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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 명성 믿고 오만하지 말라 파멸하고 말지니
연재를 시작하면서…
서구 열강이 ‘문명(civilization)’의 전파라는 명분을 내세워 식민지주의를 정당화했을 때 ‘문명’이라는 단어가 ‘야만’의
미성년을 벗어난 성년기 인류의 교화된 상태를 의미했다면, 식민 지배를 강요받은 이들에게 ‘문명’은 무엇보다도 총과
대포로 대표되는 무력과 그 가공할 만한 폭력을 생산해낸 과학기술을 가리켰다.
조선 말기 한반도를 휩쓸었던 ‘척화’와 ‘개화’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 강점을 거쳐 남북 분단의 현실에 이르기까지 해소
되지 않은 채 소위 ‘서양’에 대한 무분별한 선망과 근거 없는 멸시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문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그리고 이 문명의 미래는 무엇인가?
이제 서양이 ‘문명’이라는 말을 독점하는 시기는 지났고, 동양에도 ‘문명’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게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리하여 동양문명 대 서양문명이라는 대립 구도가 문명 담론의 기본 틀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세계사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그러한 단순 대립 구도에 잘 맞지 않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아랍의 국가들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또 인도는?
‘동서’라는 단순 대립 구도를 탈피해서 여러 문명권으로 나누어놓고 보더라도 한 문명권 안에서 이질적인 여러 문명의
요소들을 만나게 되고, 그 문명의 요소들조차 자세히 보면 시대에 따라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명사업단과 ‘신동아’가 공동으로 기획·연재하는 ‘문명의 교차로에서’ 시리즈는 세계사
에서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주목해, 이질적인 ‘문명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부딪쳤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지리 등 상이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인문학자들이 독자 여러분을 구체적인 문명의 교차 현장
으로 인도할 것이다.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문명의 교류와 충돌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은 특정 시대와 장소에 등장한 문명들의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명’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류 문명사에
대한 거시적 조망을 시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문명의 교차로들을 향해 출발하자!
- 송유례·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동·서양 문명 첫 충돌 : 페르시아 전쟁
문명이 교류하고 충돌하는 극적인 양상은 전쟁이다. 전쟁은 세계관의 차이, 정치와 경제의 문제, 종교와 관습의 대립,
과학과 기술의 성과 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무대인 것이다.
집단이나 종족, 민족이나 국가는 자기(自己)의 서사로 전쟁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타자(他者)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전쟁은 여러 도시국가 사이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건이었다.
작은 도시국가들 모두 저마다 독립을 열망하고 각자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마치 운동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처럼 서로
경쟁하고 투쟁했다.
전쟁은 또한 서양문학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서양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지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다루면서 두 문명의 충돌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시대에서 동서양 문명이 첫 충돌한 사건이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경험한
그리스인들도 자기 관점에서 그 전쟁을 바라봤으며, 페르시아인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의 정체성과 대비되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과 역사가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4년)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처럼 작은 도시국가 시민이 거대 제국
의 백성을 물리쳐 승리한 예상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진영이 패했더라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유국가로 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테네
에서 자라기 시작한 민주주의 싹도 개화하지 못하고 고전기 문명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제국이 성취한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거대 제국으로 여러 민족을 분할해 통치하는 정책을 구현하며 평화와
질서를 보장함으로써 다인종·다문화·세계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그리스인 처지
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서문은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을 보존하고 전쟁이 발발한 원인을 탐구하는 게 저술 목적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스인이 아닌 이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 시각과 합리적 서사로 전쟁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다리우스3세와 벌인 이수스 전투.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페르시아 병사.
아쉽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페르시아 쪽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물로는 관료가 새겨놓은 석판과 왕궁 벽에 조각된 왕의 포고령이
있을 뿐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작품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이다.
이 비극은 페르시아 전쟁 전반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경험을 헤로도투스보다 더 멋지게 비극의 형식으로 전유한다.
대체로 그리스 비극은 전통신화를 소재로 극화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
하게도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페르시아인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민주주의 개혁을 목격했다.
기원전 510년 참주 힙피아스가 축출되자, 508~507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권력을 가진다’
는 이소노미아(isonomia) 정신으로 행정구역 개편을 골자로 하는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또 아이스킬로스는 직접 마라톤 평원과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는데, 그의 형이 마라톤에서 적군의 도끼에 손목이 잘려 전사했다.
기원전 525년 혹은 524년에 태어난 이 위대한 비극 시인은 기원전 456년 혹은 455년에 사망했는데, 묘비명에는 놀랍
게도 그가 마라톤 전쟁에 참전한 용사라는 사실만이 적혀 있다.
전해오는 그리스 비극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472년에 대(大)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1등상
을 거머쥐었다. 이 작품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훗날 저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였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고 8년이 지난 어느 봄날, ‘페르시아인들’이 대 디오니소스 제전의 무대에 올랐다.
아크로폴리스의 남동쪽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 작품을 감상하고, 페르시아 전쟁 중에 불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神殿)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에서 패한 적국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전쟁의 과정을 바라보는 놀라운 콘셉트를 보여준다.
비극의 주인공을 페르시아 왕으로 삼은 점은 실로 획기적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사(Susa)를 무대로 펼쳐지는
‘페르시아인들’의 극은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1)페르시아의 장로들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원정을 떠난 경위를 설명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전쟁 결과를 기다린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해 불길한 꿈과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의 마음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2)사자가 등장해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일격에 무너졌다고 보고한다. 전사한 장군들의 이름을 열거하지만 다행
히도 왕은 생존했다고 한다. 불길한 꿈과 전조가 패전을 암시했던 것이다.
(3)아톳사는 다리우스 왕의 무덤에 제주를 바쳐 남편의 혼령을 불러낸다. 젊은 크세르크세스가 정신의 질병에 걸려
불경한 교만함으로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신들의 벌을 받아서 전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혼령은 분석한다.
아울러 페르시아 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4)크세르크세스 왕이 등장해 옷을 찢고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잔인한 악령이 페르시아 종족을 파괴한 것이다.
코러스는 왕과 함께 통곡하고 제국의 운명을 한탄한다.
적국의 왕과 백성들이 패전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비극이란 형식으로 재현해 보여준 아이스킬로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을 뜻하는 휘브리스(hybris)를 범한 인간이 신에게 벌을 받는다는, 그리
스 비극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프를 기본 틀로 삼으면서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상고 시대 현자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의 패턴을 ‘페르시
아인들’에 반영하고 있다.
그 인간 멸망의 패턴이란 엄청난 부와 명성으로 번영을 누리는 인간은 휘브리스를 범하고 아테(ate) 상태에 빠져 파멸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테’란 신의 개입으로 정신이 홀려 헤매다가 판단력을 잃고 정해진 한계를 망각해 파멸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멸망의 그리스적 사유 틀
그리스에 대패한 크세르크세스 왕.
페르시아 제국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아톳사는 다리우스의 혼령을 불러
낸다. 그 혼령이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그 대책을 도출하는 역할을 맡는
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다리우스를 이러한 캐릭터로 형상화하는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에
해당한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후 복수심에 가득 차서 그리스 본토를 정복
하겠다는 야욕에 불탄 존재였다.
복수의 한을 품은 채 죽은 자가 다리우스가 아닌가.
그런데 아이스킬로스는 극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 다리우스의 혼령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다리우스에게 실제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부여
하는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에 그리스적 사유의 인간 멸망 패턴을
적용한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전통적 사유 틀로써 타자인 페르시아인들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해석해 그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인간 멸망의 첫 번째 단계가 엄청난 부와 번영이다. 페르시아는 황금으로 넘쳐나는 막대한 부를 가진 나라로 번영을
구가하는 제국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부와 번영은 휘브리스를 낳는 조건이 된다.
이 작품에 나타난 휘브리스의 구체적 양상은 세 가지다.
