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울산보훈지청에서 ‘보훈섬김’이로 일을 한지도 5년이 되어간다.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생각나는 어르신이 있다. 보훈섬김이로 일을 시작하고 첫 방문지의 어르신이었다. 연세가 88세이신 6.25참전유공자 분으로, 배우자는 돌아가셨고, 자녀는 아들만 3명이 있었다. 자녀들이 어르신을 잘 보살피지는 않는 듯하였다. 어르신은 “내가 없는 살림에 자식들을 잘 교육시키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자기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럴 것이다”며 애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스스로 위로하셨다.
어르신께서는 눈과 귀가 어두운 분으로서 청소, 설거지 등을 잘 하시지 못하셔서 첫 방문 때 청소를 해드렸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는 지저분함에 다음 방문이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 때는 보훈섬김이로서의 직업의식 밖에 없었던 때였다. 그러나 어르신은 내가 방문할 때 마다 항상 반갑게 맞아 주셨다. 단순히 가사서비스를 받아서 반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식처럼 대해주시는 순수한 마음에 힘든 마음을 가졌던 나의 마음이, 이 일을 직업의 일부로만 여겼던 나의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 버렸다. 내가 6.25를 겪으신 어르신의 희생과 상처를 미력하게나마 보듬어 드려야 하건만 역으로 내가 어르신의 따뜻한 마음에 나의 삶의 힘들었던 마음을 많이 치유 받게 되었다.
어르신과의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 있을 1년 즈음 울산보훈지청에서 기업체와 연계하여 무료보청기를 두 분에게만 지원해 준다는 공지를 받았다. 나는 어르신의 불편함 해소를 위해 적극 신청하여 지원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소식을 접한 어르신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어르신은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대화를 나눌 때도 항상 큰소리로 나누어야 했고 크게 얘기를 해도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가 많았고 눈치로 대화를 하곤 했었다. 보청기를 사용하고 나서는 큰소리로 대화 할 일이 없어져 너무 좋았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바깥 외출도 삼가시던 어르신이 뒷산에 위치한 절에 가셔서 약수물도 떠오시고 동네 가벼운 산책도 즐기시는 등 행복한 날을 보내시는 모습이 내 일처럼 좋았다. 밥맛도 좋아지시는지 음식과 간식도 맛있게 드셨다.
울산보훈지청은 그 뒤로도 저소득 보훈가족과 기업체를 연계하여 백미, 이불, 생필품, 반찬지원을 해주는가 하면 복권위원회의 복권기금 지원을 받아 의료용품, 실버카 등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 처음으로 복권구매가 나라를 위해 공헌하신 국가유공자분들게 지원이 되는 줄 알게 되기도 했다.
보훈섬김이 첫 정 어르신은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다. 이맘때 쯤 항상 어르신이 생각난다. “어르신 하늘에서 보고 계시겠죠.. 초보 보훈섬김이 은숙이를..” 지금은 국가유공자 및 유족들이 자긍심을 갖고 안락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친절과 정성을 다하는 열혈 보훈섬김이로 자리 매김하고 있답니다. 나의 정성으로 이분들의 얼굴에 웃음을 드릴 수 있다면 나의 힘이 다할 때 까지 같이 하고 싶지 말입니다. 그들이 국난에 처했을 때 아낌없이 희생하셨던 것처럼. 기사입력: 2016/06/29 [14:45] 최종편집: ⓒ 광역매일 http://www.kyilbo.com/sub_read.html?uid=180423§ion=sc30§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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