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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최인철 지음)
1. 나를 바꾸는 프레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아저씨가 있다. 이른 새벽부터 쓰레기통을 치우고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평생 해 온 사람이다. 존경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신기한 것은 표정이 늘 밝다는 것이다. 하루는 한 젊은이가 이유를 물었다.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환경미화원의 답이 걸작이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 갖고 있는 프레임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돈벌이나 거리청소가 아니라 지구를 청소하는 일로 프레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를 청소하고 있다는 프레임은 돈벌이나 거리 청소의 프레임보다 훨씬 상위 수준이고 의미 중심의 프레임이다.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의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를 묻는다는 점이다. 상위 프레임은 일을 하는 이유,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프레임은 일의 난이도, 걸리는 시간, 성공 가능성 등 구체적인 절차를 묻는다. 그래서 큰 그림을 놓치고 주변의 이슈를 좇느라 에너지를 허비한다.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다양한 수준의 프레임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떤 수준의 프레임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행복의 의미 추구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구약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에서 생활하다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모세는 12명의 사람들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 중 10명의 보고는 부정적이었다. 땅이 풍요롭기는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민족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얼씬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결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성취하는 사람과 안주하는 사람의 프레임 차이를 보여준다. 성취하는 사람은 접근 프레임이다. 안주하는 사람은 회피 프레임이다. 접근 프레임은 보상에 주목하며 회피 프레임은 실패가능성에 주목한다. 회피 프레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어려운 일을 시도하여 성취감을 맛보기보다 일을 도모하다 망신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안락한 지대를 벗어나 ‘지도 밖으로 행군’ 하는 용기 있는 행동은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도전적인 프레임이 있었기에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지만, 안주하는 사람에겐 어설프게 나섰다가 낭패 보기 십상인 위험한 곳으로만 보일 뿐이다.
2. 세상, 그 참을 수 없는 애매함
“화씨 50도는 섭씨로 몇 도인가?” 누군가 이 문제를 신속하게 풀었을 때 우리는 그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는 분명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고 그 답은 공식에 맞춰 쉽게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와 같이 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문제를 “잘 구조화된 문제”라고 부른다. 반면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잘 구조화되지 않은 문제”이다.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하는가?” “부부가 이혼할 경우 자녀 양육권은 둘 중 누가 가져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문제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보는 관점, 즉 프레임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심리적 속성의 애매성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실험 참여자에게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준 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도록 하는 실험이다. A조건에서 제시된 정보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지적이다→부지런하다→충동적이다→비판적이다→고집이 세다→질투심이 강하다” B조건은 정보 내용은 동일했지만 순서가 정반대였다. “질투심이 강하다→고집이 세다→비판적이다→충동적이다→부지런하다→지적이다” 자료 분석 결과 A조건에서 형성된 인상이 B조건에서 형성된 인상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앞서 제시된 정보들이 뒤따라오는 정보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주는 프레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애매한 부분이어서 사용하는 프레임에 따라 동일한 사람을 놓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온다.
코넬대 심리학과 연구팀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순간에 갖는 감정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게임이 종료되고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나타났다. 반면 은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4.8이었다. 객관적인 성취의 크기로 보자면 은메달리스트가 더 큰 성취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한 성취의 크기는 반대로 나왔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이것은 선수들이 자신들이 거둔 객관적인 성취를 가상의 성취와 비교함으로써 주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은메달리스트에게 가상의 성취는 금메달이었다. 최고 도달점인 금메달과 비교한 은메달의 주관적 크기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반면 동메달리스트들이 비교한 가상의 성취는 노메달이었다. 따라서 동메달의 주관적 가치는 은메달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간상의 비교, 시간상의 비교, 심지어 상상 속의 비교에 의해서 현실은 주관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애매성을 갖고 있다.