첫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보여준 불경한 오만함이다. 그는 인간인 주제에 오만방자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리스 본토의 신상(神像)들을 약탈하고 신전들에 불을 질러 제단들을 사라지게 하고 신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등 불경죄를 자행한다.
두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자연과 세계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다리우스의 혼령이 보고하듯 크세르크세스는 배들을 이어붙여 헬레스폰토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에 부교(浮橋)를
놓았다. 이렇게 해협의 물길을 억지로 바꾸고 인간인 주제에 포세이돈 신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세 번째 휘브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 영토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의 자유 시민을 정복해 노예로 삼으려 한 것
이다. 이러한 휘브리스는, 패전의 소식이 도착하기 전에 서사된 아톳사의 꿈에서 암시된다.
그 꿈에 따르면 아시아 여인과 그리스 여인이 서로 다투게 되자 크세르크세스는 그들을 제지하고 자신의 전차 앞에
그들을 매고 목에 멍에를 얹었다. 아시아 여인은 복종하지만, 그리스 여인은 발버둥치며 두 손으로 마구를 찢어버리고
고삐도 없이 전차를 끌다가 멍에를 두 동강 낸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는 전차에서 추락하고 아버지 다리우스를 보자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이제 휘브리스는 ‘아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다리우스의 혼령은 시적으로 표현한다.
일단 교만(휘브리스)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아테)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그런데 이 단계로 넘어가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악령이다.
신/악령은 인간을 기만하고, 이로써 아테의 덫에 걸려든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크세르크세스도 지혜를 잃고
말았다.
아울러 신/악령은 전쟁에도 참여해 페르시아 제국을 파괴하는 힘으로 현현(顯現)한다.
페르시아 군대를 망가뜨리고 페르시아 종족을 짓밟으며 페르시아 남자들을 잘라버린다.
전쟁에 패해 왕궁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는 아직도 악령이 자신에게 덤벼들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패전을 도덕적 · 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재앙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페르시아의 선왕인 다리우스의 혼령은 그리스 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테네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페르시아를 통해 그리스를 보다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유물 황금마스크.
‘페르시아인들’에서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가 전쟁 상대국이었지만 페르
시아인들을 비웃거나 비하하지 않고 동등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아톳사의 꿈에서 묘사한 그리스 여인과 페르시아 여인의 두 자매처럼 말
이다.
하지만 비극 시인은 페르시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그리스의 자기 정체
성을 부각한다. 작품 속에서 페르시아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페르시아 제국은 왕이 통치하는 전제정치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에
기초한다. 태후 아톳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장로들로 구성된 코러스가
태후에게 말한다.
저기 신들의 눈과 같은 광명이,
왕의 모후이신 태후 마마께서 납시오.
나는 부복할 것이오.
우리 모두 태후 마마께 마땅히
말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또 장로들은 태후를 여주인이라고 부르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한 말이든 행동이든 두 번씩 하명하실 필요가 없사옵
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의 제기란 불가능하고 단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사자(使者)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보고하는 연설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이 제독들에게 명령하는 장면을 보면 전제
군주의 전형적인 잔인성을 엿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그리스인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면 제독들의 목을 모두
베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아테네 시민 관객은 자유 시민들의 평등에 기초한 자신들의 행동방식과는 다른 페르시아인들의 행동방식에 주목했을
것이다. 아톳사와 코러스가 나누는 대화는 전쟁 상대국인 아테네가 민주정치로 통치하는 나라임을 강조한다.
아톳사가 “누가 그들의 목자로서 군대를 지휘하지요?”라고 묻자, “그들은 누구의 노예라고도, 누구의 신하라고도 불
리지 않사옵니다”라고 코러스가 대답한다.
둘째, 페르시아 제국은 과도한 부와 사치가 넘쳐나는 왕국으로 묘사된다. 페르시아 궁전은 황금으로 장식되고 군대도
황금으로 번쩍인다. 페르시아의 중심 도시인 사르데이스와 바빌론도 황금으로 넘쳐난다.
신과 같은 인간 크세르크세스도 황금의 종족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부유함을 바탕으로 페르시아 문화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세련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갑옷이 찢긴 크세르크세스 왕이 왕궁에 도착해서 코러스에게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통곡하시오”라고 명령할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유약하고 여성적인 것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의 물질적 풍요와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방식은 절제와 검약을 중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생활방식
과 대조를 이룬다.
다리우스1세 교시를 새겨놓은 돌.
셋째, 페르시아인들은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훈육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높은 언덕에 놓인 옥좌에 앉아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
를 지켜보며 통탄하고, 옷을 찢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보병
부대에 명령을 내리고 급하게 도주했다고 사자가 보고한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무대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다.
왕은 가슴을 치고 수염을 뽑으라고 코러스에게 명령한다.
이윽고 코러스는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고 자신도 “아아”로 화답한다.
이처럼 ‘페르시아인들’의 마지막 장면은 왕은 물론 모든 백성이 패전을
슬퍼하고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통곡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당시 관점에서 보면 여성적 특성이기에 크세르크세스가
비극의 영웅이 되기엔 부족한 인물을 암시한다.
다른 그리스 비극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웅 가운데 오이디푸스나 헤라클레스는 좌절과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자신의 감정
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 왕에겐 자기 통제라는 그리스인의 미덕이 결여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페르시아인은 전쟁에서 무질서하게 행동하고 비겁했다.
사자의 보고에 따르면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앞둔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함성에 벌써 크게 실망해 겁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결전을 앞두고 지휘관의 통솔하에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저녁식사를 준비
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또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자 페르시아인들은 무질서하게 허둥대며 도망친다. 전투방식마저 페르시아인들의 비겁함과
그리스인들의 용감함을 대비시킨다. 페르시아인들은 비겁하게도 멀리 떨어져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는 것이 장기지만,
그리스인들은 용감하게도 창과 방패로 무장해 적과 맞서 싸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제정치의 위계질서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 풍부한 물질로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는 것, 과도하게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 전쟁에서 무질서하고 비겁하게 도망
치는 것과 같은 악덕을 보여준다.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
고자 한다. 민주정치로 자유 시민들이 평등한 권력을 가지는 것, 절제와 검약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 감정을 잘 절제
하고 통제하는 것, 전쟁에서 질서 있고 용맹하게 적과 맞서는 것과 같은 미덕을 부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페르시아인들’에서는 그리스인이 비록 소수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진 다수의 페르시아인과
맞서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자가 살라미스 해전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아이스킬로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인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물론 다른 장수들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임진왜란의 명량대첩을 서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언급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 페르시아 장군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용맹과 무용을 강조한다. 아미스트레스, 아르타프레네스, 메가바테스,
아스타스페스, 아르템바레스 등 낯선 이방인의 장군 이름들이 허황되게 관객의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그리스 군사들이 살라미스 해전에 임하면서 외치는 함성만이 관객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리라.
오오, 헬라스인들의 아들들이여, 진격하라!
우리의 조국을 해방하라!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과,
조국의 신들의 처소들과, 조상들의 무덤을 해방하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에서 인용)
이렇듯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공동체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 작품의 영웅은 평등한 자유 시민들이 일체가 되어 단결하는
도시국가 공동체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의 강건함이 페르시아인들의 무기력을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리엔탈리즘
전쟁은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다. 기원전 472년에 공연된 비극 ‘페르시아인들’은 페르시아 전쟁
을 극화한 것으로 그리스인들이 타자 페르시아 제국과 교류하고 충돌하면서 무엇을 성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비극 작품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비극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색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한 페르시아인들의 운명을 동정하면서도 그 패전의 원인을 분석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인들은 자기의 사유 틀로 타자의 비극을 정당화한다. 상고 시대 현자와 시인들이 개진한 인간 멸망
의 패턴으로 페르시아인들의 재앙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타자 페르시아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함으로써
자기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부각한다.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위계질서, 엄청난 부와 사치, 감정표현의 과도함, 무질
서, 비겁함에 대해서 그리스의 민주정치와 평등주의, 검약과 절제, 자기훈육과 질서, 용감함을 맞세운 것이다.
