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29/170711]박열(朴烈), 그 이름 두 자를 기억하자
일요일 아내와 함께 모처럼 영화를 보았다. 이준익 감독의 ‘박열’. 아내도 ‘박열’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다. 이 영화를 꼭 보라는 나의 강추에 친구는 “박열이 사람 이름이냐?” 물었다. 아내와 그 친구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는 ‘알고 기억해야 할 사람은 반드시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는 게 나의 오랜 지론(持論)이다.
자, 2주도 안돼 200만명이 넘게 관람했다는, 이 한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는 박열,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누구인가? 박열은 경북 문경(1902년)에서 태어나 일찍이 3․1독립운동을 목격한 후 20대 초반 일본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되었고, ‘흑도회’ ‘불령사’ 등을 만들고 일본왕 폭살시도 혐의로 재판을 받으며 화제가 된 독립운동가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1926년 일제 법정에 선 피고인 2명의 모습을 보라.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까지 조선머리를 쪽진 후미코, 이어 등장하는 박열, 세상에나? 이런 옵션의 재판이 있을까? 사모관대에 조복(朝服)을 입고 검은 혜자(鞋子)를 신었다. 방청석의 조선 학생들을 몇 번이고 돌아다보며 말없는 웃음으로 답례를 하다니? 하하하. 영화 첫머리에도 명기했듯이, 고증 90%의 실화(實話)란다.
그들의 나이 겨우 23, 22살. 어찌 그리 당당할 수가 있었을까? 지금 우리 아이들과 비교하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이지 않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행동을 했기에 ‘일본 천황제는 위선덩어리’라고 웨장을 치지 않던가? 놀랍다못해 경이(驚異)롭다. 하지만, 박열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 할아버지들의 기개(氣槪)는 하늘을 찔렀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아- 우리의 안중근 의사가 그랬다. 어떤 고문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포로를 주장한 심산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고, 단재는 ‘꼿꼿세수’로 유명했다. 집조차 총독부와 반대로 북향으로 지었다. 교수형에 임하는 안중근 의사의 의연한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오직 숙연할 뿐이다. 그들은 동양평화, 나라사랑의 사상가였다. 목숨은 너희가 총칼을 쥐었으니 뺏을 수 있을망정 혼(정신)을 어찌 뺏을 수 있으랴? 청사(靑史)는 그런 것이다. 조선초 사육신(死六臣)의 절개에 비하리라.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긴 것이다. 눈곱만큼 양보도 없다. 박열은 그랬다. 뭐 하나 일본넘들에게 꿇릴 게 없었다. 조복을 요구하다니? 기발하지 않은가? 대한민국 장부가 저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유쾌, 상쾌, 통쾌했다. 솔직히 나도 아나키스트, 동지 가네코와의 옥중결혼, 장기간 투옥(22년 2개월), 해방직후 재일본거류민단장, 납북, 이 정도의 지식만 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한 일화들은 감명, 감동, 대박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는 꼭 ‘박 열’ 두 글자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더불어 그를 사랑했던 일본인 가네코도 기억해 두자. 불꽃같은 여자다. 옥중에서 1000장이 넘게 수기를 썼는데, 책으로 나왔다던가. “산다는 것은 단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사형)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정말 당차지 않은가? 신념의 그녀이기에 옥중자살은 분명코 거짓일 것이다. 아마도 임신하지 않았을까? 옥중출산을 하면 또 화제가 될 게 분명하니, 그 꼴을 못본 찌질이들이 죽였을 것이 틀림없다. 감옥에서 “이제부터는 조선옷을 입겠다”고 했다지 않은가. 어찌 일본인 모두가 나쁜 사람일 것인가? 가네코는 이제 영원한 ‘한국여자’가 되었다. 문경에 묘도 있다지 않은가.
또한 그들을 변호한 후세 다쓰지의 이름도 기억해두자.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일본 군국주의 반대운동을 벌였다. 2차례 옥고와 3차례 변호사 자격증을 박탈당했다.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2004년 독립운동훈장을 받았다. 잘한 일이다. 물론 박열도 1989년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는데, 북한에서도 받았다. 이준익 감독은 고증(考證)을 어떻게 했을까? 당시 동아일보 이상협 특파원은 재판때마다 중계하기에 바빴다. 문경시 마성면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에는 1922∼1962년 박열에 관해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238개(1926년에만 168건 보도)의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옥중시와 옥중가도 동아일보에 남아 있다. 옥중시를 보자. <옥창의 겨울밤은/이슥히 깊었는데/찬 기운은 살을 어이고//…//고르지 못한 이 세상/생지옥의 이 세상/아! 원수의 생지옥//…>.