이쯤에서 딴죽을 걸 독자들이 나올 법하다. 같은 상황이 비교를 통해서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앞의 사례들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스테이플의 실험을 소개한다. 그는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컴퓨터 화면 왼쪽에서 무엇인가 나타나면 Q 자판을, 오른쪽에서 나타나면 P 자판을 누르도록 지시하였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절반의 학생에게 나타난 것은 아인슈타인 사진이었고, 다른 절반에게 나타난 것은 광대 사진이었다. 그러나 워낙 빠른 속도로 지나갔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자판 누르기가 끝난 후 학생들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를 7점 만점으로 평점하도록 요구받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아인슈타인 사진을 본 학생들이 광대 사진을 본 대학생보다 자신을 덜 똑똑하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아인슈타인을 자신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들 아인슈타인과 비교하여 자기가 더 똑똑하다고 느끼겠는가. 이러한 연구결과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비교 프레임이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뇌는 끊임없이 비교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임이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은밀히 유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도 특정 프레임을 유도할 수 있다.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인지 내성적인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나는 외향적인가?” 또는 “나는 내성적인가?”라고 자문한다. 독자들은 두 질문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데 연구 결과는 그런 반문이 틀렸음을 보여 준다. 요약하면 “외향적인가?”라고 물었을 때보다 “내성적인가?”라고 물었을 때 응답이 더 내성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질문의 방향이 특정 종류의 증거만을 찾아보도록 하는 프레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가?”라고 자문하면 외향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만 찾으려하고, 내성적으로 행동했던 증거는 찾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질문의 방향에 일치하는 쪽으로 자기 판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개념이라는 것도 프레임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리고 프레임은 질문의 방향과 같은 사소한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3.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스턴버그는 어리석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중심성을 꼽았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보여주는 실험 하나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수행되었다. 이 실험은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해서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상대가 연주한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는 실험이었다. 연주자의 기대치와 청중의 정확도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주자는 청중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제목을 맞출 확률을 50%로 기대했다. 그러나 청중이 제목을 맞힌 실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이런 차이는 연주자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경험한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의사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말과 메모,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우리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한 것일 뿐, 타인의 프레임에서 보자면 애매하게 여겨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상대의 무감각과 배려 없음을 탓한다. 부모들은 선행학습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가 알기에 벅찬 내용을 가르치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냐고 구박하기 일쑤다. 그 개념들이 어른에게나 간단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말이다. 남녀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토라져 있는 여자 친구에게 “장난친 것 가지고 왜 그리 속 좁게 구냐?”며 되레 화를 내는 남자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만 장난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사람은 타인을 평가하거나 첫인상을 규정할 때 “얼마나 똑똑한가?”라는 차원에서 본다. 반면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따뜻한 사람)의 차원에서 타인을 평가한다. 레비츠키에 따르면 타인을 능력 차원에서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을 평가할 때도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자신을 정의할 때 따뜻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때도 동일한 차원에서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말하는 평가를 보면, 다른 사람이 어떤지에 대한 정보를 주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많이 드러낸다. 그러니 주변에 남을 헐뜯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주변 사람이 실제로 남을 헐뜯는 사람이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남의 허물을 습관적으로 들춰내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까이 해도 좋다. 그 사람은 누구와 있어도 상대의 장점부터 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는 옛말이 들어맞는 셈이다.
출근할 때 직장인들의 큰 고민거리는 “오늘은 뭘 입고 나가지?”라는 것이다. 옷장 안에는 옷들로 꽉 차 있지만 막상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에 백화점으로 달려가 옷을 산다. 신발, 핸드백 등 액세서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착각은 조명효과라는 심리 현상에서 비롯된다. 연극의 주인공도 아닌 보통 사람들이 자신도 스타들처럼 조명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현상이다.
