로 지금까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시련이나 아픔, 상처 뒤에는 분명 하나님의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6> 부부가 신앙으로 하나 되자 사업·가족관계 순풍
시어머니도 믿음 갖고 살림 도맡아 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
시어머니와 식물원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김정란 권사(왼쪽)는 “시어머니의 헌신적 도움이 있어 사업 초기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1988년 남편과 나는 ‘㈜도서총판 푸른언덕’을 설립했다. 학습지와 참고서 등을 유통하는 회사다. 남편은 사촌아주버님 회사에서 착실히 출판 유통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성품이 착하고 온순했던 남편은 회사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8년 만에 아주버님은 남편을 독립시켰다.
푸른언덕은 아주버님의 건물에서 시작했다. 1층은 사업장으로, 2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난소종양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한 나는 다른 곳에 취직을 하기보다 남편을 돕자고 생각했다. 나는 회계를, 남편은 영업을 담당했다.
회사를 세운지 2년쯤 지났을까. 2주에 한 번씩 가정으로 배달되는 새로운 형태의 학습지가 나왔다.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 회사는 이 학습지의 강남지역 판매·보급을 담당했다. 하루라도 빨리 학습지를 전달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출판사에서 학습지가 늦게 도착해도 기다렸다가 학생들에게 배달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배달한 적도 있었다. 이 같은 우리의 근면 성실함에 학생 회원들은 쑥쑥 늘었다. 몸은 힘들지만 참 즐겁게 일했던 때다.
나에게 신앙은 분명한 삶의 원칙이다. 이 신앙을 바탕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나름의 원칙들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나 스스로에게 엄격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직하고 당당하게 남에게 나의 말을 들려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신뢰 가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신뢰가 아닐까 한다. 신뢰는 남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데 바탕이 되는 덕목이다. 나 스스로 신뢰받는 사람이 돼야 내 주변을 신뢰 있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다.
이 같은 원칙을 갖고 회사를 운영하니 매출도 급성장했다. 사업이 한창 잘될 시기에 우리에겐 더 큰 ‘기쁨’도 찾아왔다. 결혼하고 6년 동안 아이 소식이 없자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기도를 드릴 때면 항상 편안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1990년에 드디어 딸을 품에 안았다. 아이 이름을 ‘기쁨’으로 지었다. 기쁨이로 인해 지난 세월 아팠던 상처들은 다 잊고 우리 부부가 큰 기쁨을 얻었듯,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물로 주는 아이가 되길 바라서다.
정말 이때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특히 시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한 게 큰 은혜로 기억된다. 남편과 내가 신앙으로 하나 되니 시어머니도 아들 내외를 따라 믿음생활을 시작하셨다. 세례를 받으시고 틈틈이 성경말씀을 읽으셨다. 시어머니는 우리 부부가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셨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맡아주셨다. 살림집 아래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식사까지도 챙겨주신 분이다. 그런 어머니를 좀 더 오랫동안 모셨더라면 좋으련만, 시어머니는 뭐가 그리도 급하셨는지 66세에 신부전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7> 집중호우로 사무실 침수… 책이 쓰레기 더미로
“이만하길 다행” 감사기도 드려… 사옥 문제도 주님께 맡기자 풀려
1990년 서울지역 집중호우로 사무실이 침수돼 쓰레기 더미로 변한 책들.1990년 9월. 사업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뒤늦게 여름휴가를 떠났다. 부산의 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결혼하고 처음 떠난 여행이었다. 설렘을 안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서울지역 집중호우로 도로가 물에 잠기고 한강이 범람했는데, 회사로 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직원의 다급한 전화에 아찔해졌다. 부리나케 서울로 돌아왔다.
