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동티모르 새마을운동 연수생이 당진시 순성면 ‘백석올미영농조합법인’으로 협동조합운영을 배우러 옵니다. 이들은 교육과 간단한 실습 후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을 둘러봅니다. 제가 문화관광해설사로 참가합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사전답사를 나갔습니다. 목적지 100m 전 석양에 아름다운 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확인하니 230년 된 상수리나무, 당진시 보호수입니다. 높이 25m, 둘레 3.0m입니다. 이와 관련해 당진문화원이 발간하는 ‘당진문화’ 2016년 겨울 호에 기고한 글을 시시콜콜한 이야기 89번째 이야기로 대신했습니다. 제목은 지난 번에 쓴 이야기와 같음을 참고바랍니다.
당진시 순성면 백석리에 있는, 당진시 보호수인 상수리나무. 2017. 2. 15.
수령 230년, 높이 25m, 둘레 3.0m. 2017. 2. 15.
떡갈나무 새순. 당진시 송산면 능안생태공원. 2015. 4. 27.
졸참나무 열매. 당진시 정미면 구 은봉산. 2015. 9. 24.
* 돈키호테도 도토리를 먹었다
1. 분류학적으로 ‘참나무’는 없다
이번 호에 이야기할 나무를 ‘상수리나무’로 정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일어나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애가 상수리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진천변 조경수로 상수리나무를 선택한 ‘그 조경사’ 안목에 경의를 표합니다.
낙엽활엽수는 가을이면 빨강이나 노랑 또는 갈색 등의 색깔로 마지막을 만끽하며 잎을 자연의 순환에 합류시킵니다. 그리고 겨울이면 차가운 허공에 앙상한 가지로 수만 가지 형상을 그리며 종교적 명상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같은 낙엽활엽수지만 상수리나무는 다릅니다. 나뭇잎과 잎자루는 말랐지만 대부분 그대로 붙어 겨울을 납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상수리나무를 보면 붙어 있는 잎 자체가 또 다른 ‘꽃’으로 보입니다. 자연현상을 인문학적으로 보려는 숲해설가들은 상수리나무의 이런 특징을 ‘우애가 돈독한 형제애’로 풀기도 합니다. 모진 겨울 추위에 어린 동생(겨울눈)이 잘 견디는지 지켜보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조차 민망하도록 싸우는 형제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수리나무’를 보고 각성해야겠습니다.
상수리나무? 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흔히 참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식물분류학적으로 나무이름 중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중부지방에서는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이 ‘참나무과’에 속합니다. 이 6종류의 나무를 ‘참나무 6형제’라고 합니다. 얘들이 떨군 도토리 모양도 약간씩 다릅니다. 참나무 6형제 구별은 숲해설을 배울 때 넘어야할 야트막한 산입니다.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 밤나무도 참나무과입니다. 상수리나무와 밤나무 잎 구별도 쉽진 않습니다.
2. ‘참나무 6형제’ 구별하기
상수리나무와 관련해 올해 제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참나무 6형제 도토리를 모으는 것입니다. 숲해설가로서 씨앗을 주제로 해설을 할 때를 대비해 ‘해설자료’로 쓰기 위함입니다.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열매는 주웠습니다. 신갈나무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어디쯤인가 있을 테지만 아직 당진에서는 신갈나무를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신갈나무는 6형제 중에 제일 높은 곳에 뿌리를 내립니다. 당진에서 제일 높은 산 아미산 높이가 349.5m니까 저는 당진에는 신갈나무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토리나무들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았을 때 도토리가 훌륭한 양식 즉 묵의 재료라는 점입니다. 지금은 음식점에서 주로 술안주로 제공됩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 70년대까지만 해도 도토리가 귀했습니다. 뒷산이나 앞산에 상수리나무가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산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몰래 줍다가 들키면 모두 내놓아야했습니다. 다행하게도 뒷산 일부분이 우리 집 소유였기 때문에 그런 수모는 겪지 않았습니다. 다만 도토리 줍다가 ‘왕퉁이(말벌)’에 쏘인 기억은 생생합니다. 얼마나 심했던지, 핑계 삼아 1주일 학교가지 않은 기억은 덤이고요.
돈키호테가 목동들에게 기사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 목동들은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도토리 등 음식을 제공했다. <돈키호테 I>(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시공사, 2008) 131쪽.
3. 돈키호테도 도토리를 먹었다
씨앗의 과학적, 인문학적 의미를 알기위해 <씨앗의 자연사>를 읽었습니다. ‘도토리 수만 개가 만들어내는 향연’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도토리 가루가 식용으로 이용되며, 미국이나 유럽의 한국식품점에서도 도토리묵이 판매된다.”
지극히 한국적인 내용을 요렇게 친절하고 소상하게 알다니! 조나단 실버타운 교수 갑자기 호감이 가네요. 그런데 한국의 유원지 식당에서 판매되는 막걸리 안주용으로 도토리묵이 인기라는 사실을 조나단 교수는 혹시 알까요? 모르면 어떻습니까. 저에게는 다음 내용이 중요합니다.
“19세기 말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도토리는 수천 년 동안 주요 먹을거리였다. 오늘날 미국 캘리포니아 잭슨타운 인근의 삼림지역에 살았던 밀워키족은 도토리를 절구로 빻아 가루 반죽을 만들었다. (중략) 밀워키 인디언들은 풍작의 해에 모은 도토리를 곡물창고에 저장하여 흉년을 넘겼다. 도토리를 먹기 위해서는 쓴맛이 나고 소화가 되지 않는 타닌 성분을 먼저 걸러내야 한다. 캘리포니아의 일부 인디언 부족들은 흐르는 물의 가장자리에 도토리를 묻어 타닌 성분을 걸러내고, 산소를 차단하여 싹트거나 썩지 않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토리묵 만드는 과정과 보관방법이 거의 동일하지 않나요? 아메리카원주민들은 베링해를 건너가 정착한, 우리와 여러 가지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도토리를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먹었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는 않습니다. 서양인들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산양 치는 목동들은 담갈색 도토리를 양가죽 위에 잔뜩 늘어놓고……그 누구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달콤하게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주는,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에 손만 뻗으면 되었소이다. ……그가 대접받은 도토리들이 황금시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산초 역시 아무 말 없이 도토리를 먹으면서…….”