토머스 길로비치의 실험은 조명효과의 실체를 보여준다. 한 학생이 유명가수 배리 매닐로의 티셔츠를 입고 학생들이 있는 실험실로 들어가 잠깐 동안 머물렀다. 티셔츠를 입은 학생은 실험실에 있는 학생의 46%가 자신이 어떤 티셔츠를 입었는지 알아맞힐 거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23%만이 매닐로 티셔츠를 보았다고 답했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마음속에 CCTV를 설치해놓고 자신을 감시하면서도 타인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제 CCTV 스위치를 꺼 버려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조용히 내려놓는다면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어리석은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4. 현재 프레임, 과거와 미래가 왜곡되는 이유
과거에는 없고 현재에만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막 출산한 산모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지만, 출산 직전까지는 성별에 대한 확신이 없다. 현재 시점에서야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조작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연구의 진실성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사건의 결말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심리현상을 저자는 후견지명(hindsight)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서 hindsight는 영어의 behind와 sight가 결합한 말로,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뒤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가 과거를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는 영역이 스포츠 경기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모든 것은 과거가 되고, 과거는 현재에 의해 재평가된다. 2002년 월드컵 중 한국과 미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이을용 선수가 키커로 나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관중들은 “중요한 순간에는 겁 없는 이천수에게 맡겨야지, 감독 뭐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히딩크의 결정을 비난하였다. 그런데 장담하거니와 만약 이을용 선수가 성공했더라면, 사람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경험 없는 이천수를 쓰느니 노련한 이을용이 훨씬 낫지.” 이처럼 우리는 과거가 아직 과거이기 전, 즉 현재일 때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의 눈으로 볼 때만 질서정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후견지명 효과는 사후에는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기인한다.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데 설명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설명 능력이 야기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결과든 사후에는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결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식는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알려주면 “당연하지,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잖아”라고 한다. 반대로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더 깊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하면 “당연하지,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커지고 그러다 보면 애정이 더 쌓이는 거지”라고 응수한다. 사후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당연시하며 그 일이 처음부터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할 때, 우리는 현재 프레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현재 프레임이 만들어 낸 그럴싸한 포장일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후에 내리는 판단에 대한 확신을 훨씬 더 줄여야 한다.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내가 진짜 알았을까?”라고 솔직하게 자문을 해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없고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현재의 직업이나 배우자는 오래 전 과거에는 가질 수 없었던 정보다. 또한 현재의 정치적 태도나 취미, 능력, 행복의 정도도 과거에는 얻을 수 없었던 정보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에게도 있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버릇없고 절제가 부족하다고 꾸짖는다. 안타깝게도 어른들의 이런 꾸짖음은 상당 부분 근거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절제력이 있고 책임감이 강했다고 왜곡된 회상에 빠진 것일 뿐이다. 자녀나 아랫사람에게 “우리 땐 안 그랬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정말 그랬을까?” 하고 스스로 다시 물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재 프레임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정에도 힘을 발휘한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미래에는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고,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상상도 현재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과 동시에 만들었던 것이 바로 동그라미 계획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정도로 비현실적인 계획표였지만, 계획표를 짜는 순간만큼은 진지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기상 시간은 6시이고 평소 하지도 않는 아침 운동도 들어간다. 아침공부는 필수항목이다. 모든 시간은 1분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도록 빈틈없이 계획을 짠다. 그러나 방학 첫날부터 동그라미 계획표는 빛을 잃고 그저 방학숙제 제출용으로 전락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과정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계속 반복한다. 이번만은 예외라는 현재의 의지가 미래에 대한 상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지의 부족이라기보다 애초부터 미래에 대한 우리의 계획이 현재의 의지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지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현재 존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몸살, 여행, 친척의 죽음, 이성 친구와의 갈등 등 의지대로 실천할 수 없게 방해하는 예기치 못한 일들은 미래의 상상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미래를 예측할 때 자기 내면의 의지만 보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는 존재하게 될 여러 가지 상황요인을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래를 예측할 때 현재 존재하는 것들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역시 역할을 한다. 그런 요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부정적 사건에 직면했을 때 작동하는 마음속의 면역체계이다. ‘정서예측’에 대한 실험은 참여자들에게 현재 사귀는 연인과 헤어진다면 삶이 얼마나 비참할지를 예측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실제 실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이 현재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고하도록 했다. 그 결과 헤어지는 것을 상상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오랫동안 비참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헤어짐을 경험한 사람들은 빨리 행복을 되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일단 실연을 경험하면 우리 마음의 면역체계가 눈부신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면역체계의 존재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건의 충격파를 과대 예측하게 된다.
헤어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꾸려고 결심하다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은 스타일을 바꾸었을 때 자신에게 쏟아질지도 모를 시선에 지레 두려워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긴 머리를 싹둑 잘랐을 때 처음 얼마 동안은 남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도 며칠 지나면 변화된 모습에 잘 적응하지 않던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려다 포기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거절할 경우 무안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어떤가? 거절당한 후에 “생각보다는 내 이상형과 거리가 멀어” 하면서 잘 극복하지 않던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웬만한 것은 다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다.
5. 이름 프레임, 지혜로운 소비의 훼방꾼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은 이변으로 통한다. 수상자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심리학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바로 프레임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물어보는 방법에 상관없이 언제나 동일한 선호를 보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월간 잡지의 구독료가 1년에 12만 원이라고 하든, 한 달에 1만 원이라고 하든 사람들은 동일한 구독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네만 교수의 연구는 이런 기대가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경제적 선택이 프레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증명했고,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프레임을 좌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붙인 이름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가령 어떤 사람을 놓고 테러리스트라고 이름 붙이는 것과 자유의 전사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행동을 불러온다. 낙태에 찬성하는 사람은 선택의 권리라고 이름 붙이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생명의 권리라고 이름 붙인다. 여러 영역 중에서 이름의 영향을 가장 심각하게 받는 영역은 바로 돈이다.