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도서총판 푸른언덕(당시 상호는 ‘풍문사’) 사무실은 이미 황톳물이 들어차 있었다. 물에 젖지 않은 책이라도 건질 생각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밤새 비를 맞으며 책 꾸러미들을 옮기는데 처절했다. 물이 다 빠지고 나니 상황은 더 처참했다. 망연자실해 있는 내 손을 남편이 꼭 잡으며 말했다. “여보, 어떻게 늘 좋을 수만 있어? 사업하면서 한두 번은 위기를 겪기 마련이야. 그럴 때 생각을 잘해야 해. 다시 시작하자.” 남편이 어느 때보다 듬직해 보였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비가 그치고 나면 또다시 환한 햇살이 비친다. 먹구름 속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더욱 찬란한 법이다. 이렇듯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들은 비록 작을지라도 행복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나는 쓰레기로 변한 책들을 보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것을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재지변의 위기를 감사함으로 잘 버틴 덕분에 거래처도 점차 늘어났다. 처음 출판사 한 곳으로 시작한 회사는 당시 5개 출판사의 총판을 맡고 있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서울 방배동에 사옥을 지었다. 남편은 회사 일에만 전념하고 사옥 짓는 일은 내가 담당했다. 그때가 1993년이었다. 건축을 시작한지 7개월 만에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건물을 번듯하게 완공할 수 있었다. 사옥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주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공들여 지은 사옥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당장 건물을 헐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재건축조합과 보상 협의가 잘되지 않으면 아파트 건설사인 대기업과 힘겨운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찮을 게 뻔했다.
나는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인간적인 생각은 다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겼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고도, 10원 하나 손해 보지 않고 제대로 보상받았다. 그리고 1996년 봉천동에 지하 2층, 지상 5층짜리 새 사옥을 마련했다. 보상금으로 부족한 금액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 그런데 이 건물과 관련해 자금출처가 의심스럽다며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하지만 오랫동안 예식장과 남편 회사에서 회계 일을 맡았던 나는 영수증을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보상금 내역과 은행 대출 서류 등 뭐 하나 빠진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 푼의 세금도 추징당하지 않았다. 신앙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살아온 내 삶의 원칙들은 어려운 순간마다 힘이 돼 줬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8> 늦게 공부 시작했지만 지난해 박사학위 받아
34세에 대학 들어가 회사 경영 공부, 힘들 때마다 기도와 간구로 이겨내
2015년 2월 안양대 경영행정대학원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논문을 지도해준 교수들과 함께한 김정란 권사. 왼쪽부터 김상조 교수, 남편 정용주 안수집사, 김 권사, 최천규 교수.회사에서 대림대학으로 강의하러 가는 길은 30분 남짓.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강의를 통해 학생들이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가는 시간이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이 어떤 이들에겐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벅찬 감동이다.
남편과 열심히 일한 덕분에 회사는 건실하게 성장했다. 사업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전문적으로 경영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때 문득 잊고 있었던 나의 꿈이 떠올랐다. 결혼하고 사업에 몰두하느라 잊고 있었던 배움에 대한 소망. 남편에게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은 적극 지지해 줬다.
마침 사회적으로 경력을 쌓은 사람에게 대학 입학 자격을 주는 특별전형으로 대림대학에 입학했다. ‘93학번 김정란.’ 그때 내 나이 34세였다. 감개무량했다. 공부를 하겠다며 17세에 단돈 100원을 들고 고향을 떠나왔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결석이나 지각 한 번 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받은 장학금은 어려운 학우들을 위해 다시 내놓기도 했다.
졸업 후엔 안양대학교에 편입시험을 봤다. 2명 모집에 75명이 응시했는데 당당히 합격했다. 회사일과 병행해도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힘든 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상명대 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2006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대림대에서 ‘회계학 원리’에 대한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20년 동안 회계 관련 업무를 담당해온 현장 경험을 학교 측에서 높이 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강의 요청을 받고 보니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당신은 할 수 있어. 한 번 열심히 해봐”라며 응원해준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강의 준비에 들어갔다. 고향 후배인 경희대 행정학과 김태영 교수의 자문을 받았고, 하루 6시간 넘도록 공부했다. 그리고 나의 현장 경험을 살려 회계학 원리에 관한 교재를 완성했다. 남들 앞에서 강의나 강연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백지연 전 아나운서가 하는 스피치 교실을 찾아가 자신감 있게 알고 있는 것을 전달하는 방법도 배웠다.
