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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 박연의 얼이서린 月伊山
- 위 치 : 충북 영동군 심천면, 옥천군 이원면
- 높 이 : 551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5. 9. 3. 06:30
2. 나 들 목 : 옥계폭포주차장
3. 참석인원 : 23 명 (처음나오신 분 1명)
4. 트레킹코스 : 옥계폭포주차장-옥계폭포-정자각(돌탑3기)-정상-갈림길-일지명상센터-옥계폭포주차장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옥계폭포주차장
▶ 거리 및 소요시간 : 다음지도 255,7km/ 03:06, Tmap 261,9km/02:48, 울레내비 262km/02:51
- 다녀온 길 : 중앙고속도로만종JC - 영동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 옥천IC – 향수공원삼거리 – 옥천역삼거리 – 이화휴게소 – 옥계폭포길 - 옥게폭포주차장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30 이 훈 웅
6. 날씨상항
◆ 기상전망
- 2015년 08월 30일 일요일 06:00 발표 대전ㆍ세종ㆍ충청남도지역 기상전망은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어 구름 많겠고, 대기불안정으로 소나기가 오는 곳이 있겠다고 전망하였다. 기온은 평년(최저기온: 15~20도, 최고기온: 26~29도)과 비슷하겠으며 강수량은 평년(강수량: 4~9mm)보다 적겠다고 하였으므로 산행환경은 이상 없음이었다.
◆ 오늘의 날씨
7. 활동상황
○ 06:30 --- KBS춘천방송국 앞 출발(여주휴게소 경유)
○ 09:24 --- 천국사, 옥계폭포주차장 도착
○ 09:32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09:34 --- 들머리진입
○ 09:44 --- 옥계폭포표석
○ 09:49 --- 옥계정, 옥계폭포
○ 11:32 --- 449봉, 정자각, 돌탑3기
○ 12:23 --- 월이산 정상
○ 12:50 --- 점심식사
○ 13:25 --- 하산
○ 14:12 --- 일지도예공방
○ 14:15--- 일지명상센터천화원
○ 14:26 --- 공사장
○ 14:28 --- 등산로, 일지명상센터 갈림길
○ 14:38 --- 옥계폭포
○ 14:56 --- 옥계폭포주차장
○ 15:04 --- 하산행사
○ 14:05 --- KBS춘천방송국 앞 도착(신탄진, 여주, 홍천강휴게소 경유)
Ⅱ. 오늘 다녀온 지역 살펴보기
<월이산안내도>
1. 지역유래 및 특성
- 심천면은 조선시대에 영동현 서서일면(西西一面)의 상단구리(上丹丘里), 하단구리(下丹丘里), 구탄리(九灘里) 장동리(獐洞里), 고당포리(高塘浦里), 대초지리(大草旨里)와 서이면(西二面)의 마곡리(麻谷里), 지계리(技界里), 남이면의 힘물내(二十川里)지역이다. 1914년 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 령에 따라 서일면과 서이면을 병합하고 남이면의 태소(太沼)와 힘물내의 2개동, 옥천군 이내면(伊內面) 내동(內洞) 일부를 편입시켜 양강천(楊江川)과 송천(松川)이 합류하여 심천(深川)이 되므로 심천면이라 고치고, 단전리(丹田里). 심천리(深川里). 용당리(龍塘里). 초강리(草江里). 고당리(高塘里), 구탄리(九灘里), 장동리(猜洞里), 길현리(吉峴里), 각계리(覺溪里), 약목리(藥沐里), 기호리(耆湖里), 명천리(明川里)등 14개 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였다. 1982년 고당1구와 2구를 고당1구 · 2구 · 3구로 분리하였고, 1984년 심천리를 심천1구와 2구로 분리하여 현재는 14개 법정리에 20개 행정리, 37개의 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지역특성은 영동군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과 송천강이 흐르는 평야지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특수작물 위주의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경부선고속철도, 경부선 및 4번 국도가 관통하는 교통요충지이다. 주요관광지는 옥계폭포, 난계사, 호서루, 국악박물관 및 국악기제작촌 등 관광명소가 많아 년 중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 오늘 나들목인 고당리는 본래 영동현(永同縣) 서서일면 지역으로 조선조 세종(世宗) 때 악성(樂聖) 난계(蘭溪) 박연(朴堧)의 태생지라서 고당(高塘)이라 하였다. 1909년 영동군 서일면(西一面)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고당리, 하고당리, 옥길동(玉吉洞)과 노은동(老隱洞)을 포함 고당리라 하고, 영동군 심천면에 편입하였다. 1982년 1월 1일 고당리1리, 2리, 3리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2. 월이산개요