<돈키호테> ‘산양 치는 목동들과 함께한 돈키호테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의 일부입니다. ‘산초’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니 인용문의 ‘그’는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돈키호테입니다. 세르반테스가 1604년 돈키호테 1편을 탈고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도토리를, 정확하게 도토리묵처럼 (가공한) 도토리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가공한) 도토리를 먹으며 ‘황금시대’까지 연상했다니 그 (가공한) 도토리 맛은 상당했는가 봅니다. 그나저나 돈키호테가 (작품속에서) 활동하던 당시 스페인은 도토리를 어떻게 가공했을까요. 타닌을 빼고 초절임을 했을까, 그것이 가능한가, 혹시 묵이 아니라 과자였을까 궁금합니다. <돈키호테 2권>에 단서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곳에서 알이 굵은 도토리가 난다고 하던데, 스물네 개 정도만 보내주세요. 그대의 손으로 딴 것이면 아주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609-610쪽)
돈키호테의 종자 산초 판사에게 호의를 베푼 공작부인이 산초 판사 부인 테레사에게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당시 도토리는 귀족도 마다하지 못할 식재료였다고 봅니다. 돈키호테의 고향 라만차의 도토리는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천안의 호두, 당진의 꽈리고추, 서산의 어리굴젖, 홍성의 한우, 남당리 대하, 예산의 사과, 광천의 새우젖, 서천의 돌김, 부여의 수박, 논산의 딸기, 연산의 대추, 금산의 인삼처럼 말이지요. 공작부인이 심성이 고왔는지, 갑질하기 싫었는지, 귀족이 서민에게 부탁하면 품위가 떨어져서 그랬는지 아주 공손하게 부탁합니다. 도토리 ‘스물네 개 정도’만 보내달라고요. 어쨌든 도토리의 유혹은 이러하네요.
“도토리라면 제가 마님에게 1셀레민을 보낼 겁니다. 아주 알이 굵은 것으로, 보기만 해도 놀랄 만한 것으로 골라서 보내지요.” (610쪽) “금년에 우리 마을에서 도토리를 많이 수확하지 못해 제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도 고귀하신 마님께 반 셀레민 정도를 보냅니다.” (636쪽)
636쪽은 테레사의 답장 초본 일부고요, 712쪽은 공작부인에게 전달된 답장 최종본입니다. 1셀레민은 약 4.5 리터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반 셀레민은 2.25리터, 한 되가 0.55리터,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하면 4되를 보냈습니다. 도토리가 워낙 귀해서 마음이 바뀌었는지, 수확이 적었다는 핑계였는지, 수확량이 평소에 비해 진짜 반으로 떨어졌는지, 옆집에서 꾸어다 1셀레민을 보냈을 수도 있었는데, 편지를 가져온 시동이 금방 돌아간다고 해서 시간이 없었는지, 어쨌든 테레사는 공작부인에게 반만 즉 4되를 보냅니다.
“우리 주인님의 직업이 음식과 마실 것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해서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는 저기 초원 한가운데 누워서 도토리와 비파 열매를 실컷 먹는다오.” (712쪽) “지금 앞에 계신 돈키호테님께서도 잘 아십니다만 우리는 도토리 한 줌, 호두 한 줌으로 여드렛날을 버티곤 했답니다.” (750쪽)
돈키호테와 산초의 '야전비상식량'에 도토리는 빠지지 않습니다. 이 언급으로 판단하면 도토리를 가공하지 않고 그냥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도토리를 가공하지 않고 먹는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의아합니다. 당시 스페인산 도토리는 떫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 요하임 라트가우 교수는 환경사 전문가입니다. 그는 저서 <자연과 권력>에서 “참나무가 오래전부터 유럽 전역에서 특별한 후광을 누리는 것은 단단한 목질 때문이라기보다는 도토리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600년경 졸링에서는 도토리 수확이 목재 이용보다 경제성이 20배가 넘었다고 덧붙입니다. 유럽에서 참나무는 환경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지요.
4. 당진의 보호수 상수리나무 2그루
당진천변에 심어진 상수리나무의 도토리에 많은 당진시민들이 ‘눈독’을 들였습니다. 새벽에 나와 샅샅이 뒤져가며 간밤에 떨어진 도토리를 남김없이 줍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좀 늦은 이들은 그 사이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고, 점심때와 저녁때도 도토리 줍는 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왜 도토리를 주웠을까 궁금했습니다. 도토리를 만들려고 그랬을까, 옛날 생각에 그저 주웠을까.
당진향교 뒷산에는 제법 아름드리 되는 상수리나무가 여러 그루 있습니다. 면천면 성상리에는 170년으로 추정되는 상수리나무가 마을나무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순성면 백석리에서 자라는, 수령 230년으로 보이는 상수리나무는 당진시나무로 지정됐습니다. 기회 되면 찾아가 먹을거리가 귀했을 때 이 상수리나무에서는 도토리 몇 말을 주웠을까 상상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 참고문헌
<돈키호테Ⅰ>,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공사, 2008
<돈키호테Ⅱ>,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공사, 2015
<씨앗의 자연사>, 조나단 실버타운, 양문, 2010
<자연과 권력>, 요하임 라트가우, 사이언스북스,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100.daum.net/encycl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