사람이 스스로 할 일을 다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혜가 없으면 이룰 수 없는 법.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했다. 혹시 부족한 점은 없는지를 돌아봤다.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이 떠올랐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말씀과 기도로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마침내 학생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그렇게 모교에서 강의한지도 벌써 10년이 됐다.
학생들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나는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기왕 시작했으니 박사과정을 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을 밟은지 5년만인 2015년 2월 10일 안양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에게 배움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이다. 어느 한순간도 그 관문을 쉽게 통과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힘들게 통과하는 그 관문 역시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나의 길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잘 이겨내면 된다. 견딤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로 보상해 주신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9> 회사에 재정 위기 …“남편·신용 지키자” 최선의 선택
출판사에 빌려준 백지어음 부도… “남편 실수 용서하라” 하나님 음성
2013년 여름 케냐 단기선교 현장에서 남편 정용주 온누리교회 안수집사와 함께한 김정란 권사. 2005년 어음사건 이후 부부는 교회 공동체 및 선교 사역에 힘쓰고 있다.2005년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보살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당시는 참고서 시장이 호황을 누리던 때로 B출판사는 연간 수십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경쟁사인 A출판사에서 가정 학습지를 개발해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B출판사도 이에 도전장을 내고 단시간에 급성장했다. 그러자 B출판사 사장은 비생산적인 일에까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업할 때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면 쉽게 돈을 잃을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B출판사가 자금난에 시달린다는 소문과 함께 곧 부도가 날 것이라는 얘기가 업계에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B출판사의 부장이 술자리를 마련하고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워낙 착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남편은 부장의 다급한 소리에 백지어음을 덜컥 빌려줬다. 그리고 얼마 후 사건이 터졌다. B출판사는 남편에게 한 것처럼 여기저기 총판에서 어음을 빌려 모두 할인을 한 다음 부도를 내버린 것이다. 그 일로 우리 회사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선 어음과 빌려준 백지어음을 합쳐 최종적으로 결제해야 할 금액이 10억원을 넘었다. 당장 돌아오는 어음들을 막지 못하면 회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상황이었다.
잘 아는 변호사를 찾아가 이 일을 의논했다. 변호사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 방법은 남편을 고소하는 겁니다. 사모님이 대표이사인 상태에서 회사 어음을 허락도 없이 남에게 줬으니 고소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나는 서류상 대표이사였고, 남편은 영업 파트를 담당하며 대외적으로 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남편을 고소하면 돌아오는 어음을 막을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혼을 감수해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부도를 내는 겁니다.” 사업에서 신용은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이 방법을 택하면 사업을 재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 못하겠으면 세 번째 방법은 어음이 돌아올 때마다 결제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기도로 지혜를 간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세 번째 방법. 남편과 이혼하고 사업가로서의 신용을 저버리는 것은 돈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그것을 원치 않으실 게 분명하다. 나는 남편과 신용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눈만 마주치면 큰소리로 싸웠다. 서로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으며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남편은 자책하며 술을 마셨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남편을 미워하는 내 마음은 이미 지옥이었다.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새벽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분명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딸아, 네게 지금까지 많은 물질과 사랑을 주었건만 너는 남편의 작은 실수로 그토록 마음 아파하느냐. 다 내려놓아라. 남편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누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남편의 피폐해진 얼굴이었다. 긍휼한 마음이 생겼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역경의 열매] 김정란 <10> ‘주님께 하듯 남편 대하자’ 행복 찾아와
예수제자학교 6개월 다니며 변화… 남편도 아버지학교 통해 거듭나
김정란 권사 부부가 속한 온누리교회 양재성전 순모임에서 남편 정용주 안수집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모임을 인도하고 있다.남편이 잃은 돈은 원래부터 없던 돈이었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물질과 사랑을 주었다, 다 내려놓아라, 남편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누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남편을 깨워 차를 몰고 한적한 곳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 갈등을 빚으며 산지도 한 달이 지났다. 차를 타고 가면서 모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문득 “당신 차를 바꾸는 건 어떨까?”라고 물었다. 물론 그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차를 바꾸고 싶어 하던 남편의 말이 떠올라 제안한 것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 우리 부부에겐 뭔가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나의 제안에 남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매달 돌아오는 어음은 살고 있던 서울 방배동의 아파트를 처분해 만기가 돼 돌아온 어음부터 결제해 나가는 방법으로 해결해갔다. 부족한 부분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갚아나갔다. 그러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주님께 하듯 남편을 대하자. 일절 남편에게 어음과 관련해 묻지 말자. 모든 걸 감당해나가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강하고 담대하게 모든 걸 감당하니 거짓말처럼 행복이 찾아왔다.