- 월이산은 순 우리말로 달이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달이 떠오르는 산" 이라는 뜻이다. 산의 형태는 둥근 모양이며 순하고 단아하며 비단폭 같은 금강을 굽어보는 외유내강의 산이다. 정상부근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저 있다. 달이산의 기암괴봉 중 으뜸인 것은 H자의 가로지른 획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암봉이다. 정상에서 507미터의 서봉으로 건너가는 산등성이에 있는 둥근 투구모양의 봉우리가 그 것이다. 남쪽은 높고 아득한 바위 낭떠러지며 동쪽도 밧줄을 잡고 오르도록 되어 있으리만치 높은 바위벽이다. 북쪽과 서쪽도 바위벽이기는 하지만 그리 높지는 않아 오르내릴 만하다. 달이산 최고의 명소는 옥계폭포다. 달이산 줄기와 앞의 국사봉 줄기가 마주칠 듯 맞보고 서있는 사이에 한줄기 시원한 옥계폭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Ⅲ. 오늘일정 중 주요볼거리 살펴보기
<천국사>
-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달이산 옥녀봉을 뒤로하고 있는 천국사는 산 전체를 볼 때 연꽃모양이고, 옥계폭포는 45도의 무릎을 세워 누운 자세의 여인상이고, 앞산은 코끼리머리에 거북이 두 마리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형상이고, 뒷산은 달마상이요 마을 앞 도로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동쪽을 보고 좌선하고 계신 모습이다. 그리고 법당은 산새의 모든 기운을 받은 자리이며 폭포로 가는 곳의 분지에 자리를 마련했다. 주지스님이신 해정스님께서 이 자리에 창건하게 된 동기는 스님께서 기도정진하고 계실 때 꿈에 현몽을 하시길 "항상 너는 천태산에서 금강경을 읽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 중에 지장보살님을 친견하셨고 족자가 하늘에서 풀리면서 암도(岩道)국사천(國寺天)이라고 쓰인 글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이곳 도량을 찾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려 휴양 차 옥계폭포가 좋다는 말만 듣고 오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지금의 천국사의 자리에 아주 잘 지어진 절이 보였다고 한다. 폭포에서 100일기도를 마치고 비닐하우스를 빌려서 생활을 하다가 이 자리를 구입하고 '천국사'라는 사찰 명으로 불사를 시작하였다. 일백만이라는 불사의 원을 세운 동기는 故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영정을 모신 후 49제 준비 중 48일 되는 날 당시 10월 9일 4시경 하루살이가 천국사 도량을 사람이 다닐 수 없을 만큼 수천 수백만 마리가 몰려다녔다. 이 광경을 보신 스님께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호국 영령들의 넋이라고 하시고 지장보살님 백만불 원을 세우시고 1불 1만원에 불사를 시작하였다. 법당 형태는 1층은 사각으로 생, 노, 병, 사를 의미하고 2층 8각은 팔정도를 의미하고 법당외부 상층부에는 15자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부처님을 모셨으며 밑으로 팔각에는 야간에 부처님 몸속에 불을 밝혀 28도리천궁의 어두운 곳을 밝혀 만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현재 불사 중에 있다. 중부권에서 경관이 가장 좋은 옥계폭포가 있으며 성지순례나 방생지로는 최적지이다.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고 대형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도 있다.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보리수나무와 미얀마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패엽경을 친견할 수 있다. 이곳 달이산 옥계폭포 내에 일백만 지장근본도량 불사는 온 우주 모두 불국정토의 씨를 맺고 뿌리가 내려 자손만대 세세생생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으로 온 세상이 평화롭고 하루속히 남북통일이 되길 기원한다는 큰 원을 세웠다.