신혼부부가 호텔에 들어갔다. 신부가 샤워를 하는 동안 신랑은 5달러를 가지고 카지노를 갔다. 신랑은 카지노 칩 위에 17이라는 숫자가 홀로그램처럼 비치는 것을 보고 룰렛 게임 숫자 17에 5달러를 모두 걸었다. 놀랍게도 공은 17에 들어갔고 신랑은 175달러를 챙겼다. 신랑은 또다시 17에 걸었고 이번에도 당첨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하다 보니 750만 달러를 따게 되었다. 그때 카지노 매니저가 와서 “현금이 부족하니 여기서 멈춰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신랑은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택시를 타고 더 큰 카지노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17에 모든 돈을 걸었다. 놀랍게도 공은 17을 향했고, 그는 2억 6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거머쥐었다. 이번에는 정말 멈췄어야 했지만 그는 한 번 더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볼은 18에 떨어졌고, 그는 천문학적인 돈을 다 잃고 말았다. 호텔로 돌아오자 신부는 어딜 다녀왔는지 물었고. 신랑은 카지노에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결과를 묻는 신부의 질문에 신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5달러밖에 잃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에서 신랑은 처음 5달러 이외의 돈은 공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리한 배팅을 하고도 5달러밖에 잃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2억 6200만 달러를 잃은 것이지 5달러만 잃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옷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돈, 휴면계좌에서 발견한 돈, 주은 돈, 보너스 등등. 이런 돈들은 횡재의 짜릿함을 안겨주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지혜로운 경제생활의 출발은 돈에다 이름을 붙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특히 공돈이라는 이름은 피하는 것이 좋다.
공돈 못지않게 지혜롭지 않은 이름이 푼돈이다. 액수가 적은 돈에는 습관적으로 푼돈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데, 그 순간 돈은 쉽게 소비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저자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은 월간 묵상 교재를 교인들에게 홍보하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커피 한잔 안 드시면 좋은 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신앙심이 돈독한 신자들은 책을 사겠지만 나와 같이 무늬만 신자인 사람은 커피 한 잔 값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고 만다. 1년에 3만 6천 원이라고 하는 것과 한 달에 3천원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지만 느낌이 전혀 다르다. 이유는 프레임을 바꿔주기 때문이다. 한 달 구독료로 프레임 하게 되면 그 돈을 푼돈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황 A> TV를 사기 위해 매장에 들렀다. 마음에 드는 제품 가격이 100만 원이었다. 생각보다 비싸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매장 직원이 1시간 거리에 있는 다른 매장에 가면 같은 물건을 3만원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1시간 운전을 해서 싼 TV를 사러 갈 것인가?
<상황 B> 전자계산기를 사기 위해 매장에 들렀다. 마음에 드는 제품 가격이 5만 원이었다. 생각보다 비싸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매장 직원이 1시간 거리에 있는 다른 매장에 가면 같은 물건을 3만원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1시간 운전을 해서 싼 전자계산기를 사러 갈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황 A에서는 1시간씩 운전을 하지 않겠지만 상황 B에서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두 가지 상황 모두 절약할 수 있는 절대 액수는 3만 원으로 동일하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두 경우 모두 더 싼 매장으로 가거나, 두 경우 모두 싼 매장으로 가지 않은 일관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계산기를 살 때 절약하는 3만 원은 귀한 돈이고, TV를 살 때 절약하는 3만 원은 푼돈이란 법칙은 경제학 교과서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절대적인 액수로 파악하지 않고 원래가격이라고 붙은 이름에 현혹되어 상대적 가치로 파악한다. 그래서 계산기의 경우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절약하는 것처럼 느끼고 TV의 경우 소소한 액수를 절약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일기간에 일어나는 충동구매는 원래가격이라는 이름의 함정에 넘어간 결과다. 가격표에 50만원이 붙어 있는 물건을 20만 원에 사면 사람들은 30만원 벌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20만원을 지출한 것에 불과하다. 어리석은 소비자는 늘 원래가격을 찾아다니고, 지혜로운 상인은 세일 품목에다 원래가격표를 늘 붙여놓는다.
