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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산업혁명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처럼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단지 면직물 생산에 몇 가지 기술적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1780년을 전후해서 인간의 경제적 상황에 일어난 변화가 석기시대의 수렵인이 농경을 시작한 일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럽인들은 인도산 면직물을 캘리코라 불렀는데 이는 바스코 다 가마가 처음으로 도착한 캘리컷과 코튼의 합성어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660년 이후 캘리코 수입으로 번창했지만 이로 인해 영국의 은(銀)이 다량 유출되고 국내의 모직물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캘리코 수입을 금지하라는 요구가 빗발쳐 1700년에 캘리코수입금지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로비로 염색하지 않은 흰색 천은 제외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흰색 천과 염료를 함께 수입해서 영국의 염색 산업이 발전했고 인도산 면직물 수입은 계속 증가했다.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
인도산 면직물 수입에 대한 반대가 고조되자 유대인들은 면화를 수입해서 면직물을 생산할 방도를 강구했다. 인도는 자체의 수요가 많아서 면화를 수출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는 이집트에서 면화를 수입했다.
수공업자들의 길드조합은 유대인을 배척했으므로 다른 생산 경로를 찾아야 했다. 유대인들은 농가에 면화를 공급하고 실을 뽑아 천을 짜도록 시킨 뒤 노임을 지불하고 완성된 천을 회수했다. 이런 생산 방식을 선대제(先貸制) 가내수공업이라 한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생산을 독점해온 길드가 무력화되었다.
영국의 선대제 가내수공업
선대제 가내수공업에서는 농민들이 납품 기한을 넘기기 일쑤였다. 이에 일꾼을 고용하여 일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사업주의 관리 하에 작업을 진행하는 공장제 수공업이 시작되었다. 이를 매뉴팩처(manufacture)라 한다.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쳐
영국동인도회사는 1680년대에 모병권과 교전권을 부여받아 현지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영국은 1740년대부터 인도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였고 1757년의 플라시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은 1763년의 파리조약으로 인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낸데 이어서 1764년에 벵골의 토착 세력을 대파하고 1765년 알라하바드 조약으로 벵골 지역의 징세권을 확보했다. 종전에는 수입 대금을 은으로 지불했지만 이때부터는 징수한 세금으로 지불해서 사실상 공짜로 취득했다. 동인도회사는 본국에 벵골산 면화를 대량 공급했다.
분홍색 - 영국동인도회사 세력권
노란색 - 힌두교 세력권
녹색 - 이슬람 세력권
면화가 대량으로 들어오자 면화에서 실을 빨리 뽑아야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1767년 제니방적기가 발명되었고 1769년에는 더 빠른 수력방적기가 발명되었다. 1779년에 양쪽의 장점을 결합한 뮬(mule) 방적기가 발명되어 물레보다 200배나 많은 실을 뽑아냈다. 실이 대량으로 공급되어 이번에는 천 짜는 속도가 느린 것이 문제되자 카트라이트가 1784년에 옷감 짜는 직조기를 발명하고 이어서 1790년에는 직조기에 증기기관을 도입했다.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발명했다는 속설과는 달리 사실은 지하 탄광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1712년에 발명한 증기기관을 1776년에 와트가 혁신적으로 개량한 것이다. 와트가 사업가로 성공해서 유명해졌기 때문에 모든 공로가 그에게 돌아갔다. 전력의 단위를 W로 쓰고 와트라고 읽는 것은 제임스 와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라 한다.
증기기관 도입으로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에 100%의 관세를 부과하여 수입을 억제했고 인도에 수입되는 영국산 면직물에는 2% 미만의 관세를 부과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은 숙련된 인도인 기술자들의 손가락을 잘랐다. 수출 촉진을 위해 1813년에 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독점권을 폐지했다. 기계화로 값이 저렴해진 영국산 면직물은 인도 시장을 급속도로 잠식했다. 영국동인도회사는 벵골 정복 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을 정복하는 등 1805년에 이미 인도의 절반을 지배했고 이어서 마라타 왕국을 분쇄하여 1830년대에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인간생활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한 산업혁명에 관하여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산업혁명이 유대인에 의하여 유발되고 또 촉진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필자가 알기로는 홍익희 씨가 처음인 것 같다. 그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선대제(先貸制) 가내수공업을 통해 수공업자 길드를 무너트린 일인데 이로써 생산 기술의 창조적 발명과 개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명예혁명 후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 자본인데 이 때문에 신기술 도입을 위한 대규모 설비투자가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유대인이 창안한 금융 및 화폐 시스템을 덧붙이고 싶다. 유대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특이한 금융 기법으로 그 효과를 수십 배 부풀렸다. 잉글랜드은행 설립 후 영국에 도입된 화폐제도는 금을 기반으로 한 은행권 제도였다. 금본위제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금은이 주조된 형태로 유통되는 화폐제도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조된 금화와 은화 자체가 통용되는 주조화폐제는 화폐 발행량이 실제 금은 보유량을 초과할 수 없다. 통화량을 늘리고자 금화와 은화의 순도를 낮추면 금새 탄로 나서 실패하게 마련이다. 고대 로마제국이 이런 방법을 썼다가 화폐경제가 무너져 물물교환 경제로 추락했다.