<옥계폭포>
- 옥계폭포는 영동과 옥천에 걸쳐 산을 이루는 달이산 남쪽 끝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있다. 폭포도 유명하지만 달이산 등산코스도 유명하여 등산객의 발길도 잦은 곳이다. 월이산 등산은 폭포 주변의 협곡을 따라 오르면 월이산 종주코스로 이어진다. 옥계폭포에서 시작하는 월이산 등산코스는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 일대를 두루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금강이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을 휘도는 절경도 함께 한다. 또 갈기산, 천태산, 민주지산 백화산 등 영동의 산이 조망되며 금산의 서대산과 옥천의 대성산이 조되는 곳이기도 하다. 국악의 거성 난계가 즐겨 찾았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옥계폭포는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로 진입하여 천모산 골짜기로 들어서서 산길을 따라 약 1㎞ 전방에 위치한다. 어느 날 옥계폭포(玉溪瀑布)를 찾은 박연(朴堧) 선생은 오색영롱한 폭포수 밑에서 피리를 연주할 때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에 매료되어 선생의 호를 난초의 난(蘭)에 시내 계(溪)를 써 난계(蘭溪)로 지었다 한다. 이곳에는 수많은 시인들이 모여 옥계폭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글을 많이 남긴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3대악성(樂聖)중 한분이신 난계(蘭溪) 박연(朴堧) 선생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하여 박연폭포(朴堧瀑布)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옥계폭포는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무려 20여m 에 이르며 수려한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룬다.
- 난계 박연 선생은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에 삼사좌윤 박천석의 아들로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초명은 연, 자는 탄부이며 호는 난계, 시호는 문헌공으로 1767년 영조 3년 7월에 내려졌고 복야공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태종5년(1405년)인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14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을 역임후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 4년(1458년) 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안채(39m²), 사랑채(21.81m²)를 학술용역을 근거로 생가를 복원하였다.
- 여기서 옥계폭포에 얽힌 전설을 살펴본다. 먼저 옥계폭포(玉溪瀑布)와 파랑새 전설을 소개한다. 영동에서 북쪽으로 국도를 따라 약 12Km 정도 가다 다시 왼쪽 산으로 접어들면 영동 유일의 폭포에 이르게 되는데 이 폭포가 유명한 옥계폭포이다. 옥계폭포(玉溪瀑布)는 이중환(李重煥)의 저 유명한 택리지(擇里志)에도 소개된 폭포이며 일찍이 최남선(崔南善)도 그의 저서에 서 소개했던 폭포인 것이다. 옥계폭포 위쪽에 예저수라는 사각형 바위로 된 못이 있는데 아주 오랜 옛날에 그 연못 속에 용(龍)이 살았다고 전해 온다. 이 연못은 아무리 큰 장마가 져도 흙으로 메워지는 일이 없었으며 어찌나 깊은지 그 깊이를 가늠 할 수가 없었다. 어느 해던가 못의 깊이를 재어 보려고 마을 사람들은 명주실 한 꾸러미를 들고 나와 돌을 달아 집어넣어 보았지만 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못의 구멍이 북쪽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으로 뚫려 있는 것으로 믿게끔 되었다.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어 폭포 위쪽의 예저수 물을 푸게 되었다. 차츰 못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말로만 들어오던 용의 모습이 실제로 못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귀가 집신 크기만 하고 몸길이는 꼬리가 폭포 아래쪽까지 내려갈 정도였고 폭포 위쪽에 척 걸쳐진 용의 머리를 보고 물을 푸던 일꾼들은 기겁을 하여 모두 도망가 버렸다. 용이 사람의 눈에 뜨이자 그 뒤 못은 차츰 메워져서 지금의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옥계폭포 위쪽에 계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어느 해 봄날 한 쌍의 부부가 이 계수나무에다 그네를 매어놓고 놀이를 하다 그만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폭포수 아래로 떨어져서 죽어 버렸다. 