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렬공 사우 건립 등 기타문제이다. 개인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하물며 문중의 일이 많지 않겠는가. 우리 장흥 위씨는 도문회와 대종회 차원에서 그간 결코 적지 않은 사업을 해냈다. 1936년과 1975년 당시 도문회는 독지가의 희사를 받아 백산재강당과 하산사 신실을 건립해서 조상들의 제향을 지내게 만들었다. 매년 충렬공 등 선조들의 묘전시제도 거르지 않고 있다. 대종회는 창립된 지 일천하지만 장학재단 등 크고 작은 사업을 추진해 문중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사업을 간단하게 꼽아 보자. 첫째는 하산사 성역화사업이다. 사우 앞 민가와 빈 땅에 위락시설이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라. 5현조를 모신 우리의 성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위락시설이 들어설 공간을 차단한 것이다. 그 차단방법은 민가를 우리 문중이 사들인 것이다. 도문회가 지난 4월 민가 3채 중 한곳을 매입한 것은 천만 다행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나머지 두 채마저 매입해야 성지를 완전하게 가꿀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다음은 충렬공 사우(祠宇)를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별 지손(支孫) 파조(派祖)의 사우들은 여럿 갖추고 있으나 가장 우선해서 갖춰야할 충렬공 사우는 없다. 장흥 위씨들은 충렬공을 조상으로 둔 것을 긍지로 삼고 산다. 그래서 19세기말 묘소가 있는 인근에 충렬사를 마련했지만 1975년에 하산사 신실을 지으면서 그 사우를 사용하지 않다가 없앴다. 따라서 지금은 충렬공 사우는 없다. 없애버린 사우도 개인의 와가를 이설했기에 웅장하지 않아 썩 볼품이 있지는 않았다.
사정이 이에 이르렀으면 별도로 사우를 지어야 할 상황이다. 도문회장이 2007년에 이 사업을 위해 문화관광부와 전남도당국의 협조를 얻어 보려 시도한바 있다. 그런 착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한 정성이 아니라고 평가 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역시 후손들이 변변치 못한 탓이다. 다른 문중들은 1970년대에 그들 조상의 유적을 짓거나 보수한 바 있다. 곧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과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사우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당국의 지원을 얻기가 어려졌다. 경제사정이 좋아졌지만 충신열사의 사우 등 사적을 건설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우리도 미리 신경을 썼더라면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우리 후손들의 힘으로 마련하는 방법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지 모른다. 일에는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우 터는 하산사 앞 매입한 부지를 고려해볼만하다.
○…문중현안 가운데 족보기록을 바로잡은 일이다. 우리는 1759년 처음 족보를 발행했다. 당시 족보를 발행하면서 사료(史料)가 빈약해 세계(世系) 등이 역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무리한 대목이 있다. 시조공의 동래 시기나 품계 및 회주군(懷州君)으로의 봉군(封君)시기 등은 차치하고도 그렇다. 가령 중시조(中始祖)의 출생시기와 관작(官爵)을 보자. 시조공사적비에는 나계인(羅季人)으로 기록한 반면 대동보(1999)와 진도읍 남산동 판사공 묘비에는 여초인(麗初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벼슬에 대해서도 대동보와 사적비가 서로 다르다. 기묘대동보에는 대각관(大覺官)으로 기록됐으나 사적비에는 대각간(大角干)으로 각해 있다. 한 문중에서 중시조의 벼슬을 놓고 이렇게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대각관이나 대각간이나 모두 문제가 있다. 기묘초보(1759) 이후 중시조의 벼슬을 대각관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고려의 관직품계에는 없다. 그렇다고 사적비에 있는 대각간은 신라의 관직이나 어떤 기록에도 휘 창주(菖珠)는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세계도 그렇다. 5세 충렬공(忠烈公)과 7세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손간(祖孫間)이다. 두 조상의 생년(生年)은 충렬공이 1030년대 초이며, 원감국사는 1226년으로 약 19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졸년(卒年)으로 보면 충렬공은 1107년이며 원감국사는 1293년으로 186년의 차이가 난다. 보통 조손간의 나이차는 90년 정도에 그친다. 생년과 졸년으로 치면 6세간(世間)이라 해야 마땅할 그런 나이차인 것이다. 그렇다면 두 조상간의 나이차는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세계를 처음 짜셨던 영이재공(詠而齋公)도 구적(舊籍)을 따랐지만 불합리함을 인정했다. 이후 존재공(存齋公)과 만암공(萬庵公)도 그 대목을 "수긍하기 어렵다" 고 지적했다.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후손들에게 "관련기록이 고증(考證)되면 고치라고 당부" 하셨다. 그러나 처음 족보를 발행(1759)한 후 1842년 壬寅․1883년 癸未․1916년 丙辰․1957년 丁酉․1972년 壬子․1999년 己卯譜 등 여섯 번이나 족보를 발행했지만 그릇된 기록을 제대로 고쳐놓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록의 오류는 그뿐 아니다. 만암공(萬庵公)이 지적한 고려 때의 선조 휘자(諱字)만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원감국사의 아버지는 玿와 紹, 文卿형제, 元凱와 文凱, 元愷와 文愷 등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이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원감국사의 아버지는 국사의 유고(遺稿)에 정승(政丞)이라고 적고 있으나 족보에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승은 종1품이며, 원외랑은 정6품이다. 높은 벼슬을 두고 낮은 벼슬을 쓰는 경우는 별로 드문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장록(誌狀錄)도 오류가 적지 않다. 우선 역대 족보의 서문(序文)을 발행순서대로 배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원감국사가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청전표(請田表)와 간암공(艮庵公) 휘 세옥(世鈺)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도 누락됐다. 심지어는 가사(歌辭)작품인 금당별곡(金塘別曲)의 저자를 엉뚱하게 표기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대동보의 기록이 오류가 많은 것은 편집상의 문제가 클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족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哲〉
(144일차로 게재 종료)
※ 다시 한번 장시간 함께 해주신 종중 및 독자제현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감사합니다, 게재자 드림)
첫댓글 (144-144일차, 최종 마무리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44일차 대단원의 마지막에도 '저자의 편집후기' 가 전일차에 이어서 밴드에 게재됩니다.