요컨대 동서양 문명의 충돌인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인에게 자기(그리스) 안에서 타자(페르시아)를, 타자(페르시아)
안에서 자기(그리스)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의 분석과 해석을 계승한 헤로도투스는 서양과 동양,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 전제정치와 민주정치의 이분법을 더욱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오리엔탈리즘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사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도서
● 김기영, 「아이스퀼로스 비극에 나타난 전쟁관」:『페르시아인들』,『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수들』,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서양고전학 연구』, 37(2009).
● 천병희 옮김,『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고양: 숲, 2008.
● 천병희 옮김, 헤로도투스 『역사』, 고양: 숲, 2009. 홀랜드, 톰, 『페르시아 전쟁-최초의 동서양 문명 충돌,
지금의 세계를 만들다』
● 이승호 옮김, 서울: 책과 함께, 2006. Hall, Edith, Inventing Barbarian. Greek Self-Definition through Tragedy,
Oxford1989.
확대경 페르시아 전쟁 小史
오리엔트를 통일한 巨大 제국, 그리스에 무릎 꿇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정리해보자.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지중해 일대로 세력을 뻗치려 했다. 그런데 소아시아 지역에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들이 걸림돌이었다.
페르시아가 이들 도시를 압박하자,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선단(船團)을 보내 이 봉기를 지원했다.
처음에 이오니아인들은 승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페르시아 왕권의 중심인 사르데이스를 접수했다.
사르데이스는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이윽고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종족이 봉기에 가담해, 페르시아 제국에
저항하는 불길이 최고조로 타올랐다. 하지만 봉기의 기세도 이오니아인들이 498년 에페소스 전투에서 패하자 시들기
시작했다. 494년부터 페르시아는 봉기에 가담한 도시들을 차례로 진압해 이오니아를 평정했다.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인들의 봉기를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고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려는 대규모
원정을 계획했다.
제1차 원정은 기원전 492년 시작됐지만,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 난파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자연의 힘이 그리스인을 도운 셈이다.
491년 다리우스 왕은 그리스 전역에 사자를 보내 물과 흙을 복종의 상징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많은 도시국가가 이러한 요구를 수락했지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들, 그리고 아테네는 거절했다.
490년에 시작한 제2차 원정은 함대 600척, 지상군 20만명, 기병 1만명 규모로 이뤄졌다.
이오니아 봉기를 도운 에레트리아를 잿더미로 만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때 종교행사를 치르던 스파르타는 군대를 파병하지 못했다.
어쨌든 아테네의 1만 중갑병은 1000명의 연합군과 함께 마라톤 평원에서 보병 10만과 기병 1만의 페르시아군과 대치
했다. 마침내 두 진영이 격돌한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좌우익에서 우세를 보이고 무너진 중앙을 상쇄하며 페르시
아군을 해안으로 밀어냈다. 한 전령이 오늘날의 마라톤 풀코스 거리를 달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전의 소식을 전하고
죽었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지 수년 후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오랜 준비기간을 거친 뒤 기원전 480년 시작한 제3차 원정은 크세르크세스 왕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지상군 260만명과 1207척의 3단 노선 등으로 무장한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스파르타를 맹주로 삼아 테르모퓔라이에 1차 저지선을 설정했다. ‘뜨거운 문’이라는 뜻인 테르모퓔
라이는 중앙 그리스로 진입하는 협로로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다. 여기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300명
의 결사대가 연합군과 함께 사흘간 결사 항전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꺾고 수많은 적을 도륙했다.
결국 협공을 당해 스파르타인 모두가 몰살되고 말았지만 도덕적으로는 승리한 전투였다. 테르모퓔라이 협로가 열리자,
그리스 연합군은 이스트모스를 2차 저지선으로 결정했고, 아테네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아크로폴리스마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스 연합군은 코린토스 지협을 수비하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함대는
살라미스 섬 주변에 포진했다. 거짓 정보에 속은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 안으로 진입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함대가 해협 안에 갇혀 포위되자 사방에서 그리스 함선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페르시아의 배들이 서로 부딪쳐
침몰하고 그리스 중장보병들이 배 위에 올라타 페르시아인들을 죽였다. 페르시아군 시체와 난파선 파편이 해협을 뒤
덮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지상군을 남기고 귀환했다.
479년 페르시아 군대는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지만 패전하고 만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소아시아 연안까지 추격했다. 결국 그리스 본토를 정복해 복수하려던 크세르크세스
왕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2. 도둑질 살육 강간 밥 먹듯 한 켈트 전사, 유럽통합 이데올로기 되다
우리에게 문명의 충돌과 교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 문명의 미래는 무엇인가.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으로 이슬람과 기독교의 만남,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조우한 예수와
공자,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여성의 문화충격까지 문명의 교차로에서 벌어진 에피소드 열네 꼭지를 독자께
차려 올린다.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유럽의 기원 격인 켈트족 이야기를 준비했다. 문명의 교차로를 뚜벅뚜벅 걸어가보자.
켈트족이 범유럽적 정체성의 담지자로 주목받고 있다.
1992년 2월7일, 유럽 12개국이 마침내 마스트리히트조약을
정식으로 비준했다.
이로써 일부 유럽은 하나의 정치·경제적 통합체로 거듭났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체를 결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1992년 무렵만 하더라도
유럽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지 채 반세기가 경과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따라서 유럽 각지에서 마스트리히트조약을 반대하는 시위
가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럽 통합을 정당화하고자 여러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켈트족이었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유럽 중부와 서부에 살았던 켈트족이 선사시대에 이미 유럽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면서 통일된
문화적 전통을 이룩했던 집단으로 새롭게 조명받았다.
즉 우리가 흔히 단군과 고조선으로부터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듯이, 당시 유럽 통합을 주도하던 정치 세력들은 켈트족
에게서 오늘날 모든 유럽인이 공유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1992년 베니스에서는 ‘켈트족, 유럽의 기원(The Celts, the Origins of Europe)’이라는 전시
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렇듯 켈트족은 찬란한 선사 문화를 이룩한 주체이자 범유럽적인 정체성의 담지자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 대부분이 가진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켈트족이라고 하면 대개 로마를 약탈한 미개 집단, 벌거벗은 채 파란색 물감을 뒤집어쓰고 전쟁을 하던 야만인, 혹은
만화 ‘아스테릭스’에 나오는 술 잘 마시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전사 등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켈트족은 그리스·로마의 문명 세계와 적대 관계를 맺었던 야만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켈트족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이해에서 비롯한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켈트족은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문명 세계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집단들도 켈트족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으며, 특히 켈트족이라는 비(非)문명화된
타자(他者)를 통해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되돌아보았다. 즉 켈트족과 문명 세계는 단순히 충돌만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했던 것이다.
벌거벗은 야만人
켈트족의 철기시대 유적.
우리가 이른바 켈트족이라고 하는 집단은 유럽에서 철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기원전 800년경에 중부·서부유럽을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켈트족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된 집단이었다.
따라서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는 철기 시대 이전, 즉 청동기 시대
로 거슬러 올라가 중부와 서부유럽에서 일어났던 정치·경제·사회
적 변화를 살펴보면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과 접촉하면서 야기됐다.
기원전 1900년경, 지중해 동단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이 발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남쪽지역에서
미케네 문명이 나타났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성장하면서 그리스 지역은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
중심지로 거듭났다.
크노소스 궁전이나 미케네 성채 등에서 나온 풍부한 양의 유물이 이를 입증해준다.