6. 변화 프레임, 경제적 선택을 좌우하는 힘
불행을 실제 경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행해 하지 않는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처럼 보통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복권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사람도 우리가 예상하는 것만큼 행복하지만은 않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예측이 이처럼 실제와 다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적응 능력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어떤 상태에 신속하게 적응한다. 우리는 어떤 상태이든지 쉽게 적응하는 탓에 변화에 무척 예민하다. 이것이 우리의 경제적 판단과 선택을 움직이는 또 다른 핵심 원리다.
〈상황 1〉 현재 100만 원의 수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대안 A는 추가로 50만 원을 확실히 더 받을 수 있는 경우이고, 대안 B는 동전 앞면이 나오면 100만 원을 더 받고, 뒷면이 나오면 한 푼도 못 받는 경우이다.
〈상황 2〉 현재 200만 원의 수입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대안 A는 무조건 50만 원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이고, 대안 B는 동전 앞면이 나오면 100만 원을 내놓고, 뒷면이 나오면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된다.
만일 당신이 ‘상태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상황 1〉과 〈상황 2〉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상황 1〉에서 A를 택하면 최종상태는 확실하게 150만 원이 된다. 그러나 B를 택하면 1/2의 확률로 최종상태가 150만 원이 된다. 〈상황 2〉도 마찬가지다. 결국 선택의 최종 결과를 보자면 두 상황은 완벽하게 같다. 따라서 상태를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 두 상황에서 하게 될 선택 또한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면 〈상황 1〉과 〈상황 2〉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현재 상태에서 돈이 늘어나는 변화, 즉 이득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고, 후자는 현재 상태에서 돈이 줄어드는 손실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득 상황으로 문제가 프레임 되면 안전하고 보수적인 대안을 선택한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가 손실 상황으로 프레임 되면 안전한 선택보다 모험을 감행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의 문제에서 A를 선택하는 비율이 〈상황 1〉에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효과를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내린 선택이 객관적으로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프레임 때문에 내려진 선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주어진 대안들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전에, 문제가 이득으로 프레임 되어 있는지 손실로 프레임 되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카고 대 리처드 테일러 교수는 학교 로고가 새겨진 머그잔을 경제학 시간에 일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 후에 일종의 경매시장을 열고 컵을 받은 학생들에게 최소한 어느 정도 가격이면 머그잔을 다른 학생에게 팔 용의가 있는지 가격을 적게 했다. 반대로 컵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 가격이면 그 컵을 살 용의가 있는지를 적게 했다. 실험 결과는 흥미로웠다. 컵을 팔려는 학생들의 희망 판매가는 평균 5.25 달러인 데 비해, 사려는 학생들의 희망 구매가격은 평균 2.75달러에 불과했다. 똑같은 컵인데 왜 팔려는 학생은 더 높은 가격을 적어냈을까? 프레임 때문이다. 손실의 고통은 이득의 기쁨보다 강하기 때문에 컵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해 구매자보다 높은 가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격의 차이를 소유효과(endowment effect)라고 한다.
일단 무엇이든 내 소유가 되고 나면 그 물건은 나에게 현재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의 심리적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고 방치하던 물건도 남이 달라면 아까워지는 것이고, 중고물건을 놓고 소유자와 구매자 사이에 흥정을 하면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것의 프레임으로 보는 사람과 중립적인 프레임으로 보는 사람이 계산해내는 값어치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혐오시설 건립을 놓고 해당 지역 주민과 정부 사이에 보상액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프레임의 차이 때문이다. 해당 주민들에게 토지는 그냥 토지가 아니라 ‘내 토지’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의 위협도 직접적인 내 건강의 위협이고 내 생태계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 주민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의 눈에는 그냥 토지이고 그냥 생태계이며 그냥 건강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주민들의 보상 요구를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서 비난만 하는 것은 프레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7. 지혜로운 사람의 10가지 프레임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의 말처럼 삶의 상황들은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그 상황에 대한 프레임은 철저하게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더 나아가 최선의 프레임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격성의 최후 보루이자 도덕적 의무다. 이제 이 책을 마치면서 우리가 진정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10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의미중심의 프레임을 가져라. 결혼식을 앞둔 커플들은 결혼 몇 개월 전에는 영혼의 결합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결혼을 바라본다. 그러나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오면 혼수, 야외촬영 같은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결혼의 의미보다 현실적인 결혼 절차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도 상위 수준으로 프레임 해야 한다.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마치 그것을 먼 미래에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중심으로 프레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둘째, 접근 프레임을 견지하라. 행복과 성공은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의 몫이다. 하고 싶지만 주저했던 일이 있다면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형편 때문에 가족여행을 미루고 있다면 지금 당장 가까운 곳이라도 떠나라. 고백할 대상이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설령 거절을 당한다 할지라도 일단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접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안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기 때문이다.