이루지 못한 불꽃사랑 ‘옥중가’는 또 어떤가? 이것 역시 동아일보에 실렸다. 고마웠던 동아일보, 21세기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반성할지니. <0000 계신 데로/나의 님은 가시니라//먼저 가서 기다리리다/그대 오길 기다리리다//언제던가 복도에서/손잡은 일도 있었건만…곁에 있던 간수가/얼굴을 찡그리더라>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들의 사랑이 꺾인 게 너무 아프다. 그들은 수십 년 후 천당에서 손을 잡았을까? 박열은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1974년 72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한 세상을 아주 질박하고(朴), 매우 매웁게(烈) 살았다. 뒤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무슨무슨 기념행사때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할 때, 우리는 한 명씩 한 명씩 이름을 되뇌이자. 백범 김구, 안중근(나이 30에 유묵 60여점과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윤봉길(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글자만을 남기고 상해로 가더니 24살때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장개석은 중국 4억명이 못한 일을 해치웠다며 극찬했다), 이봉창(31살에 일본왕 관병식때 수류탄을 던졌다), 백정기, 김상옥, 나석주, 김원봉, 박열 등등등등. 그들이 있어 이 나라가 있음을 각골명심하자. 그리고 너도나도 영화 ‘뱍열’을 보자. 그게 영화라는 종합예술에 대한 예의이고, 독립투사에 앞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영화 <동주>를 만든 이준익감독도 또 일을 냈다. 그가 고맙다.
추기(追記): 영화 ‘박열’의 관람을 강추하는 뜻으로 이 졸문을 마무리하려는데, 7월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휴먼스토리가 눈에 띈다. 요약한다.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중국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 류샤오보(劉 曉波․62)가 간암말기가 돼서야 최근 가석방됐는데, 임종이 임박했다고 한다. 외국으로 진료 출국도 할 수 없이 악화된 형편이라고. 영국 BBC 중문판은 류샤오보 부부의 가슴 아픈 로맨스를 ‘수용소의 쇠창살을 뛰어넘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1995년 천안문 6주년기념행사에서 정치개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복역하던 중 96년 류샤(劉霞․56)와 옥중 교도소에서 결혼. 99년 석방될 때까지 류샤는 매달 베이징에서 동북지방의 교도소까지 1600km를 기차로 다니며 면회했다고. 기차 속에서 남편을 그리며 쓴 시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구슬픔이 나를 뒤척이게 하네/나는 당신의 손을 끌어당기지 못하네>. 류샤오보가 89년 봄 천안문 시위 뒤 20개월의 감옥생활을 마친 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들은 처음 만났다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재능 있는 류샤를 보고 “모든 아름다움을 한 몸에 갖춘 여인을 만났다”고 좋아하던 류샤오보, 같이 산 세월은 불과 몇 개월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류샤오보가 죽자사자 한 작품활동은 “언젠가 내게 일어날 일 이후에 아내가 힘들지 않게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9년 법정에서 마지막 공개성명을 발표하는데, 성명의 마지막은 고통 속에서도 자기 곁에 머물러준 아내에 대한 감사로 장식되었다.
“나는 유형의 감옥에서 복역하고 당신은 무형의 마음감옥에서 기다리오.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높은 담장을 뛰어넘고, 쇠창살의 햇살을 꿰뚫어요. …내 감옥 생활의 매분 매초를 의미로 가득하게 해주오.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때는 몹시 무거워 나를 비틀거리며 걷게 만든다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이들의 사랑이 눈물겹고 아름답다.
첫댓글 왜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는가?
김원봉(암살, 밀정), 박열 등....
그럼 왜 해방후 집권 세력은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이는 엊그제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와도 상통하는 문제다.)
친일 집권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독립운동가만을 그나마 형식적으로 최소한 가르쳤다.
자기들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고문하고 죽였던 그 놈들?을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국민들이 김구, 안중근 등 겨우 몇명만 기억하게 만든다.
심지어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김구는 정치적으로 폄하까지 해댄다.
예전에 영화 파파로티를 보고 이제훈의 팬이 되었다.
(흥행은 안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참 감명깊게 봤다.)
그나 저나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잘생긴 배우들이 많은거야? ㅎ
중국, 일본보다 인구수도 훨씬 적은데....
~ 김수현, 박보검, 송중기 등등....
그리고 우리민족은 문화, 예술 쪽에 타고난 끼가 있어서 그런지 그냥 내버려두면 펄펄 나른다.
세계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와 맞짱을 떠서 이렇게 까지 선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단다.
물론 인도가 있지만.... 인도는 12억 인구에 문화적 정체성이 우리보다 훨씬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가 다름아닌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였다고 한다.
세상에는 하도 다양한 유전자들이 있어서.....ㅎ
혹시 아재들 중에.... 내면에.... 자기는 점잖고 '딴따라는 천박하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ㅎ
예전에 '현대차가 1년동안 미국에 수출해서 얻은 이익이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 몇편 수입하는 비용과 비슷하다' 는 기사가 있었다.....
'어쨌든 미국 딴따라는 멋있어도 조센징 딴따라는 천박해~' 그런거여? ㅎ
또 한편의 감동적인 영화가 될것 같군요. CJ 이미경이 만들어겠지요
우천 덕분에 영화를 봤다오.영화 너무 감동적이었다오.다시금 우천글을 보니 더더욱 감동 백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