그리스인은 지중해 지역의 자원을 거침없이 소비했고, 지중해 지역 내에서 충당할 수 없는 물자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
멀리 떨어진 이방 세계로부터 들여왔다.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초기 단계에는 주로 동쪽, 즉 레반트 지역과 인더스 문
명권과의 교역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고 그리스 지역 내 소비가 증가하자 그리
스인은 새로운 교역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지역 서쪽으로, 즉 중·서부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의 풍부한 청동 원료 때문이었다. 미노아·미케네 사회에서 청동기는 개인의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사용되었다. 즉 청동으로 된 무기류나 장신구를 통해 엘리트는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청동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원료인 구리와 주석은 지중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청동 원료가 풍부한 중·서부 유럽 지역과 교역하기 시작했다.
청동을 매개로 그리스 문명권과 접촉한 중·서부 유럽 집단들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미노아·미케네 문명의 수요로 인해 그리스 지역과 인접한 발칸 반도에서 많은 양의 청동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광산에서 구리를 캐는 작업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노동이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자발적 노동으로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의 구리 광석을 채굴하던 예전과 달리, 노예 노동력에 의존해 구리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으로 중부 유럽 지역의 청동 생산 시스템의 규모는 확대되었으나,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이면엔 구리 채광을 전담하는 노예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노예 계층의 형성은 위계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권과의 접촉은 중·서부 유럽 교역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또한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중·서부 유럽에는 벌써부터 광범위한 교역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교역망을 통해 중부와 남동부 지역의 청동기가 대서양 연안, 북부 스칸디나비아 지방, 발트해 지역 등으로 전해졌고,
그 대가로 지급된 호박석이나 모피가 다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교역망의 각 지점에는 외국산 제품과 현지 물품 교역을 관장하는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 특권을 기반으로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게다가 이러한 기존 교역망에 그리스의 원거리 교역이 가세하면서 교역 물량이 늘어났고, 그 결과
교역을 조직하던 집단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었다.
또한 교역을 관장하던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선진 문물을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자신들과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을 더욱 차별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의 엘리트 무덤에서 발견된 미케네 문명의 접이식 의자가 그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리스 문명권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그 교역망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차별화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戰士 문화
10세기 영국 웨일스에 도착한 켈트족 생활 모습을 재연한 모습.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던 그리스 지역과의 교역은 중부와 서부 유럽
사회의 계층적 분화를 자극했다.
이로써 확고한 귀족층이 존재하는 켈트족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기원전 1000~800년경에는 철기 생산 기술이 그리스 지역을
통해 중·서부 유럽으로 전파됐는데, 이것은 유럽의 철기 시대 사회,
즉 켈트족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근간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철로 만든 제품은 청동기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철제 도구나 무기는 청동으로 만든 제품보다 더 단단하며 날도
더욱 뾰족하다. 그런데 철의 또 다른 특징은 원료인 철광석이 청동의 원료인 구리와 주석보다 더욱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며 그 매장량도 훨씬 더 풍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범유럽적인 교역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철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원료
를 이용해 생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의 집단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
었고, 그 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역 정치체(polity)들이 등장했다. 고
고학자들은 이와 같은 지역 정치체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흔히 ‘족장 사회’ 혹은 ‘군장 사회’라고 부르는데, 켈트족 사회
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중요한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켈트족 사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 철이라는 소재는 청동에 비해 확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중부와 서부 유럽의 철기 시대 집단들,
즉 켈트족은 철제 무기뿐만 아니라 철제 농기구도 만들어 사용했다.
땅을 더 깊게 갈 수 있는 쇠로 만든 보습이나 수확을 더 용이하게 하는 철제 낫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청동기 시대보다 크게 높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성장은 켈트족 사회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었다.
‘아스테릭스’의 주인공 아스테릭스는 켈트족이다.
한편 농업 생산성 향상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인구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농경지의 과도한 경작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나타난 기후 변동으로 환경 조건마저 악화
하면서 중·서부 유럽에서 자원에 대한 과도한 경쟁이 일어난 것
으로 보인다.
실제로 철기 시대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군사적 갈등 증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군사적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선 전장에서의 용맹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전사의 삶을 추앙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켈트족 남성에게 전사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 조건이 갖춰지면서 켈트족 사회를 이루는 독특한 요소가 자리 잡았다. 먼저 눈여겨
볼 만한 것이 그들의 ‘전사 문화’다. 켈트족에 관한 로마 기록들을 보면 지역 간 편차는 있겠지만, 상당수 켈트족 남성
이 전사 집단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사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검이나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다녔다.
또한 켈트족 전사들의 무덤 발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전사의 모습을 갖춘 채 저승으로 갔다.
노예를 팔고, 술을 사다
켈트족 전사들은 줄곧 전투에 가담했다. 그런데 당시 전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투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즉 켈트족의 전투는 상대방을 완전히 복속하고 전멸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실제 전투라기보다는, 전사 집단의 전사적
정체성을 표출·재생산하고, 또한 전사 집단 간 힘과 우월함을 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경우가 많았다.
로마 기록에 이러한 켈트족 전투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전투에 가담하는 양측에서는 각각 한 명의 전사가 대표로 나와 싸움을 펼쳤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전사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기편의 승리를 응원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양한 물질문화와 퍼포먼스를 통해 과시하고 확인하는 것이 켈트족 전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켈트족 전사 문화의 이 같은 측면이 구현되는 또 다른 장은 만찬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켈트족 전사들은 위계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만찬 때 싸움 잘하는 순서로 자리에 앉았고, 고기를 먹을 때도 서열대로 먹었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옛 전투의 용맹스러운 기억을 회고했으며, 이웃 집단들과의 오래된 갈등을 다시금 상기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즉흥적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만찬이 실제로 약탈로 이어지는
예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왁자지껄한 만찬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다.
켈트족이 일상적으로 마신 술은 벌꿀을 발효한 미드(mead)와 맥주로, 둘 다 알코올 도수가 낮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선호한 술은 와인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던 가장 독한 술이자 보관하기 쉬운 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옛 켈트족 땅에서 와인을 생산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켈트족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와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지중해 세계에서였다.
켈트족에게 와인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들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다음, 잠시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기원전 8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도시국가들은 식민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식민지를 세웠고, 그곳에서 유럽 내륙의 켈트족 집단들과 교역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대표적 그리스 식민지가 오늘날의 마르세유인 마살리아(Massilia)다. 이 같은 식민지를 기점으로
그리스인들은 중·서부 유럽으로 와인을 공급했고 그 대신 모피, 햄, 주석, 노예 등을 가져갔다.
그리스인들에 이어 로마인들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켈트족 집단들에게 와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
시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켈트족이 얼마나 와인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와인을 얻고자 얼마나 쉽게 노예를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내에서는 노예 한 명당 대형 항아리 5~6개 분량의 와인을 받을 수 있었으나, 켈트족과의 교역에서는
노예와 와인 항아리를 일대일로 교환했다. 켈트족 집단들이 와인을 마시려면 노예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만 했을 것
이다. 따라서 이웃 집단을 약탈하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던 켈트족 전사의 행위는 자신들의 전사적 정체성을 과시
하는 수단이면서 생활필수품 격인 와인을 확보하는 방편이었다.
켈트족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의 귀족 문화다. 켈트족 엘리트는 위세품 확보와 과시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하고 재생산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귀족 문화에서 지중해 지역의 선진 문물은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
했다. 우선 켈트족 엘리트는 귀한 와인뿐만 아니라 그러한 와인을 우아하게 마시는 문화까지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라인강 상류의 빌징엔(Vilsingen) 유적과 카펠(Kappel) 유적 등에서 발견한 로도스
섬 양식의 주전자(Rhodian flagon)들이다. 주전자의 형태를 가진 이 청동제 술병들은 공중토론이 이뤄지던 와인
파티인 그리스의 심포지엄(symposium)에서 사용된 물품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한 용도의 용기가 켈트족 영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켈트족 엘리트가 그리스의 세련된 와인
음주 문화를 모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지역의 우아한 와인 음주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켈트족 엘리트의 의지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비(Vix) 유적에서 발굴한 대형의 청동제 술 단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크레이터(crater)라는 전문 용어로 불
리는 이 용기는 만찬 석상에서 와인과 물을 섞을 때 사용했다. 켈트족 사람들이 와인을 물에 섞지 않고 그냥 마시는
바람에 쉽게 취하고 난동을 부린다는 그리스 저술가들의 기록을 떠올리면 이러한 크레이터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다.