그 무렵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에서 예수제자학교가 개설돼 학생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주저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접수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나도 인간인지라, 아주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음에 병으로 남을 것 같았다. 주님만 바라보고 갈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6개월 코스의 예수제자학교를 마쳤을 때 가장 큰 변화는 남편을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남편 역시 교회 공동체 순모임 활동과 아버지학교를 통해 거듭났다.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와 테니스를 끊고 교회사역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뒀다.
요즘 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무회계를 강의하면서 어음의 회계처리와 어음의 종류, 어음의 할인·부도 등에 대해 가르치기도 한다. 어음에 대해 강의할 때면 남편 이야기를 꼭 한다. 그러면서 변호사가 말했던 세 가지 방법을 예로 들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첫 번째 방법인 이혼을 택한다. 하지만 남편과 신용을 택한 나의 결단을 들려주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우수천석(雨垂穿石)이라는 말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라는 뜻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적극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의미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한 번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느냐 하는 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 두려울 게 없다. 주님과 좀 더 친밀해지는 시간들을 통해 우리 부부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처한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자세에 있다.
***[역경의 열매] 김정란 <11> ‘부도 위기’ 겪고나서 나눔과 봉사의 기쁨 발견
케냐 등서 해외봉사로 섬김 실천 “어려운 학생 돕자” 장학금 내놔
김정란 권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스리랑카의 현지 교회에서 팀원들과 함께 찬양율동을 선보이고 있다.부도 위기를 겪으면서 삶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새로운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섬기는 리더십을 통한 나눔과 봉사의 삶이었다.
남편과 관계 개선을 위해 참여했던 온누리교회 예수제자학교의 6개월 훈련을 통해 나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섬기는 리더십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훈련을 마치면서 스리랑카 아웃리치팀 ‘팀종’으로 사역을 떠났다. 팀종은 아웃리치 팀의 리더다. 팀장이 아닌, 종이 되어 섬기라는 의미로 팀종이다.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서 9시간을 달려 도착한 자푸나라는 곳은 오랜 내전으로 고통을 겪는 지역이었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만났다. 살림이라곤 다 찌그러진 냄비 한두 개, 맨바닥에서 자며 겨우 죽만 끓여먹고 있었다. 식량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새 정이 들어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10박11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예수님의 큰 사랑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애쓰고 힘쓰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2012년엔 교육과 의료, 보건 등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 케냐의 해안 마을에 선교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이번엔 남편과 함께였다. 6개월 동안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움페케토니아 진료소에서 의료진을 도와 봉사활동을 펼쳤다. 진료현장은 신발을 신지 않고 땡볕에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뜨거운 태양으로 얼굴이 심하게 상한 여인, 눈에 파리가 달라붙어도 쫓아낼 생각을 못하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 발에 못이 박힌 아이, 귀지로 귀가 꽉 막힌 아이, 머리가 부스럼으로 뒤덮인 남자, 이가 다 썩어 뽑아야 하는 남자, 에이즈 환자…. 의료진을 비롯한 봉사자들은 ‘예수님 대하듯’ 환자들을 성심으로 돌봤다. 감동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선교와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어릴 때 부자 되기를 소망했다. 내가 가진 작은 힘으로 타인을 돕고, 행복을 나누는 것을 꿈꿨다. 막연하게 키운 꿈이었지만 남편과 회사를 설립하고 차츰 안정을 찾으면서 그 일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모교인 대림대와 안양대에 장학금을 내놓은 게 첫 열매였다. 나처럼 공부를 하고 싶어도 형편 때문에 못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언젠가는 ‘푸른언덕 장학재단’을 설립해 더 많은 학생들을 후원하고 싶다.