그들 부부는 죽어서 한 쌍의 파랑새로 변하였다. 파랑새는 폭포 근처의 아름다운 산수를 잊을 수가 없어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도 매년 봄이 되면 한 쌍의 파랑새가 폭포수 근처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 옥계폭포에 어려 있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폭포도 여자와 남자가(陰 과 陽)있다고 하는데 이 옥계폭포는 여자 즉 음(陰)폭포로 폭포를 바라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언제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폭포가 내리꽂히는 웅덩이 안에 우뚝 솟은 양 바위가 생겨난 것을 마을사람들은 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양 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하여 바위를 옮겨버렸는데 그 이후로 이 마을에는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남자들은 객사를 하거나 사고로 죽음이 이어졌고 마을사람들은 이것이 양 바위를 옮긴 때문으로 여겨 양 바위를 제자리에 본래대로 옮겼고 이렇게 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 뒤로는 마을은 거짓말같이 예전 같은 평안이 찾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난계박물관>
- 난계국악박물관은 난계의 숨결이 서려 있는 국악 전문 박물관이다. 난계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손꼽힌다. 영동에서 태어난 박연은 악보와 악기를 정리한 악서를 편찬하고 대고와 석경 등 아악기를 제작했다. 또, 궁중악을 완성하고 악기를 조율하는 편경을 만드는 등 국악을 발전시키고 완성한 국악의 아버지다. 난계국악박물관 영상실과 난계실에서 난계의 삶과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국악실에는 대금, 나발 등 관악기와 가야금, 해금, 비파 등 현악기 그리고 징, 북, 편종 등 타악기가 종류대로 전시되어 있다. 60여 점이 넘는 다양한 국악기를 만나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민속자료전시실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월북한 국악인들의 녹음 자료와 국악 공연 실황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 등 귀한 자료들이 많다.
Ⅳ. 오늘의 수다
<월이산정상석>
- 금년 8월은 1880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더운 8월이었다고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이 밝힌바 있다. 월간 기상보고서를 통해 지난달 육지와 해수면 평균 기온이 섭씨 16.35도로 20세기 8월 평균 기온 섭씨 15.6도 보다 0.75도 높았다는 것이다. 금년 1∼8월 기간 평균 기온도 기상관측 이후 3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지난여름 가뭄과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는 현실을 지난주 말 벌초하러 고향을 방문하면서 절실히 실감하였다. 본인이 태 버린 동네 이름은 샘 泉자, 고을 洞자를 써서 천동이라 불린다. 우리나라말로 샘골이다. 한마디로 샘이 많은 동네이었다. 샘터 한곳에서 분출되는 물로 30여 가구가 생활용수로 쓰고도 남아 넘쳐났던 곳이다. 한여름 밤이면 남정네와 아낙들이 시차를 두고 번갈아 가면서 목간을 하였고, 한겨울이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빨래터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인영문인지 그 샘이 금년 여름을 나면서 메말랐던 것이다. 동네 간이상수도 수원을 추가로 확보하고자 인근에 지하암반관정을 타설한 것이 주된 원인일 것으로 판단되면서도 영 납득이 가지 않았다. 퇴직 후 귀향하여 샘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그 샘물로 차 다려 마시면서 여생을 보내리라 마음먹기도 했던 곳이기에 그 샘터에 대한 향수를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기후변화와 더불어 생태환경 변화를 직시하면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급변하는 생태환경변화를 실감하면서 “이 세상은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는다.”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문구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오늘의 수다방 문을 연다.