높이 164㎝, 무게 208㎏인 이 술단지는 아마도 스파르타나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라고 불리는 이탈리
아 남부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주문 제작했고, 그리스인들이 직접 운송해 와서 현장에서 조립했을 것으로 보인다.
켈트족 엘리트는 지중해 집단을 통해 더욱 멀리 떨어진 세계의 물품을 소개받기도 했다. 예컨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호크도르프(Hochdorf) 무덤의 주인인 켈트족 족장은 중국산 비단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옷을 입은 채 매장
됐다. 또한 독일 내 다뉴브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호미헬레(Hohmichele) 유적의 제6번 무덤에 묻혔던 여성은 중국산
비단 띠로 장식한 매우 고급스러운 모직 원피스를 입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로 이 무덤은 기원전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곳에서 발견한 비단은 현재 유럽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비단이기도 하다.
켈트족 엘리트는 그리스 지역의 건축 양식도 받아들였다. 요새를 축조할 때 그리스 양식을 활용했다 .
다뉴브 강이 내려다보이는 독일 호이네부르크(Heuneburg) 요새는 기원전 600~530년경에 아마도 그리스인 건축가
감독하에서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리모델링된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성벽은 규격화한 크기와 모양의 진흙 벽돌로
축조됐다. 또한 성벽 북면에는 장방형의 보루가 추가됐는데, 이것은 실제로 방어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요
새 전체에 웅장한 느낌을 주고자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볼 때, 켈트족 엘리트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고자 지중해 세계의 물질문화는 물론 그 표현 방식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점령한 켈트족
위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켈트족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그들의 본토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이러한 켈트족의 이주가 인구 증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으며, 고고학자들도
이러한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본토 내에서 켈트족의 인구압이 높아지자 엘리트 전사들이 주민 일부를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주를 시작한 켈트족 무리는 이탈리아 반도가 있는 남동쪽을 향해 내려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은 그들이
이탈리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 그곳의 우수한 자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예를 들어,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인 ‘박물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알프스 산맥으로 인해 갇혀 있던 갈리아인(켈트족)들이 (중략) 처음으로 이탈리아 내로 넘어오게 된 것은 헬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갈리아 출신의 시민 때문이었다.
수공업 장인이었던 그는 로마에서 살다가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갈 때 말린 무화과와 포도, 그리고 몇몇 종류의 올리브
유와 포도주를 가져갔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이러한 물품들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켈트족 전사를 묘사한 조각‘죽어가는 갈리아인’.
물론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지중해 세계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켈트족 무리가 왜 이탈리아로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기원전 5세기 후반경에는 북부
이탈리아의 포 강 주변에까지 정착했다.
그들 중 세노네스(Senones) 부족은 이후 남쪽으로 더 내려가
이탈리아의 토착 집단 중 하나인 에트루리아인들의 영역을 침범
했다.
그런데 이 무렵 로마 공화국은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하나씩
복속하며 북쪽으로 영역을 넓히던 중이었다. 따라서 두 집단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세노네스 부족이 원한 것은 정착할 땅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외교적으로 논의하고자 로마 공화국 대표를 기원전 391년 클루시움(Clusium)이라는 도시에서
만났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자 몸싸움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로마 측 대표 한 명이 켈트족 전사를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켈트족은 결국 무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기원전 390년 7월18일 알리아 강변에서 로마 군대를 쉽게 물리
친 다음, 해질 무렵에 로마에 도착했다. 이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로마 시민 대부분은 피난길에 올랐고, 몇몇 군인
과 그 가족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에 있는 성채로 피신했다.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켈트족이 자행한 살인과 방화, 도둑질과 약탈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눈과 귀는 물론 생각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적군의 고함소리, 여성과 소년들
의 비명소리, 화염의 포효,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점령했으며 결
국 황금 1000파운드(약 450㎏)를 받고 떠났다고 한다. 켈트족의 약탈은 로마 시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남겼으며,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수백 년 후에도 사람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한편 본토를 떠나 동쪽으로 향한 켈트족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 걸
쳐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에 도착했고, 기원전 4세기경에는 발칸 반도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무렵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켈트족 세계와 지중해 세계는 또다시 충돌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335년 알렉산더 대왕은 세 명의 켈트족 대표를 마케도니아에 있는 그의 궁전으로 불러 ‘우정과 환대의
협정’을 맺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한 토막 있다.
알렉산더가 켈트족 대표들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자신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대답을 예상했던 알렉산더는 “잘난 척하는 놈들”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켈트족 집단과 평화가 유지됐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후에 일어난 정치적 분란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이 약해지자 켈트족 집단은 다시금 마케도니아
영토를 호시탐탐 노렸다.
결국 기원전 280년 마케도니아로 침입한 켈트족 군대가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고 왕을 살해한 다음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아 전시했다고 한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누리던 부에 이끌려 남하한 켈트족 집단도 있었다.
기원전 279년에는 켈트족 한 무리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리스 군대를 물리친
다음 델피까지 내려갔다. 이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을 성공적으로 약탈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폴론이 천둥과 번개,
지진을 일으켜 이들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약탈 사건은 로마의 약탈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에게 큰 충격을 남겼다. 또한 이는 문자로 기록돼 후대에까지 전
해졌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야만적’인 켈트족에 관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마지막으로, 소아시아로 이주해서 켈트족 왕국을 세운 무리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비티니아(Bithynia)의 왕 니코메데스는 세 집단의 켈트족 부족을 초대해 이웃 왕국과의 분쟁 지역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이후 이 켈트족 집단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고원 지대로 옮겨가 갈라티아(Galatia)
라는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를 거점으로 이들은 주변 왕국을 약탈하며 안락한 삶을 유지했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경,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가 지역에 있는 왕국들에 대한 켈트족의 약탈이 너무 심해지자, 그 왕국
들의 맹주인 페르가몬(Pergamon)이 기원전 233년 켈트족을 소탕했다.
도둑질과 살육, 강간
지중해 세계 주민에게 켈트족과의 충돌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켈트족과의 만남을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선 켈트족 전사들은 지중해 지역 전역에 걸쳐 용병으로 고용됐다. 예컨대 기원전 369~368년에는 시라쿠사의 왕
디오니시우스 1세가 켈트족 용병 2000명을 고용해 동맹국인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이것은 아마도 켈트족 용병이 고용
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마케도니아 계통의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도 기원전 277~276년에 4000명의 켈트족 용병을 고용
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탄로 나자, 용병들은 나일 강 한가운데에 있는 무인도에 갇혀
굶어 죽거나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라티아 켈트족에게 약탈당한 소아시아의 왕국들도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을 보면 문명화한 지중해 세계와 켈트족 세계와의 충돌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폴리비우스, 파우사니아스, 리비우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는 로마공화
국이 전성기를 맞아 켈트족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나가던 시기다. 따라서 이들은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화한 시스템이 어떻게 외부 집단을 물리쳐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즉 국가의 통제가 존재하
는 지중해 세계의 이성적이고 문명화한 질서를 원시적인 켈트족의 야만과 혼란, 야생 등과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저술가들은 켈트족을 묘사할 때 특히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정반대되는 측면들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 세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자 했으므로 켈트족은 존경할 만한 적수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미개한 고귀
함(savage nobility)을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켈트족을 다룬 당시의 미술 작품에도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갈리아인(The Dying Gaul)’은 켈트족 전사의 모습을 나타낸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
이 조각은 원래 위에서 언급한 갈라티아에 대한 페르가몬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건축물을 장식했다고 한다(참고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이 작품을 베낀 로마인들의 모사품이다).
