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32
애절한 죽음으로 자신을 지킨 춘천의 절기 전계심
<소양정으로 오르는 길옆에 놓인 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슬쩍 계절은 제 위치를 차지한다. 낙엽을 밟으며 봉의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여전히 전계심 묘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춘기계심순절지비(春妓桂心殉節之碑)라 써진 작은 비석이다. 전쟁에 총상을 입어 한 글자가 파였다. 떨어져 나간 묘비 귀퉁이는 시멘트가 붙어있다. 찬 바람에 더욱 쓸쓸해지는 분위기이다. 가끔 누군가 꽃을 놓는 이가 있건만 오늘은 황량한 모습 그대로다.
“계심이 할머니, 잘 지냈습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인사를 건넸다. 묘비 뒤쪽 나무에 하나 남은 단풍이 바람 따라 떨고 있다. 덩그러니 놓인 소양정(昭陽亭)에서 누군가 보고 있는 듯하다. 봉의산 북녘에 있던 계심의 묘는 도로를 닦으면서 없어지고, 묘비만 이곳으로 옮겨왔다. 묘비 뒤에는 계심의 사연이 한자로 적혀 있다.
<정절과 신분의 이분법>
《강원도지》(1940)에는 판서 박종정이 돈을 내고, 유상륜이 비문을 쓰고, 김처인이 공사를 살폈다고 했다. 전계심의 사연이 《해동염사》에 전한다고 했다. 함경도 기생 소춘풍이 전계심 묘비를 찾은 후 갑산으로 돌아가 불타는 장작더미에 올라 자살했다. 이인직은 전계심 이야기를 바꾸어 신소설 <귀의 성>(1906)을 썼다. “시앗되지 마라, 시앗 시앗.” 참으로 슬픈 귀신의 소리이다. 차상찬은 《개벽》에 전계심 이야기를 소개했다. 2010년에는 소리극 <절기 전계심>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를 추모하는 시(詩)도 많다. 춘천의 향토축제 <개나리축제> 때는 춘천의 접객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행진을 하면서 계심의 영혼을 달랬다고 《춘주지》에 전한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렇게 사람들은 시, 소설, 기사, 뮤지컬, 행진 등으로 죽은 계심을 불러냈을까.
계심은 춘천 관노의 딸로 춘천부사 김처인(金處仁)의 소실이 되었다. 얼마 후 김처인은 발령을 받아 서울로 가고, 계심의 어머니는 계심을 서울 기방에 팔았다. 한량들이 계심의 미색에 반해 범하려 했으나 계심은 김처인의 아기를 갖은 터라 한사코 거절했다. 어느 날 한 불량배가 계심을 강제로 폭행했다. 계심은 김처인에게 편지를 써놓고, 불량배가 만졌던 젖가슴과 머리카락을 칼로 자르고 음독 자결하였다. 김처인의 꿈에 현장이 보였고, 김처인이 꿈에서 본대로 기방을 찾았으나 이미 계심은 죽은 뒤였다. 김처인은 계심의 시신을 수습하여 봉의산 기슭에 묻고, 주변 사람들과 같이 계심의 절개를 기리고자 1796년 비석을 세워 그를 추모했다.
계심의 묘비 뒷면과 《강원도지》에 전하는 내용이다.
<봉의산 산신이 된 전계심>
“시앗되지 마라 시앗 시앗 시앗되지 마라 시앗시앗”
<귀의성> 말미에서 언급 한 삼악산 기슭에서 들리는 새소리이다. 사람은 억지로 살지 못하지만, 제 운명도 억지로 하지 못한다. 아마도 계심을 달래는 소리를 이인직은 그렇게 새소리로 표현했을 것이다. 밤마다 그렇게 새는 울부짖다가, 분 바른 시앗 여성들이 그 소리를 듣고 싶어 꽃 떨어지는 봄바람을 타고 삼악산을 오르자 새소리는 끊어졌다고 한다.
봉의산에 오르면 ‘봉의산신 위(鳳儀山神 位)’라고 한자로 쓴 산신비가 있다. 봉의산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산에서 기도할 때면, 가끔 이곳에 계심의 혼령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는 춘천의 진산 봉의산에 머물면서 산신이 되어 억울한 영혼들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무당이 된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공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