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때문에
박헬레나
뜨겁다. 연일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한 달째 계속이다. 태양열을 일정양만 머금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보내도록 자연 설정된 지구가 이성을 잃었나, 끝없는 편리를 추구하며 ‘오직 나’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욕망에 백기를 든 것인가, 더위를 피해 하던 일을 접고 모두 어딘가로 보따리를 싼다.
도심이 텅 비어도 뱃속까지 비워 둘 수는 없는 일, 이 염천에 불 앞에서 조리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은 땀범벅이 된다. 이런 때 바깥에서 밥 한 끼 해결해 주는 것은 부엌 꾼에게 베푸는 적선이다. 하여 남편이 외식하는 날은 나의 해방 절이다.
냉장고에서 밑반찬 몇 가지 꺼내 놓은 저녁 식탁이 썰렁하다. 가 닿을 곳이 마땅찮아 손에 든 젓가락이 허공에서 헤맨다. 한 사람의 부재와 나의 일탈 욕구가 식탁에 나타난 결과다. 손톱만 한 틈새만 보여도 궤도를 벗어나 여유를 누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 아닌가.
과부가 식은 밥에 곯아 죽는다는 옛말이 있다. 여자는 누군가 맛나게 먹어줄 사람이 있어야 주방에 들어가서 음식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결국, 누구를 위하여, 마지못해 누구‘때문에’라는 동기부여라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란 뜻이다. 그만큼 조리는 주재료와 부재료, 각 재료의 양과 순서와 시간이 맞아떨어져야 제맛을 내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거기에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은 고도의 정확도를 요구한다.
주방에서 평생을 보냈다. 대가족 속의 하루 세끼 밥상 차림은 나를 종일 부엌에 묶어 놓았다. 더구나 어른 진지상은 시간에 맞춰 격식을 갖추어 차려내야 하는 매일의 과제였다. 찬 한 접시 마련하자면 재료 구입부터 식탁에 오르기까지 대여섯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마다 않고 일식오찬(一食五饌) 마련은 주부인 나의 최소한의 예의이자 자존심이었다.
밥상과 끝없는 전쟁은 초보 주부인 나를 앞이 보이지 않는 아뜩한 세계로 몰아갔다. 시시포스의 돌처럼 끊임없이 굴러오는 일상의 반복, 숨이 턱에 차면 견딜힘이 한계에 이른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치면 내 몸은 채에 맞은 팽이 돌 듯 돌아갔다.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그럴 때마다 인간의 능력 또한 바닥이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 순간의 나를 누군가는 ‘손님만 오면 그렇게 신바람이 나냐?’고 놀려대곤 했다.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린 어릿광대, 내가 밥이 되고 광대가 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예우이자 상호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나의 역할에 대한 의무감이지 결코 가면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는 원인 제공자에게 원망이 돌아갔다. 인격이라는 이름 아래 밑바닥에 조신하게 눌려있던 본성이 그럴 때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원인 제공자라고 해봐야 내 밥상의 수혜자는 가족 아니면 끝없이 이어지는 손님이었으니 그건 아니었다. 화살은 늘 엉뚱한 데로 날아갔다. 호랑이 굴에 나를 업어다 놓은 남편 당신 때문이라고.
‘때문에’는 앞의 말이 뒤에 오는 말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내는 어휘다. 일종의 핑계이자 자기변명이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책임 전가의 뜻도 품고 있다. 감정이 격해지면 원망을 얹어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 여러 가지를 다 함의하고 있는 것이 나의 ‘때문에’다.
‘때문에’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이가 가까이 있는 사람, 바로 옆지기다. 왜 모든 화살이 한 방향을 향하여 날아가는가. 만사에 현상을 거슬러 뿌리까지 내려가 원인을 캐고자 하는 나의 고약한 성미 때문이다.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나아갈 길을 도모하는 것이 순리이거늘 걸핏하면 시작점을 들먹이며 시간과 감정을 소모한다.
번거롭긴 하지만 뜨거운 여름철이 아니면 음식 만드는 일도 매력 있는 구석이 있다. 조리도 하나의 예술이다. 몇 가지 재료와 양념이 어우러져 한 가지 요리로 탄생하여 쟁반에 우아하게 담겨 질 때 그 맛과 멋에 스스로 감탄하기도 한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는 식구들을 볼 때 수고의 보람도 느낀다. 알게 모르게 나는 그렇게 밥쟁이로 길이 잡혀갔다.
한때 대문 열어놓은 집이 누구나 오면 밥 먹는 집, 밥솥 열어놓은 집이기도 했다. 꽃이 피고 알곡이 여물며 많은 일이 일어나고 또 지나갔다. 시나브로 식구도 줄어 한창때에 비견하면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다. 아직도 세끼 밥상을 면치 못하고 있긴 하나 내 생애에 이만큼 호사스러운 때가 있었던가. 그럼에도 삼식서방님 식사수발이 내 발목을 잡을 때는 가끔 ‘때문에’를 들먹이기도 한다. 그만 일에 푸념이 나오는 것은 내 삶이 다소 느슨해졌다는 의미다.
한 끼를 설치고 나니 밥을 먹은 듯 만 듯 속이 허허하다. 이 허기, 혼밥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밥은 몸을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다. 생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힘, 먹지 않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산다는 일이 그토록 절박하겠는가. 다만 어우러져 먹어야 제구실하는 것이 밥이다.
돌아보면 지난날 밥 같이 먹은 모두가 은인이다. 그들로 인해 다양한 식재료의 음식, 몸을 고달프게 하는 노동, 시간 맞춘 식사를 내가 제공 받았다. 그 모두가 오늘 내 건강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그들 ‘때문에’가 아니고 그분들 ‘덕분에’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이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나의 ‘때문에’가 ‘덕분에’로 옷을 갈아입는 데는 시간이 그보다 조금 더 걸렸다.
(《수필문예》 제19집, 2020.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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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에세이문학》완료 추천. 《부산일보》수필문예회,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작가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여성문인회, 카톨릭문인회, 수미문학회 회원
대구시문예대전 대상, 제3회 수필문예회 작품상, 현대수필문학상,
대구문인협회 수필부문 올해작품상 수상.
수필집 《바람 부는 날에》 《꽃이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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