이렇듯 켈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자 만든 작품인 만큼, 죽어가는 켈트족 전사의 모습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존경
할 만한 적수의 면모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켈트족의 위협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들에 관한 또 다른 이미지가 형성됐다.
알프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한 로마의 정복이 완성될 무렵 그리스 저술가 포세이도니오스는 ‘역사’에서 이 지역의 켈트
족에 대한 민족지적 정보를 전했다.
여기에서 그는 켈트족 사람들의 용감함과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친절 등을 특별히 높게 평가했다.
심지어 전쟁을 좋아하는 그들의 급한 성질을 치기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명사회가 아닌 이 미개한 켈트족
집단들이야말로 지혜로운 자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황금의 시대’에 근접했다고 보았다.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 켈트족이 더 이상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자, 그들은 로마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
보게 하는 존재로도 인식됐다.
예를 들어, 네로 황제의 통치하에서 활동하던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로마 지배층의 무능력함과
로마 사회 전반에 스며든 향락과 정신적 해이, 그리고 개인 자유의 소멸 등을 켈트족을 통해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다.
그는 ‘아그리콜라’에서 로마 군대에 맞섰던 영국의 켈트족 수장 칼가쿠스의 입을 빌려 로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
했다. “세상의 약탈자들, 그들은 무차별적인 강탈로 땅을 고갈시켰으며 (중략) 도둑질과 살육, 강간에 ‘정부 통치’라는
거짓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들은 황폐함을 가져와 그것을 평화라고 한다.”
충돌의 時代
언론 매체와 관련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는 오늘날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한쪽에는 알카에다, 탈레반 등으로 대변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국이 이끄는 서방 세계가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돌이켜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약 2000년 전에도 있었다.
즉 켈트족이 지중해 세계를 공격하자 이 충돌의 사건들은 자극적 이야깃거리가 되어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에 의해
기록됐고,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켈트족과 지중해 세계 사이
에는 매우 오래된 교류의 역사가 있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상생의 관계가 있었다.
다만 이와 같은 사실은 ‘충돌’이라는 강력한 이미지에 의해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는 결국 자극적인 충돌의 사건
들로 인해 자칫 간과하기 쉬운 공존과 협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이른바 ‘충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3. 사도 바울 문명의 길목에서 종교를 건설하다
바울은 이동하는 허브(hub)였다. 교차로에 서서 예수를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으로 알렸다.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바울은 기독교를 누구나 말 걸 수 있는
보편 종교로 키워냈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이민족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튀케
(운명의 여신)에게 감사했다”고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2세기경 한 유대교 랍비는 사람들은 매일 다음 세 가지를 찬양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여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무지한 자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비유대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라고 부른 이민족과의 대립을 통해 탁월하고
자유로운 그리스인이라는 자의식을 만들어갔다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세상 민족들, 즉 이방인(Gojim)과의 날카로운 구별을 통해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타자였다.
이방인을 부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정결하고 가치 있는 유대민족이라는 표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통념을 깨뜨리는 소리 이방인의 사도
이와 같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자명하고 마땅한 세계에 사뭇 도전적인 출사표를 던진 인물이 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그 운동에 투신한, 바로 사도 바울이다.
이방인의 사도! 극적인 회심 이후 스스로 사도가 된 이 예외적인 인물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며 등장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천명은 이미 자기-타자, 중심-주변이라는 고대 세계의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리는 파격이었다. 그는 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은 누구나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언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낯선 선언이었다.
그것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을 특정한 땅과 그 땅의 신, 그 신을 예배하는 종교와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정체성에 대한
당대의 어법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의 통념으로 보면 쓸모없는 존재였던 이방인들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유대인의 고유한 유산을
그들과 공유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위에 새로운 공동체 원리를 세우고자 했다.
바울은 문명이 교차하는 대도시를 오가면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아주 익숙해서 견고한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린 바울의 이러한 급진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목소리(비전)의 힘이라고 흔히 말한다.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 비전을 활성화한 개방성과 탄력
성은 그가 속했던 헬레니즘 세계의 정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유대 땅을 떠난 유대인이며, 헬레니즘 문화가 공기처럼 꽉 차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그리스어로 말하고 상당히 능숙한 수사학을
구사하며,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알았다.
편지 글에서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하면 약하고 말주변이
변변치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바울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삐걱거리며 공존하던 자기 세계와 닮았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그 세계와 제대로 싸울 줄 알았다.
바울의 다문화적 배경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세계가 우리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이래 우리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근대 국가들과 여러 지역
을 잠식해가는 강압적이고 도도한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편승하려는 욕망과 지역의 저항적인 문화 전략들이
충돌하고 공모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민 공동체, 이주 노동자, 정치 망명객,
난민 등 각양각색의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다문화, 다민족 사회가 늘어가
지만 폭력과 차별, 편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연대를 확립해 더욱 정의롭고 더욱 나은 공동체
를 이룰 것인가? 우리 시대가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행보는 유사한 상황들과 그 해법에 대한 고대 말기 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때론 깊은 울림을 준다. 바울과 그의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기독교를 넘어 바울 보기
신약성서와 기독교 외경들에서 바울은 예수의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베드로와 맞먹거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4세기 무렵 확정된 기독교 정경(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을 바울의 편지들이 차지했다.
기독교 운동을 ‘예수는 부활하셨다’라는 하나의 선언으로 집중시킨 바울의 신학이 복수의 기독교 운동 가운데 확고하
게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수가 새로운 집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바울은 그 집의 주춧돌을 놓고 골격을 세웠
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대에 바울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예수처럼 바울도 온존하는 세상과 불화했다.
사람들을 선동해 새로운 대열로 이끌었으며, 오래된 관습에 저항하고 위선과 단호히 맞섰기 때문이다.
으레 그렇듯이 거센 반발, 물리적 공격, 집요한 의심이 그를 괴롭혔다.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 기독교 내부의 만만찮은 적수들도 자주 걸림돌이 됐다.
역사적으로도 바울은 누구에게나 복음의 사도, 즉 ‘좋은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예수의 소박하고 순수한 복음을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 체제에 순치시키고 나약한 죄의식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바울이라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러한 혐의는 바울이야말로 “나쁜 소식의 전달자(the Dysangelist)”라는 니체의 전복적 표현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가부장적 도덕과 여성에 대한 편견, 노예제도에 대한 보수적 태도, 반유대주의 등 기독교 역사의 권위적이고 부정적
측면들을 모두 바울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인 담론은 여전히 통용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울에게 투사하고, 예수를 순수한 원형으로 복원하려는 하나의 신화적 작업이다.
한편 최근의 연구들은 부정적 바울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이 바울이 직접 쓴 편지보다는 후대 교회 상황에 맞게 각색한
바울 전승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의 모순적이고 애매한 태도까지 다 문제 삼을 까닭은 없다.
기독교 역사와 거의 등치된 바울이나 완전무결한 바울이나 모두 구체적 시공간을 살았던 인간 바울을 보기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바울은 기독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우며, 기독교 역사의 무게를 덜고 그 자신의 시대로
되돌려놓을 때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대략 기원후 50년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은 막 태동하던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과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자, 그 시대와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다.
학계에서 대체로 합의하는 바울의 친서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은 자기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바울로 안내하는 길잡이다(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의 대부
분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름을 빌린 편지들보다는 주로 바울의 친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바울은 그가 살았던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적 지평에 뿌리박고 있다.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정신사적 흐름, 유대인들의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과 종교가 바울이라는 한
인간 안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의 전형적 인물로서 어떻게 자기 시대의 언어로 문화의 창조자가 됐는지 보자.