- 영동군 내에 가볼만한 산은 삼도봉, 민주지산, 천태산, 석기봉, 백화산, 각호산, 갈기산, 월류봉 등을 꼽는다. 이중 황간면에 있는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월류봉(月留峯)은 2014. 5. 22 다녀온바 있고 그 외 삼도봉, 민주지산, 천태산 역시 여러해 전에 반복하여 다녀왔다. 오늘 다녀온 영동군 심천면에 있는 월이산은 달 월(月), 저 이(伊) 자를 쓴다. 다른 말로 달이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달이 떠오르는 산”이란 의미를 갖는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인 월류봉과 달이 떠오르는 산인 월이산은 달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월이산은 지난여름 계곡산행일환으로 7. 23 정기산행일정에 잡혀 있었으나 산행환경이 여의치 않아 일정을 취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아쉬움을 달래면서 9 ~ 10월 원. 근거리 정기산행지 안배차원에서 9월 첫 주 정기산행일정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 충북 영동은 곶감과 포도 외에도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하나인 '난계 박연 선생'을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다. 국악에서 우리나라의 '3대 악성'이란 왕산악, 우륵, 박연을 이른다. 왕산악은 고구려 거문고의 대가이다. 진나라의 칠현금을 개조하여 거문고를 제작하였다. 우륵은 가야 말기 가실왕의 주문으로 12현의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 12곡'을 만들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에는 신라에 가야금을 전수했다. 박연은 세종을 도와 음악을 정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한 편경의 제작은 조선 초기의 음악 완비에 많은 기여를 했다. 9월 첫 주 정기산행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 문화 탐방기회가 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으면서 오늘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참석률은 기대치 이하의 수준에 머물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라 09:30경 목적지에 도착하여 늦어도 10:00경 들머리진입을 예상했었는데 30여분 상당 일정을 앞당길 수 있었다. 천국사 앞 옥계폭포주차장은 아스팔트포장이 되어 있었고 주차장 한편에 화장실, 급수전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있을 줄 알았던 월이산등산안내도가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오늘은 산행시간을 4시간30분으로 잡고 14:00까지 주차장 하산을 권고하고 들머리에 들었다.
- 주차장에서 10분 남짓 오르면서 옥계폭포 표석과 옥계폭포상징물이 설치된 옥계폭포광장에 이르렀다. 이 구간에 식당과 카페 등이 있었지만 주중인 관계로 개점휴업 상황이었다. 광장에서 5분 남짓 오르면 월이산등산안내도, 일지명상센터진입안내판, 옥계정이 연이어 나오고 옥계폭포로 이어졌다. 이 지점이 사실상 들머리인 셈이다. 폭포 하류에 석재로 다리와 전망대를 설치하여 조망에 도움을 준다. 금년 여름 마른장마의 영향으로 시원한 물줄기를 볼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나름대로의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 박연폭포라고도 불리는 옥계폭포는 깎아지른 듯 한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무려 20여m 에 이르며 수려한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룬다. 예부터 난계 박연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모여 옥계폭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글을 많이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옥계폭포는 난계가 즐겨 찾아 피리를 불었다는 폭포이다. 장쾌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의 시원한 물소리와 뿜어져 내려오는 물보라가 세찼다. 그 장관에 앞도 되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잠시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였다. 다리와 전망대에서 폭포와 절벽 의 웅장함을 한눈에 보고 있노라니 마치 살아 있는 산수화를 보는 듯하였다.
- 폭포 조망을 마치자마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소나기로 급변하였다. 오늘 아침 확인한 날씨예보에서는 오후 3시경 우산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의외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급기야는 옥계정으로 피신하여 우장을 챙기면서 20여분 상당 머물러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문님을 비롯한 여섯 분께서는 이미 일지명상센터방향으로 서둘러 입산을 마쳤다.
