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나는 사람 / 이임순
언제부터가 그녀가 생각났다. 그럴 때면 누가 내 살갗을 꼬집기라도 한 듯 아팠다. 왜 그럴까 되짚어 보니 지은 죄가 있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나 같은 공간에서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그는 집에 가기 바빴고, 이따금 원생들끼리 갖는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업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집중 시간은 5분을 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강의 내용을 파악한다 싶으면 어느새 꾸벅거렸다. 저러려고 한 시간 반을 운전하고 왔을까 싶었다. 본인의 처지를 알면 눈에 잘 띄지 않은 뒷자리나 모서리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좋으련만 정중앙에 앉아 졸고 있으니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쏟아지는 잠을 쫓으려고 그랬는지 모르나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은 반쯤 벌리고 자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인상이 일그러졌다.
우리의 눈은 같은 모양이다. 어느 날 평소 말이 없던 원우가 “누나 혼자만 열심히 하지 말고 우남이 누나 좀 챙겨봐요.”그랬다. 글쎄, 모듬 과제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잠은 대신 자 줄 수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실은 나도 그녀의 모습을 보면 가시가 살갗은 뚫고 들어온 듯 마뜩찮을 때가 많았다. 원우들이 지들은 항상 젊을 줄 알고 나이 타령을 했다. 그녀와 내 나이가 제일 많았다. 듣기 싫었으나 많은 것이 사실이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이 나오니 이 사람 저 사람이 한마디씩 했다. 그런 말에 열이 났는지 불꽃이 일었다. 금방까지 단잠에 빠져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잠자는데 뭐 보태준 것 있느냐고 따졌다. 실은 잠에서 설핏 깨었는데 말하는 사람 무안할까 봐 자는 척했다. 졸은 것은 사실이나 이어지는 험담에 화가 났다.
불꽃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상황을 가라앉히는 것이 급했다. 대뜸 멀리서 왔으니 피곤하고 졸릴 수도 있지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남자 원우를 나무랐다. 그런 다음 “우남아, 오늘은 나도 기분이 별로다. 우리 차나 한잔하면서 속 풀자.”하며 그녀의 팔장을 꼈다. 사태를 짐작한 몇몇 원우가 합세하며 거들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녀를 떠밀다싶이 하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찻집으로 가는 내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주면서 “오미자찬데 데 마셔 봐,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했다. 말없이 뚜껑에 부어 몇 모금을 마시더니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진주에서 어르신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했다. 가족이라고는 딸이 하나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모든 것을 그 사람 위주로 하더란다. 아이가 세 살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잘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사람을 싸늘한 시신으로 만났다. 머리가 하애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생각도 없었다. 장례를 어떻게 치뤘는지 모르고 오로지 종교에 의지하여 나날을 보냈다. 10년쯤 지나자 주위에서 언제까지 혼자 살 것이냐며 새출발을 권했다. 지인이 소개해 준 사람을 몇 번 만나다 보니 인간성에 마음이 끌렸다. 그런데 딸이 반대했다. 나한테 아빠는 우리 아빠 한 사람밖에 없다며 모녀간의 인연을 끊자고 했다. 자식이 이렇게까지 반대하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재혼을 하나 싶었다. 마음을 바꿨다. 그러던 딸이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도 없느냐며 빈정거렸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남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보는 앞에서 껴안고 대놓고 부부행세를 했다.
혼자 산 세월이 억울했다. 그즈음 평소 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믿을만한 홀아비가 있다며 찻자리를 마련했다. 믿음과 가정밖에 모르면서 재력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만나다 보니 마음이 끌렸고 이런 사람이면 내 인생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짐 하나 덜었다는 식으로 재혼하라고 했다. 하나뿐인 피붙이도 이제는 믿을 가족이 아니구나 싶었다.
딸보다 먼저 결혼식을 조촐하게 올렸다. 그리고 남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주간보호센터는 그대로 운영하면서 딸도 계속 근무했다. 혼인신고 한 사실을 알고 재산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노후에 부부를 거천해 줄 수 있느냐고 묻자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듯 턱없는 소리 말라고 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재산은 부부의 노후자금이라고 몫을 지었다.
친구는 남편의 권유로 대학원에 등록했다. 딸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려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설을 운영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강의실을 들어서면 피곤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참으려 해도 잠의 무게에 짓눌렸다. 졸음이 옭아매는 그녀에게 나잇값도 못한 잠보로 본 것이 미안하다.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난 후에도 그녀의 강의실 단잠은 이어졌다. 다만 꼴불견이 아닌 삶이 고단한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졸음을 더이상 입에 담지 않았다.
“우남아, 미안해. 나도 오늘 곡성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에서 한 신이현 작가의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졸았단다. 그 잠이 어떻게나 고소하던지 너 생각했어.” 흉본 것 용서해 줄 거지.
첫댓글 피곤하면 졸 수도 있겠지요.
그분 고단한 삶을 버티느라 고생하시네요.
지금은 남편이랑 옛날 이야기 하면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답니다.
그때 그 잠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합니다.
맞아요. 사람들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더라고요. 내 기준으로 함부로 평가하면 안되는데. 저도 반성합니자.
이 글 써서 보내주었더니 용서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것도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런거라는 말에 한바탕 웃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공부, 많이 힘들 거 같아요. 팔팔한 청춘들도 교실에서 다 자는 걸요. 하하.
별난 사람인지 힘들다는 느낌보다 재미에 묻혀 지냈습니다.
가끔 그 열정이 생각나곤 합니다.
깡마른 체격 어느 곳에 그런 강단이 숨어있을까요?
잠을 먹게 자면서도 그 많은 일을 하시는 선생님이 저한테는 신기한 외계인처럼 느껴집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선생님처럼 잘 하지는 못하고 그냥 하는 척만 합니다.
그런데도 사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선생님 저도 그날 강의 중간중간 졸았습니다.하하
양선례 선생님은 신기한 외계인 같다 하셨는데, 저는 그 이상이예요. 정말 대단 하시답니다.
고운 눈으로 보니 그럴겁니다.
노력은 하는데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