헬레니즘 세계와 디아스포라 유대인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 혹은 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서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문화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다문화 상황이 지속되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가 유지된 로마제정 때
까지 계속되었다. 정복을 통해 갑자기 출현한 이 ‘하나의 세계’는 당시 지중해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체감한 세계의
크기와 그들이 경험한 세계의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세계는 더 이상 예측가능하고 질서정연하며 동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서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각자의 언어와 관습, 저마다의 법에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방식
과 사고방식도 바뀌어갔다.
헬레니즘 세계의 도시들은 모델이 된 그리스 도시들과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자세한 경관은 훨씬 복잡하고 더 개방
적이었다. 그 속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피정복민, 기회를 찾아 식민도시에 정착한 이민자, 정복전쟁에 고용되어 떠도
는 용병, 부역에 동원된 노동자, 유랑하는 배우, 정치 망명객, 멀리서 끌려온 노예들, 도망친 노예, 떠돌이 예언자,
철학교사 등 다양한 배경과 사정, 이질적 욕망을 가진 뿌리 뽑힌 존재들이 뒤엉켜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 전쟁이나 정복에 의해 고향땅과 가족 형제, 신전과 종교로부터 유리된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이고 변덕
스러우며 불안한 세계였다. 각 도시의 신과 도시의 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옛 관념들은 더 이상 그 질서가 유지되
지 못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확대된 세계 속에서 엄습하는 불안과 절망에 빠지거나, 더 확장
된 새로운 삶의 지도와 틀을 갈구했다. 마치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람들과 같았다. 이제 돌아갈 고향땅이 아
니라 새로운 목적지, 새로운 고향땅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 세계는 고대의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었으며, 이따금 절호의 기회도 되었다.
예수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를 통한 만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세계 속에서였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그러한 헬레니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던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현재 터키 소재)에서 태어
났다. 일찍이 히타이트 시대에 창건된 타르수스는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에 귀속되었다가 기원전
66년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동서 문화의 교차지요, 많은 철학자와 시인을 낳은 유서 깊은 도시였다.
타르수스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키드누스 강을 따라 지중해 교역과 연결됐으며 로마의 주요 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 특산품으로 킬리키움(cilicium)이라고 불리는 양탄자가 유명한데, 바울도 양가죽이나 천으로 천막을 만들어
팔던 가업을 물려받았다. 바울은 선교활동 중에도 공동체에 신세지지 않으려고 계속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땅에 터를 둔 농부가 아니라, 기술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일하고 살 수 있는 도시의 수공업자였기에 가능했다.
바울이 염두에 둔 세계 자체가 도시들이 그물처럼 연결된 헬레니즘 세계였으며 주요 청중도 도시민이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은 대부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키아, 아카이아의 코린토스,
소아시아의 에페수스, 갈라티아의 안키라와 같은 로마 속주의 수도들이었다.
이러한 대도시들은 문화적 인종적 계급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했다.
바울이 성장과정과 생활환경에서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집단, 여러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끊임없이 그들과 교유했다는 의미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 밖에 살았지만 율법을 엄수하던 바리사이파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서 8일째에 할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천막기술뿐 아니라 토라도 배웠다. 율법을 지키는 데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요, 혈통적으로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다고 자부했다.
헬레니즘 도시 문화 못지않게 유대인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도 바울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탈중심적 행로와 경계 넘기
이처럼 바울은 두 세계,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았던, 그야말로 경계인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민족의 세계가 교차하는 도시환경은 많은 것을 자기화하고 적응, 동화시킬 수 있는 바울의 탄력
적인 정신의 요람이었다. 그는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었고 기독교 운동에 투신하고도
대부분의 삶을 여러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 위에서 보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겠다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진리와 소명에 눈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뒤의 바울은 어떤가? 갈라디아서의 자전적 기술에 따르면 회심 직후 그는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던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 운동의 권위자인 예수의 사도들, 생전에 예수를 알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자기 경험을 누구와 의논하거나 공식적인 중심에 의뢰해 인준받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왔고, 3년 만에야 예루살렘을 찾았다.
보름간 베드로와 함께 지내며, 야고보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조용한 방문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도 머뭇거리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바울의 행로는 중심을 확대하기보다는 외부를 무한히 넓혀서 급기야 외부와 내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무너
뜨리는 탈중심적 방식이었다.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바울은 킬리키아,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로마제국의 동쪽 도시 곳곳에서 계속 여러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여행자였다.
로마제국의 훌륭한 도로와 토목기술 덕에 여행이 일상화했더라도, 길 위의 갖가지 위험, 추위와 굶주림을 감수해야
했다. 바닷길에 배가 난파해 여러 날 망망대해에 떠 있던 적도 있었다.
도시에서는 이방 사람과 동족들 모두에게 여러 번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렇게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의
결실을 가지고서야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회합의 쟁점은 이방인 기독교 신자의 할례 문제였다. 비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자, 유대인들 사이
에서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바울은 일부러 할례를 받지 않은 티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의 의견은 단호했다. 이방인 신자의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 기독교인이 누리는 자유를 다시 빼앗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팽팽한 설전 끝에 이방인 신자는 할례가 필요 없지만, 음식 금기를 비롯한 몇몇
율법조항은 지켜야 한다는 타협적인 중재안이 나왔다. 예루살렘 회합은 갈등의 불씨를 남긴 채 일단락됐다.
터키 고대도시 에페수스 중심부의 도서관 유적.
그 뒤 수 년 동안 바울은 동쪽 도시들의 선교를 마무리하고 로마를 거쳐 당시 서쪽 끝이던 에스파냐로 갈 염원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전에 가난한 예루살렘 교우들을 돕고자 그리스 교회들에서 모은
구제금을 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됐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환대와 안전한 귀환을 염원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에 모금을 전달하는 것도 순조롭지 않았고(유대인은 비 유대
인에게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급기야 바울은 에페수스
사람과 함께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폭동선동과 성전모독이었다.
유대법상 유대인이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금지
됐고, 위반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울이 그 금기를 어겼는지,
모함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로마 당국에
넘겨졌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주장했으며 결국 로마로 이송돼 로마식
재판을 받았으며 거기서 얼마간 활동하다가 64~65년경 네로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의 최후 몇 년은 매우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유대인들과의 관계 악화,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석연찮은 관계 정도만 짐작될 뿐이다.
유대인들과의 충돌 배경에는 할례와 율법 문제 외에 좀 더 미묘한 사정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낯선 도시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에 들르곤 했다.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했던
것과 상충되지만, 당시 유대교 회당의 정황은 그 의문을 해소해준다.
크로산의 주장처럼 바울은 이방인에게 선교할 때, 완전한 유대인이나 순수한 이교도가 아니라 ‘하느님 경외자’ 또는
‘하느님 공경자’로 알려진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것 같다.
그들은 유대교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 이방인들로서, 유대인 회당 구성원의 일부였다.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서 형성된 히브리인들의 보편적 유일신 신앙과 윤리적 생활은 헬레니즘 시대 새로운 정신적
출구를 찾는 이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헬레니즘 문화에 젖은 유대인들이 있었듯이, 이런 저런 이유로 유대인에게 공감하는 이방인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며 경제적으로 후원하거나, 회당 건축 기금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율법 준수와 할례의 의무는 없지만 유대교 회당의 일원이었던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피상적인 인식과 달리 헬레니즘 시기 유대교는 민족적 편협성을 넘어 일종의 자기 발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에게 말을 거는 것도 오직 바울의 창안은 아니었다.
바울은 도시의 회당에 먼저 들러 유일신 신앙과 히브리 성서에 익숙해진 이방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에 상당한 타격을 줬을 것이다.
유대인 처지에서 보면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의 유산을 가로채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인을 보호해주던 완충지대
마저 잠식하는 것이었다. 서로 가까웠던 만큼 갈등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먼저 겨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바울은 제3의 중간지대를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경계를 넘는 지렛대로 삼은 셈인데, 이들이 기독교 확산 과정에서 점차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끊임없는 탈중심적 여정과 이방인과 유대인의 중간지대를 포섭하는 현실적이고 기민한 선교전략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성공비결이 됐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인과 유대인, 나아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문제는 구체적인 사회생활의 문제이기도 했다.
