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삼상 5장 1-12)
1-2.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에는 다곤이라는 우상이 있었다. 다곤이라는 우상 아래 여호와의 궤를 두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는 우상의 우월함을 나타내고, 또 여호아의 궤는 우상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곤은 물고기를 의미한다.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물고기 형상을 하는 그런 우상이었다. 그림을 통해서 보면, 상반신(남자의 형상)은 농경 사회를 나타내고, 하반신인 물고기는 해양민족으로서 사회를 반영한다. 농경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고, 해양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 기복주의가 만연하는 그런 모습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6장 24절『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호와의 궤는 형상을 가지지 않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마치 다곤과 같은 우상이 가득한 그런 곳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곳은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이 없는 그런 곳을 의미한다.
3.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나팔)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나팔은 종이 주인에게 엎드리는 그런 모습이다. 다곤 신이 여호와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다곤을 세웠는데, 다곤이 쓰러진 원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블레셋 사람들이 신으로 경배하는데, 그 신이 쓰러지고, 다시 세우는 것은 이미 신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우상이 세워지지도 않는다. 그런 물건을 마치 신처럼 떠 받들고 있으니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인간들은 물건과 같은 우상에게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서 일치시키려 한다. 자신과 우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상 속에 자신이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그 우상에게 복을 빌고 그 우상을 조금만 벗어나면 죽을 것 같은 모양이 된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우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4-5.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전쟁의 전리품처럼 다곤은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서 문지방에 놓여있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워서 다곤이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런 물건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문지방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문지방을 밟으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더 강화한 것이다.
6.여호와의 손(야드)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카바드)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야드는 권세를 의미한다. 카바드는 무겁게 하다 라는 의미다. 여호와의 영광이 아스돗 사람에게 나타나므로 그들에게 재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심판을 의미하며, 심판은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셨다. 그러나 그 심판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자에게 구원(현재적 부활)이 되는 것이다.
독한 종기의 재앙은 쥐와 관련된 그런 전염병(페스트)으로 여겨진다. 칠십인역에서는 쥐가 그들 곳곳에 나타난 것으로 번역되었다.
7-8.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여러 정황을 통해서 여호와의 궤가 재앙을 내리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의 궤가 진짜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역시나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그 궤를 옮기게 한 것이다. 그들이 다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곤은 혼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투영된 다곤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자기라는 우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다곤이나 자기라는 우상은 같은 개념이 된다.
9-10.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겨간 것이다. 가드에는 다곤 신전이 없었는데도 더 심한 환난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궤를 에글론으로 보내졌다. 에글론은 가드보다 더 강력한 우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가 가는 곳마다 이런 환난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시면, 깨닫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모양이다. 혼적으로 마비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열왕기하 1장 1-2절을 보면,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바알세붑은 마가복음 3장 22절에서 등장하는데,『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11-12.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그들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두렵게 여겼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부르짖게 되어있지만, 우상을 섬기는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향하여 회개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그 궤를 옮기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의 궤로 향해야 하는데, 우상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의 궤를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로 옮겨가야 하는데, 오늘날 신도는 그렇지 않는 모양과 같다. 세상의 복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다. 세상 나라가 첫번째이고, 하나님 나라가 두번째 순위이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