영국식 금본위제에서는 이론상 은행권 발행량이 은행의 금보유량을 초과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은 은행권이 발행되었다. 정확한 실태는 은행이 파산해야 드러났는데 대부분 50배가 넘었고 100배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담보 없이 지폐를 남발하면 가치가 폭락하여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법이지만 이런 결과를 방지한 것이 유대인의 탁월한 능력이라 할 것이다.
영국은 유대인이 도입한 금본위제 덕분에 수월하게 자금을 조달하여 18세기 내내 거듭된 전쟁에서 프랑스를 제압했다. 산업혁명 초기에도 영국은 또다시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상대로 1793년부터 1815년까지 장기전을 수행하고 또 승리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종전과는 달리 영국 정부의 세금과 채무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증가했다.(참조; 영국의 전시 지출과 수입) 이것으로 보아도 아직은 금융의 힘이 영국을 뒷받침했으며 영국이 유럽의 주요 국가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월등하게 부강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대국의 흥망’에서 폴 케네디가 제시한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상대적 구성비를 보면 1750년에 영국은 1.9%로 4.0%인 프랑스의 절반에 불과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직후인 1800년 영국은 4.3%로 크게 증가했지만 4.2%인 프랑스를 이제야 따라 잡은 셈이었다. 영국은 특별하게 부유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비교적 활발한 화폐경제와 특유의 금융 시스템 덕분에 산업혁명 초기 혁신적인 생산설비에 대규모 투자가 용이했던 것이다.
영국이 경제적으로 유럽의 열강들을 따돌리고 독주한 것은 1815년 이후였고 가장 큰 희생자는 인도였다. 인도의 영국산 면직물 수입은 1814년 100만 야드에서 1830년에는 5,100만 야드로 증가했고 1870년에는 약 10억 야드로 증가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완전히 몰락하고 인도인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다.
식민지 시대 인도인의 참상
1880년에 영국의 세계적 지위는 절정에 달했다.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상대적 구성비를 보면 영국은 1750년 1.9%에서 1830년 9.5%, 1880년 22.9%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에 인도는 24.5%에서 17.6%를 거쳐 2.8%로 하락했다. 이것으로 인도 경제의 파탄이 한눈에 드러난다. 1880년 이후 미국과 독일의 급성장으로 영국의 지위가 하락해서 1900년에 미국 23.6%, 영국 18.5%, 독일 13.2%였고 인도는 1.7%였다.
영국에서 면직물 제조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유대인이고 대규모 설비투자로 면직물 생산과정을 기계화한 것도 유대인이며 면직물 무역을 장악한 것도 유대인이니 산업혁명의 가장 큰 수혜자가 유대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유대인은 영국의 산업과 경제력을 장악하였다.
인도인들은 종교적으로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으로 분열되고 지역적으로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할거하여 서로 적대하면서 때로는 영국과 협력했다. 수십 개 종족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도에는 공통된 민족의식이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인도인들이 동인도회사의 군대에 용병으로 입대하여 급료를 받고 복무했다. 이들을 세포이라 불렀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의 전성기에 30만 명의 병력 가운데 약 96%가 세포이였다.
1857년 4월부터 1858년 7월까지 계속된 세포이 항쟁에는 명색만 남아있던 무굴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인도의 봉건 귀족계급과 지주계급에 농민들까지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반영투쟁이 인도 북부를 휩쓸었다. 이때에도 광범위한 지역이 영국에 충성했다. 영국은 인도인의 봉기를 진압한 뒤 무굴제국의 황제를 버마로 추방했다. 또한 동인도회사의 통치권을 박탈하고 본국 정부에서 직접 관할했다. 1874년에는 동인도회사가 해산되었고 187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새로 창설된 영국령 인도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면직물 산업에서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화를 비롯한 원료, 기계, 철강, 해운, 철도 등으로 파급되었다. 영국의 인구는 1801년 1,050만에서 1911년에는 4,180만으로 증가했다. 산업혁명은 미국과 아프리카의 역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19세기에 들어와 영국에 면화를 공급하기 위해 미국 남부에 대규모 면화농장이 출현했고 아프리카인들이 대량으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다. 1860년 미국의 인구조사에서 미국인 40만 명이 400만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도의 물레 작업
제니방적기
아크라이트 수력방적기
카트라이트 직조기
제임스 와트의 초기 증기기관
산업혁명 초기의 면방직 공장
산업혁명 초기 방적공장의 어린이 노동
1807년 프랑스제국의 영토
나폴레옹전쟁의 과정
1812년 유럽의 형세
1815년 비엔나조약의 유럽 형세
1815년 영국의 판도
영국의 인도지배 확대 - 분홍색
영국의 마이소르 왕국 정복
세포이 항쟁 1857~58
영국령 인도제국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무렵 모습
첫댓글 흥미진진합니다. 당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할 때 애석함과 아쉬움도.
이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