누구와 어떻게 빵을 나눌 것인가? 사람들이 자기편을 확인하는 가장 소박한 방식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신에게 바친 제물을 함께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례적 절차였다.
집단적 정체성은 단순하게 말하면, 함께 빵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빵을 나눌 없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일 수 있다.
디오도로스(Dio-doros)의 기록에 의하면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 유대인들은 “어떤 종족과도 빵을 나누어 먹거나 선의
를 보이지 않기 위한 이질적인 율법을 도입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다신교 사회의 다른 신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신의 제단에 오른 음식을 철저히 거부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음식과 접촉을 엄격히 금한다.
이교신의 제단에 올린 음식을 먹는 것은 당연히 금지됐다. 음식과 식사법에 대한 금기는 단지 오염의 논리만이 아니라,
공동식사가 함의하는 강력한 사회적 연대와도 관련된 것이다. 겸상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 세계종교로 거듭났다.
예수는 일찍이 유대법이 접촉을 금한 사마리아 여인이나 세리, 창녀들
과도 자유로이 먹고 마심으로써 율법주의적인 바리새인들의 공분을
샀다. 나아가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
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며 정결법의 논리를 뒤집어버렸다.
예수의 격의 없는 식사는 기독교 운동 안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공동체의 본보기가 된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가 보여준 보편주의적
이상을 관철하고자 했다. 안티오키아 일화는 이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
이다.
이 일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예루살렘 회합 후 얼마 안 되어 베드로가 바울이 있던 안티오키아를 방문
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베드로, 바울, 바르바나가 만나 여러 비유대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바울이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며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제자들이 들어오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갑자기 자리를 피했고,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바르바나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던 것
이다.
바울은 격분해서 베드로 면전에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위선자라고 크게 나무랐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식탁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관련한 껄끄러운 이야기를 공적인 편지에 굳이 기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기독교의 일원이라면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음식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원칙과도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권위 있는 사도였기 때문에 더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빵을 나눌 수 있는 동질적인 집단이라 해도 내부적으로 다시 빵을 분배하는 방식은 세밀하게 차이가 나게 마련
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연회나 공동식사 자리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식사의 장소, 좌석의 배치, 음식의 종류와 고기의 부위, 포도주의 등급 등은 엄격한 위계에 따라 정해지고 배치됐다.
그것은 하위 계층에게는 공공연한 모욕과 굴욕의 의식이었다.
후견인과 수혜자들이 피라미드식으로 연결된 후견인 제도가 발달했던 로마제국 안에서 많은 수혜자를 거느린 명망
있는 후견인의 식사는 철저히 서열에 따라 구조화돼 있었다. 그것이 당시의 정상적인 공동식사의 양상이었다.
초기 기독교에도 공동체 식사가 있었다. 예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세례와 함께 초기 교회에서 널리 행
해지던 중요한 종교 의식이었다. 성찬식은 보통 모든 공동체의 성원이 함께 모여 배불리 먹는 식사 뒤에 빵과 포도주
를 나누는 성찬례로 마무리되곤 했다.
바울은 이러한 성만찬을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는 평등한 사랑의 잔치로 규정했다.
그것은 주류문화의 공동식사와 같으면서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차이가 공공연히 확인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차이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로서, 일종의 저항문화였다. 주류 세계의 연회와 구별되는 이러한 성찬식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계기는 역설적으로 코린토스 교회의 성찬식이 차별적인 바깥 사회의 축소판과 같이 전락했을 때였다.
고린도전서의 증언에 따르면 성찬식 모임 날 코린토스 교회의 부유한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일찌
감치 와서 자기들끼리 흥청망청 먹고 취하도록 마셨다. 남루한 옷을 입고 노동에 지쳐 뒤에 온 하층민 신자들은 먹다
남은 빈 식탁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남의 잔치에 온 것처럼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를 입었다.
바울 공동체는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코린토스 교회는 비천한 노예나 하층민, 수공업자나 상인들, 사도들과 여러
교회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까지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집단이었다.
코린토스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그들 사이의 반목과 파벌, 분쟁에 대해 반어적 어법으로 경고하곤 한다.
특히 성만찬 상황을 전해 들은 바울은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느
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라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현실을 세심하게 직시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릴 것, 미리 식사가 필요한 사람은
집에서 하고 올 것이 방안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성만찬이 가난하건 부유하건, 주인이건 노예건 모두 똑같이 형제의
친교를 나누는 평등하고 열린 식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식탁의 이상은 온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끈기 있게 공동체 안에 그 원칙이 살아 있게 하고자 노력
했다. ‘환난을 다 겪어도 곤경에 빠지지 않고 가망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 투지를 가지고, 바울은 여러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하며 때로 단호하게 질책하는 수고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민족, 인종, 계급, 성별을 넘어 보편적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현실과의 끊임없는 불일치 속에서 확인하고 조율해
나간 바울 공동체의 지속적 과정이야말로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힘이 됐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기”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하며 시작한 바울의 새로운 여정은 갓 기지개를 켠 기독교의 향방을 확고하게 탈민족적이고
탈중심적인 형태로 결정지어 놓았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경계를 가로질러 그것들을 상대화하고 모두에게 차별 없이 말 건넬 수 있는 보편적
종교의 실험이었다. 그 안에서 예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이 되었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했고, 정결법과 관습에 근거한 금기와 계율에 저항했다.
관습이나 도덕, 법을 완전히 초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엄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동족에 대한 친애의 마음조차 훌쩍 넘어섰다는 뜻도 아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돼서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민족에게 더 애틋했다.
동족이 기독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를 바랐고,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저주도 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세계시민이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진리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 했다. 이처럼 언뜻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바울 안에 공존하고 있다. ‘모
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바울 식의 보편성은 특수성과 차이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특수성과 우연적 차이들을 무심히 가로지르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지적처럼 바울의 보편주의 실험은 철학의 개념적 보편성과도 다르고, 모든 게 헛되다는 허무적 보편
주의와도 달랐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은총(신의 무조건적 사랑)의 사건과 기독교적 주체의 내적 확신
에 정초한 보편주의였다. 바울에게 그것은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모든 경계
를 가로질러 모두에게 말을 건네는 사랑이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이상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두 문화 사이의 경계인으로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살며 길러진 바울의
탄력성과 개방성을 통해서 더 널리 전파되고 좀 더 실천적 모습으로 구현됐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들, 경계인들, 뿌리 뽑힌 자들에게 바울의 기독교는 새로운 푯대요 희망이 될 만했다.
그 푯대는 특정한 지역과 민족,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모두를 포괄하고 모두를 각성시킬 수 있었다.
바울에게 기독교라는 새로운 울타리는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과 믿음 외에 어떤 영토도 경계선도 없는 울타리였기
때문이다.
바울 당대에 기독교인의 숫자는 지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넘어 이방인에 대해 자신
을 개방했던 바울의 새로운 보편적 공동체 실험은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 다민족 풍토에서 점점 더 적합성을 얻게
될 터였다. 자기 땅을 벗어난 디아스포라적 존재들이 새로운 문화의 창조적 주체가 된 이 과거의 사례는 과연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히 시대와 대면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고 있는지 성찰
하게 한다.
참고문헌
●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
● 요아힘 그닐까, ‘바울로’,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8.
● 알랭 바디우, ‘사도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현성환 역, 새물결, 2008.
● F. W. 월뱅크, ‘헬레니즘 세계’, 김경현 옮김, 아카넷, 2002.
● 존 도미니크 크로산,‘하나님과 제국’, 이종욱 옮김, 2007.
● 게리 윌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김창락 옮김, 2006.
● 마틴 헹엘, ‘신구약중간사’, 임진수 역, 살림,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