- 옥계정에 머무는 동안 오늘 일정운영상 중대한 우발사안이 발생하고 말았다. 옥계광장을 지나면서 사주, 운명이란 간판을 걸고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앉아있는 남자 한 분을 본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옥계정 한편에 막걸리상을 차려 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 분들께서 옥계폭포를 조망하는 동안 날쌔게 자리를 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 분들께서는 막걸리나 사주. 운명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제발 비만 멈춰주기를 학수고대 했던 것이다. 드디어 세차게 퍼붓던 빗줄기가 가늘어 지면서 비가 멈출 기미를 보였다. 그 무렵 그분께서 “내가 춘천에서 왔다니까 알려주는데, 일지명상센터 방향으로 올라가면 댐 공사 중이기 때문에 출입을 할 수 없어 빙 돌아가야 된다고 하면서 옥계정 맞은편 계곡으로 올라갈 것을 점잖게 권고하였다.” 그 분의 권고대로 옥계정 맞은편으로 진입하기 위해 옥계정 아래 위를 오르내리면서 진로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이었다. 총무님께서 진입로가 어디냐고 재차 물어 본즉 개울 건너 계곡으로 올라가면 폭포도 좋고 훨씬 가깝다는 조언을 재차 주었던 것이다. 현장에 설치된 등산안내도와 오늘 배부한 월이산등산지도를 번갈아 확인하면서 의문을 갖으면서도 그 분의 권고대로 진로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산행을 안내하면서 현장에서 자문을 구할 기회만 있으면 현장에서 입수한 정보를 가장 소중하게 믿어 왔었기 때문에 그 분의 권고를 긴가민가하면서도 한 번 믿어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 10:22 출발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급기야 회장님께서 폭포하류 전망대 옆으로 진로를 개척하면서 앞서 나가셨다. 사람이 발길 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음에도 월이산에 등산로 하나를 새로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GO를 외쳤던 것이다. 일지명상센터 방향으로 앞서 진입한 6명과 현장체험 길에 오른 3명을 제외한 14명 전사들의 빛나는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시작지점부터 길은 없었다. 다만, 미로를 따라 능선 안부에 오르는 것이 급선무이었다. 등산 중 길을 잃으면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진로선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 몸소 체험하였다. 오늘 미로를 찾아 헤매는 동안 2010. 7. 29 영월 비산과 2012. 9. 20 인제 개인산의 산행환경과 비교되면서 비요 우위를 점치기도 하였다.
- 10:44 양천허공만종지묘 경유, 이 구간 능선안부를 지나면서 사람이 발길 한 흔적이 역역한 샛길에 접어들었다. 진로는 숲 사이로 감지해 뒀던 고지 방향이 최우선 목적지이었다. 그 고지 방향을 향해 무조건 오르는 것 외에는 묘안이 있을 수 없었다. 중간 인원파악결과 현장에 머물 예정이었던 세 분이 추가로 합류한 사실을 확인한 후 동행하였다.
- 11:26 “구리포시즌” 안내리본설치지점 능선안부도착, 산악회안내리본을 발견하면서 심봤다! 라는 소리가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산악회 안내리본이 있다는 사실은 정상적인 등산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서 본 궤도에 진입했던 것이다. 옥계정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길이 아닌 곳에 새 길을 내면서 우리 모두의 족적을 남기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해내고 말았다. 비록 길은 없었지만 춘천근교 금병산과 비교될 정도로 착지가 편한 육산이었다는 점과 깔딱 구간이 없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점에서 왼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었다. 진로를 판단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름길에 확인해 뒀던 고지가 진행방향 왼쪽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그 고지를 목적지로 삼고 진로를 왼쪽방향으로 잡았다.
- 11:32분 449봉, 정자각, 돌탑3기 지점 경유, 안내리본설치지점에서 5~6분 정도 오르면서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정자각은 옥계폭포에서 단체기념사진 서비스를 해 줬던 김천에서 온 일행 여섯 분들이 선점하고 점심식사 중이었다. 자진하여 “단체사진 찍어드리겠습니다.” “카메라 좀 주시죠!” 라는 주문에 “막걸리 한 잔 하시죠.” 라는 응답이 서슴없이 터져 나왔다. 우선 막걸리 한 잔에 일명 삼합(삼겹살+홍어회+김치)을 안주삼아 컬컬하던 목을 축이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길 찾느라 혈안이 되어 초췌했던 모습이 본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잃었던 길을 찾은 데다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 회장님을 비롯한 선발 팀은 이미 정자각을 경유하여 하산 길에 올랐고 본인은 돌탑 앞에 잠시 머물면서 후미 일행 분들과 합류하였다. 후미와 동행하신 총무님에게 저는 정자각에서 막걸리 한 사발 얻어 마셨는데 맛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 없는 것 같더니만 이내 작심이라도 한 듯 정자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급기야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아 들고 단숨에 원 샷 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총무님! 이렇게 얼굴이 두껍습니다. 라고 인사말을 건네면서 작별을 고했다.
