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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웬일이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7.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 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 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마가복음11:1-11)
1. As they approached Jerusalem and came to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his disciples, 2. saying to them,“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just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3.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s?’ say,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
4. They went and found a colt outside in the street, tied at a doorway. As they untied it, 5. some people standing there asked, “What are you doing, untying that colt?” 6. They answered as Jesus had told them to, and the people let them go. 7. When they brought the colt to Jesus and threw their cloaks over it, he sat on it. 8. Many people spread their cloaks on the road, while others spread branches they had cut in the fields. 9. Those who went ahead and those who followed shouted,
“Hosanna![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b]
10. “Blessed is the coming kingdom of our father David!”
“Hosanna in the highest heaven!”
11. Jesus entered Jerusalem and went into the temple courts. He looked around at everything, but since it was already late, he went out to Bethany with the Twelve.
* 주님의 길
예루살렘은 주님께 어떤 곳일까요?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주님은 곧바로 주님의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16:21)
주님은 그렇게 예고하시더니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신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누가 제 죽음이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간다는 말인가!
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1. As they approached Jerusalem and came to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his disciples,
제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을 제 발로 걸어온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과 걷다 보니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은 왜 이런 길을 스스로 택하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사람들과 왜 이렇게 다른 길을 택하시는 것인가?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2:1-3)
진노의 자식은 불순종의 자식 가운데 역사라는 영이 알려 주는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시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택하신 길을 이해조차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 길을 택할 리가 없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좇아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그 길이 이해가 되었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그 길의 선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바뀌어서 그 일이 가능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규정하는 영이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서 성령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영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15.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해방하시려고 한 것입니다.(히2:15)
마귀의 가장 결정적인 수단은 죽음의 공포심입니다.
마귀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결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심에 쫓겨 다니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전혀 다른 길을 가십니다.
마귀가 주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실례를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예언하시고 그 도시를 향해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주님을 기다려도 주님은 그 길을 향해 걸으시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마귀가 제 뜻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첫 사람 예수님을 만난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을 택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하나님 뜻이 정합니다.
하지만 죄인의 길은 마귀가 주는 죽음의 공포가 정합니다.
바울의 간증과 교회에서 듣는 연예인의 간증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없는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25.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자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27.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우리가 듣는 간증은 모조리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이런 간증도 있나?
하지만 바울의 간증은 줄줄이 고난의 현장에 서 있는 자신을 나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죽음의 공포심이 바울의 길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상황을 역행하고 있었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죽음의 고난 일색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지뢰를 묻는 위치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뢰를 생명으로 가는 길에 묻을 것입니다.
어차피 죽음을 택해서 가는 자들의 길에 마귀가 지뢰를 묻을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어도 살게 하실 것입니다.
30.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32.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고전15:30-32)
성경이 생명을 말씀하실 때 그것은 이 육신의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영생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입만 쳐다보다가는 그대로 속고 맙니다.
그 사람이 걷고 지나간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가 지금 마귀가 묻어둔 지뢰밭을 걷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그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역행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세상 보장을 다 챙겨두고 입만 살아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가짜들을 주의 깊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나귀
그렇게 주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서 나귀를 찾으셨습니다.
거기까지는 주님께서 많은 사람과 함께 걸어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 서시더니 제자 두 명을 보내시면서 기필코 나귀를 찾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님만 나귀를 타실 것입니다.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2. saying to them,“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just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이제부터 예수님은 왕으로써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하필 나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발이 땅에 끌리는 나귀 새끼입니다.
이 나귀는 사람을 처음 태워 보았으니 얼마나 서툰 걸음을 걸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데 하늘의 왕이 타셔야 할 말은 그 키가 사람을 넘고 잘 훈련되어서 그 품위를 드러내는 백마여야 합니다.
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흰 말이 있었는데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계19:11)
그런데 주님은 꼭 이런 나귀를 타셔야 하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성경의 성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의 일을 500여 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가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한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9:9)
어떤 사람은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를 합니다.
성경을 두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몰아치니 두려움에 동굴에 숨어 있던 천재가 쓴 소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책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이순신은 철수하려는 왜군을 무찌르다가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이 일은 뛰어난 사람의 지어낸 허구가 아닌 한국의 역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이런 역사책입니다.