외국인 유학생들과 선교사님, 시각장애인 전도사님, 고엽제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역 역시 오랫동안 해온 일이다. 나눔과 봉사는 경제적 여유나 물질적 형편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보낸 후원이 타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행동으로 옮겨야하지 않을까.
***[역경의 열매] 김정란 <12·끝> “인생 2모작은 은혜와 감사를 나누며 살기로”
신앙으로 모인 여성CEO 포럼 조직…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 되고자 노력
김정란 권사가 청계산 입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외 명품 도자기 전시장을 겸한 카페 ‘푸른언덕’ 앞에서 촬영한 모습.50여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니 나는 참 바쁘게 살아왔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삶을 거의 20년 넘게 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디 여행 좀 다녀오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딸과 함께 우연히 떠난 유럽 여행길에서 새로운 문화 체험을 했다. 작은 식당에서 저렴한 음식을 주문했는데, 예쁜 그릇에 음식이 담겨져 나오는 순간 내 눈이 황홀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작은 그릇 하나에도 이렇게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구나.’
식탁은 단순히 음식만이 오가는 자리가 아니다.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정을 싹틔울 수 있는 공간이다. 식탁이 아름답다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그 뒤로 여행을 다니면서 예쁜 그릇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연스레 도자기 사업으로 이어졌다.
청계산 옛골 입구에 허름한 식당 건물을 매입해 1층은 유럽풍의 카페로, 2층은 해외 명품 도자기 전시·판매장으로 꾸며 2011년 ‘푸른언덕’을 오픈했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산 밑에 가서 고급 도자기 그릇을 사겠나”라며 말렸지만 나는 건강을 위해 등산하는 중년 여성들, 교외로 여가를 즐기는 이들이 주 고객층이 될 거라는 역발상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이 같은 예상은 적중했다. 아름다운 식탁을 콘셉트로 한 전시장의 모습에 고객들은 만족해했다. 차와 케이크는 서비스. 다시 오고 싶은 공간으로 푸른언덕은 입소문이 나면서 첫해는 1억원 정도의 매출 실적을 거뒀고, 4년이 흐른 지금은 매출이 10배 이상 성장했다.
나는 지금껏 가정주부, 사업가, 대학 겸임교수, 교회 봉사자 등으로 바쁘게 살면서도 불평 한마디 않고 성실하게 잘 감당해왔다고 자부한다. 2015년 7월엔 중소기업청장으로부터 ‘2015년 여성기업 유공자 포상식’에서 모범여성 기업인상도 받았다. 물론 상을 받기 위해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요즘은 ‘인생 2모작 시대’라고 한다. 나에게 1모작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게 된 때다. 2모작은 이렇게 받은 은혜와 감사를 더 많은 이웃들에게 나누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2014년 11월엔 ‘국민일보 기독여성 리더스포럼’의 회장직도 맡은 게 아닌가 싶다. 신앙으로 모인 여성 CEO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살펴보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최근엔 그 사역들을 좀 더 조직적으로 해보자며 ㈔국민여성리더스포럼을 세워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기업의 이익이나 매출 향상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신실한 신앙인이요, 기도하는 어머니로서 사는 게 더 중요하다. 리더스포럼을 통해 한부모 가정, 미혼모, 소년소녀가장들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다.
이번에 역경의 열매를 연재하면서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사후도에 대학생 신분으로 봉사활동을 오셔서 평생 멘토가 돼주신 임영철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향기로운 글 잘 읽었다’며 격려해주셨다. 이분들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어둡고 험한 길이라도 잘 헤쳐 걸어올 수 있었다. 이젠 받은 그 사랑을 더 많은 분들과 나누며 살겠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