- 그러나 오늘 두 번째 우발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 지점을 정상으로 착각하고 희열에 도취된 것도 잠시잠깐이었다. 정자각이 있다는 점과 돌탑3기가 나란히 세워져있다는 점에서 정상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그 무렵 미로를 헤매던 중 고문님과의 통화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고문님의 현 위치가 정자각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진로를 잘 못 잡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자각으로 다시 되돌아가 선생님 이 지점까지 올라오면서 정자각이 또 있던가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응답은 경상도사나이답게 없습니다. 이었다. 그렇다면 이 지점이 오늘 사용한 등산지도상에 표기된 449봉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회장님을 필두로 먼저 내려가신 분들의 행적이었다. 회장님! 진로를 잘 못 잡았습니다. 저희는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갑니다. 란 긴급무선호출을 보냈지만 응답은 현 위치에서 그냥 하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정상방향으로 발길들 돌렸다.
- 12:00를 넘기면서 소낙비를 만났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 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비닐우비에서 타고 흐른 물줄기에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 신발로 스며들기 직전에 멈추는 바람에 휴 ~~~ 살았다. 라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5분정도만 더 내렸더라면 신발에 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오후 3시경 내려야 할 비가 오전에 두 번 내렸으니 이제 오늘 내려야 할 비는 다 왔지 싶었다.
- 12:33 월이산 정상도착, 정상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신 고문님을 비롯한 선발 팀 두 분과 합류하였다. 정상 헬기장에서 후미 일행 분들을 기다리는 동안 449봉 정자각에서 이산가족 되었던 회장님을 비롯한 일행 분들 중 선발 팀 몇 분이 먼저 도착하여 상봉의 기쁨을 나눴다. 449봉에서 무선교신 내용을 되돌아 올라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전갈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려 35분 정도를 소요하셨다고 하시면서 되돌아 올라오는 과정에서 겪으신 무용담을 털어놓으셨다. 정상에는 해발 551m를 안내하는 정상석과 헬기장이 있다. 정상석 받침돌에 숯가마골(원동리) 1,5km, 옥계폭포 3km 이정이 새겨져 있어 진행방향을 안내한다. 정상석 뒷면에 “이 표지석은 2011년 9월 1일 산림청 헬기의 도움으로 이곳에 옮겨왔음” 이란 문구가 새겨있다. 정상 정점에 묘가 선점하고 있어 정상석과 헬기장이 이를 비켜 앉은 점이 특이하였다.
-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월이산은 산세가 달처럼 둥근 모양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정상 서쪽에 투구처럼 생긴 투구봉과 서봉(507m)이 있고 남쪽 산등성이 아래로는 높이 20m의 옥계폭포로 이어진다. 정상에 오르면 산을 병풍삼아 S자로 휘어져 흐르는 금강이 보이고 멀리 서쪽으로 금강철교·서대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서봉으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있는 투구봉에서는 밧줄을 잡고 암봉을 오르는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였지만 오늘은 아니올시다. 이었다. 조선시대에 영동의 박달산과 대전의 계족산 봉수대를 중계하던 봉수대 터가 정상에 남아 있다고 하였지만 찾아 볼 수 없었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산을 병풍삼아 S자로 휘어져 흐르는 비단폭 같은 금강과 금강철교가보이고, 이원 부지와 대성산, 서대산, 장용산 과 옥천읍 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 13:25 하산길에 올랐다. 정상 헬기장 안부가 점심식사장소로 안성맞춤이었지만 정상 바로 아래 하산길목 그늘에 자리를 펴고 점쟁이의 황당한 권고를 믿고 개 고생한 덕담을 나누면서 즐겼다. 오늘 하산 길은 당초 서봉을 경유할 요량이었지만 옥계정에서 비를 피하면서 지체했던 점과 옥계정 앞 계곡 미로를 헤매면서 지체한 점을 감안하여 오늘 사용한 등산지도상에 표기된 갈림길에서 마을로 곧바로 하산하는 길로 진로를 바꾸겠다는 의견에 뜻을 모은 다음 대열 맨 앞에 자리하여 하산 길에 올랐다.
-13:37 천모봉, 마을 내려가는 길 감림길 경유, 정상을 출발한지 12분 만에 갈림길에 도착하였다. 이 갈림길에 천모봉과 마을 내려가는 길 진로를 안내하는 안내표주가 있다. 오늘 만난 최초의 안내시설물인 셈이다. 예정대로 진입하였다면 두 번째 만나는 안내시설물이다.