마지막 회까지 애독해 주시고 관심을 표명해 주신 분들이 계셔서 그동안 즐겁고 유익했습니다.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게재자 드림)
주) 그동안 연재 과정에서 발견된 단순한 편집상의 오류나 번역상의 착오 등에 대하여는 [선집 정오표]를 만들어 원자료의 수정에 적극 이용토록 할 것이며, 원저자의 깊은 사고와 역사인식에 따른 이견등에 대하여는 저자의 내재적인 사고를 우선시 하되, 필요시 공론화된 방침 등에 따르는 방안 등을 적극 개진하여 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선집이 되는데 일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재자 드림)
[본문내용- 저자의 편집후기]
(앞에서 이어서, 2-2회차 마무리)/ 무곡
2008년도 초간본 발행당시 표지 모습
(祝刊辭) 協力의 結晶體
氏族文化 硏究所長 魏滋炯(33世)
우리는 崇祖愛族이란 말을 흔히 사용한다. 그러나 실상 祖上을 생각하고 宗親을 사랑하는 마음을 實踐하는 實態는 千差萬別하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뿌리의 중요함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社會, 經濟, 文化등 제반여건이 急速度로 變化, 發展하고 있는 世界化 時代의 흐름 속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後孫들에게 崇祖愛族이란 氏族觀 定立과 執着은 그것이 비록 强要도 권유도 아니다.
하지만 그 自體로도 옳고 그름을 斷片的으로 說明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나”를 이 世上에 있게 한 한가지만은 좋던 싫던 우리의 先祖님에 대한 고마운 關心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後孫들은 先祖님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귀중한 業績을 整理해서 다음 世代에게 우리 氏族 우수성을 긍지로 삼을 수 있는 尺度가 될 수 있도록 資料를 提供하고자 하는 것이다.
社會生活을 하는 가운데 가끔 느끼는 바이지만 다른 氏族의 풍부한 遺物資料를 볼 때면 우리 氏族이 갖지 못한 아쉬운 感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때마다 우리 先祖님 業績을 생각~
씨족지성사,
천년세고의 밴드게재가 마무리되었네요. 씨족문화 창달을 위해 노고가 크셨습니다. 뚝심이 대단하시고 144회차가 매우 체계적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꾸벅./ 벽천
무곡님! 이해를 돕기위해 댓글을 이용해서 보충설명과 함께 긴 기간 동안 연제해 주신 성의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몇년 전에 원산족숙님으로 부터 책을 선물받아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번역 내용도 수박 겉핡기식으로 읽었는데 이번 연제를 계기로 연제물과 책을 다시한번 읽었지만 그래도 이해도가 낮은 저의 형편입니다. 이번 연제로 훌륭하신 선조님의 행적을 많은 종인들께 공유하게 하시는 발상에 대해 대단하게 생각되며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운정
위 금식 운암공 33세 51년 생 님
연재동안 늘 함께해주시고 힘을 보태주셔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여건이 되면 일행과 함께 제대로 방촌유물관도 둘러보는 등으로 유고 및 유물의 상태도 보고싶고
성격상 일일이 게재하거나 싣지 못한(23일차로 소장자 등을 중심으로 분류는 사전에 해 놓았음) 해제편에 등장하는 문집 등을 실제로 보고 싶고 소장자도 만나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특히 만회재공의 심양왕환일기에 등장하는
옥소와 철소는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더 동행해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