셋째, 지금 여기 프레임을 가져라. 사람들은 현재를 준비기로 프레임 하는 습관이 있다. 현재를 즐기고 만끽하는 대상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할 대상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지금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감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이나 가족, 친구들의 생일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듣는 칭찬과 격려 같은 일상적인 일을 적극적으로 축하하고 누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넷째, 비교 프레임을 버려라. 진정한 마음의 자유는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데 있다. 즐거운 식사, 가족과 보내는 휴가, 친구와의 유쾌한 수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여기에 비교의 프레임이 침투하면 만족의 상태가 사라진다. “남들은 외식도 자주 하는데…” “저 집은 동남아로 가족 여행을 가는데…” 이런 비교 프레임에서는 남들보다 많은 것이 좋은 것이 된다. 그리고 남들과의 비교는 자신의 삶을 고단한 인생으로 바꾸어버린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남들과의 비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 다른 사람들보다 물질적으로 더 잘 사는 것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보다는, 최선의 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섯째, 긍정의 언어로 말하라.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프레임을 결정한다. 프레임을 바꾸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특히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감사, 감동, 기쁨, 설렘, 만족… 이런 단어들이 우리 삶 속에 나아가 우리 아이들의 말 속에 넘쳐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반대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라는 표현이나 “대충, 아무거나” 등의 단어들은 하루라도 빨리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여섯째, 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영웅 이야기를 바탕으로 미래의 영웅들을 만들기 위해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사회나 조직이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삶을 바꾸려고 하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도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줘야 한다. 가슴을 벅차게 만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하나쯤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누군가 본받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고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반복적으로 실천하라.
일곱 번째, 주변의 물건들을 바꿔라. 주변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단순히 현실생활에 필요한 기능만을 담당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양심적인 행동을 유발하고 싶다면 집안에 거울을 배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거울은 외모를 비춰주는 물건에 그치지 않고, 양심과 도덕의 프레임을 유발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본받고 싶은 인물의 사진을 걸어놓거나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롤 모델의 사진을 걸어놓는 행위가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프레임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체험 프레임으로 소비하라. 행복은 소유 자체를 위한 소비보다는 경험을 위한 소비를 했을 때 크게 다가온다. 음식을 먹을 때, 습관적으로 식사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그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음미하는 미식가로서의 경험을 추구해보라. 영화를 볼 때도 흥행 영화를 한 편 본다는 프레임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 낸 작품을 감상한다는 차원으로 프레임을 해 보라.
아홉 번째, 누구와의 프레임을 가져라.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어디서 살 것인가?”의 프레임이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어디서 살고, 어디서 쇼핑하고, 어디서 식사할 것인가’라는 장소의 프레임이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 연구는 행복이란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 자기 삶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예외 없이 누군가가 있었다. 연구에 의하면 배우자가 사망한 후 일주일 이내에 남은 배우자가 죽을 확률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높다.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은 후에 생존할 확률은 친밀한 관계를 통해 사회적 지지가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배 이상 높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어디서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의 문제인 것이다.
열 번째, 위대한 반복 프레임을 연마하라. 〈블링크〉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13세 때 캐나다 마라톤 챔피언이었다. 올림픽 챔피언을 꿈꾸었던 그는 15세 때 마라톤에 흥미를 잃었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시도했지만 자신이 더 이상 뛰어난 마라토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3세 때 캐나다 마라톤 전국 순위 15위에 들었던 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24세가 되었을 때의 랭킹을 조사했다. 그 결과, 24세 때 전국 순위 15위에 들어 있던 선수 중 13세 때 15위 안에 들었던 선수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놀라운 사실은 24세 때 랭킹 1위가 된 선수는 어린 시절 엘리트 선수들의 조롱을 받던 별 볼일 없는 아이였다. 결국 성인기의 성취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영역이든 중단 없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지심리학에 10년 법칙이라는 규칙이 존재한다. 어떤 분야이건 전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 이상 부단한 노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집중과 반복의 산물이다. 프레임을 바꾸기 위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프레임은 단순한 마음먹기가 아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근육을 늘리듯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새로운 프레임을 습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