- 14:00 마을안길 진입, 마을안길로 접어들면서 일지명상센터안내판, 일지도예공방, 일지명상센터천화원, 오공 문 재 옹 상, 풍류정, 사방시설공사장, 등산로. 일지명상센터 진행방향 안내표주를 연이어 경유하였다. 등산로 안내 표주를 지나면서 옥계정에서 만났던 허풍쟁이 점쟁이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허무맹랑한 진로안내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좋게 넘기려 해도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내려가서 만나기만 해 봐라. 한 번 해대고 말 것이다. 라고 마음을 굳게다져 먹었다. 아무소리 말고 그냥 막걸리나 팔면서 점괘나 보고 허튼수작 부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일정운영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부터 재수 없이 미치광이 엉터리 점쟁이의 농간에 놀아난 생각을 하니 분하고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아침에 당한 분심잡념에 속을 끊이다 보니 어느새 월계정 입구에 이르렀다.
- 14:38 월계폭포 원점회귀, 본인 개인적으로 폭포를 워낙 좋아하는 탓에 폭포를 다시 찾았다. 폭포와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 모습을 깊이 각인해 두기 위함이었다. 오전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대충 눈 팅으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폭포 바로 하단까지 접근하여 근접 촬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중부 내륙에 소재한 폭포 중 엄지로 꼽을 만큼 잘 알려진 폭포를 오르내리면서 즐겼다는 점만으로도 오늘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치부하였다. 한마디로 대 만족이었다.
- 14:56 옥계폭포주차장 도착, 옥계광장을 경유하면서 집 앞에 앉아있는 엉터리 점쟁이 첨지를 발견하였다. 위에서 마음먹었던 대로라면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어야만 했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그래봤자 입만 더러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산예정시간을 무려 1시간 가까이 지체하였다. 옥계정에서 비를 만나는 바람에 지체했던 점과 등산 진로를 바꾸면서 미로를 헤맨 점이 지체요인으로 분석되었다. 일정대로 정상 운영하였다면 하산예정시간 이전에 일상을 갈무리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아침에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우리 일행 분들이 유일한 단체고객이었는데 대형버스 두 대가 추가되는 바람에 제법 관광지다운 분위기가 살아났다. 충무님에게 내려오면서 점쟁이 못 보셨어요? 란 질문을 던졌다. 총무님 왈! 그 분을 만나서 불만을 토로하면서 원망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전하니까 그 분 답변이 걸작이었다. 원망한다는 것은 좋아 한다는 뜻인데 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는 것이다. 사주. 운명을 점치면서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만큼 능청스럽기 그지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전에 당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 오늘 하산행사는 주차장 현장에서 치렀다. 버스 비품으로 준비한 테이블이 설치되는 바람에 하산행사 분위기가 더울 살아났다. 오늘 하산행사장에서는 포도 한 송이를 얻어가려는 관광 나들이 왔던 이웃 아낙의 눈꼴사나운 행태가 눈길을 끌었다. 포도 한 송이 얻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기는커녕 남 주는 것은 좋은 것을 줘야지! 어머니에게 잘 못 배웠구먼! 운운하면서 달갑잖은 후렴을 씨부렁거리다가 총무님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
- 오늘 일정운영이 꼬이는 바람에 고생하신 열네 분에게 심심한 유감의 인사를 올린다. 일상을 정리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동 사안에 대해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영동의 유명 광광지 중 한 곳인 옥계폭포에서 사기꾼 같은 점쟁이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것 자체가 오점으로 남아 오래 기억되리라 본다. 급기야는 영동군청 문화체육관광과 (043-740-3202, 양 순 옥)에 전화민원을 넣어 행정지도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오늘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면서 월이산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Ⅴ. 특기사항
김 성 해 부회장님 포도 협찬
- 신탄진휴게소에서 윤 미 정님 급체 응급조치 : 연 병 임님 침술시술 및 이 선 동님 활명수 긴급조달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천국사 경내에서 이 금 숙 비취님께서 디지털카메라를 분실하였다가 귀가 후 천국사 현장 확인과정을 통하여 다시 찾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