여러분은 2,023년 10월 22일 11시 달내 교회 앉아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를 연대로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태초의 6일째 역사는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원인이 되어서 그 말씀대로 여러분들이 달내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현실이 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숨이 나오는 역사 현실 안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땅이 혼돈하고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능력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1:2,3)
전쟁이 터지는 것도 홍수가 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가 혹은 거부하는가에 의해 평화가 보장되느냐 난리가 터지느냐도 결정지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실 것을 이미 500여 년 전에 예언하셨고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2. 상징 행위
주님께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꼴찌가 되고 어린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런 꼴찌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왕 중에 왕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에 이 모순된 내용성을 상징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는 꼴찌 왕이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책은 계시의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코가 좋은 사람은 새끼 나귀의 냄새를 맡을 것이고
눈이 발달 된 사람은 나귀에 끌리는 주님의 발을 볼 것이고
귀가 발달 된 사람을 어미를 찾는 새끼 나귀의 울음소리를 들을 것이고......
일관되게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3. 해석
물론 주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데에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왜놈 순사들은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나타납니다.
말발굽 소리를 크게 내면서 칼 부딪히는 쇠소리를 내면서.......
그것으로 사람 목을 자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왕은 발이 땅에 끌리는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공의로우신 왕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그 온유하심을 드러냅니다.
하늘 왕을 왜놈들의 시각에서 보는 이들은 예수님의 이 모습을 비웃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시각을 가졌으니 당시 대제사장도 주님의 정체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들었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마구잡이로 부인할 수도 없었는데 그래서 그가 주님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60. 그래서 대제사장이 한가운데서 일어서서, 예수께 물었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61.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다무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묻기를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하였다.
6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63.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64.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정죄하였다.(막14:60-64)
주님께서 정체를 밝히셨더니 사형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은 모독했다는 이유로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는데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두고 확신한 것입니다.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하였다.
31. 대제사장들도 율법 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마가복음15:29-31)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허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경건을 도전하는 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성전을 도전하더니 이제 실패자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율법 학자들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같은 장소에 있던 백부장은 다른 고백을 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가복음15:39)
왕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예수님에 대한 해석을 좌우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왕으로써 훈련된 군마가 아닌 새끼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태워 본 나귀입니다.
주님은 훈련된 백마가 아닌 나귀를 택하심으로 왕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내용성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개념의 지도자이십니다.
주님은 일관되게 제자들과 이 문제로 부딪히셨습니다.
제자들은 높아지려 했는데 주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자가 되려거든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지도자는 왜놈 순사처럼 나타나지만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허리에 칼 대신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것입니다.
새끼 나귀는 그 온순하심을 드러낼 것입니다.
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슥9:9,10)
예수님의 나귀를 세상 모르는 18세 소녀의 감상주의적 발상으로 여기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하마스와 이스라엘
칼 차고 말을 타는 대신에 나귀는 타는 것은 파편에 피 흘리는 제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울음 소리를 멈추게 하는 역사적 대안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세상의 왕이 예수님을 따라서 새끼 나귀를 타지 않는 한 이 비참한 죽음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엄숙한 경고입니다.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3.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3.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s?’ say,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
그 주님께서 심부름을 시키면서 두 제자에게 이 두 마디의 말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둘째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나귀의 묶인 끈을 풀면 나귀 주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왜 이러냐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귀의 주인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챙기는 나귀입니다.
모르기는 해도 당시의 나귀의 가치는 지금 값비싼 자동차 정도 아니었을까요?
그것을 풀어가려 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해야 할 말은 간단합니다.
주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 나귀 주인에게 주님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나귀 주인은 주님을 신뢰했으므로 그 한 마디에 제 나귀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위해 쓰여져야만 합니다.
이제 제자들이 할 두 번째 말이 있습니다.
이 나귀를 사용한 후에는 그것을 지체없이 돌려주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일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귀를 소유해야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거리가 몇 Km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귀가 주님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규모의 교회 건물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의 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창고를 빌려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고 돌려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오히려 소유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영수증 없이 나귀를 풀어가라고 하는 주님께 대한 신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희생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이비들이 꼭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쓴다면서 그 나귀를 제 것으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나귀를 두고 성물이니 어쩌니 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찬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잠시 빌린 나귀가 아니라 그 나귀를 타신 주님일 뿐입니다.
또 나귀를 믿고 빌려주는 신뢰와 희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화해서 사람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돌 하나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으시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영광을 드러낸 후에는 사라질 것입니다.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4. They went and found a colt outside in the street, tied at a doorway. As they untied it,
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웬 일이오?"
5. some people standing there asked, “What are you doing, untying that colt?”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나귀가 길 쪽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풀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 앞마당에 와서 세워진 내 모닝 차를 모르는 사람이 끌고 간다면 저는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차를 왜 가져가?
그러니까 나귀 주인은 환상을 본 다음에 제자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준비했다가 그것을 내주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6.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6. They answered as Jesus had told them to, and the people let them go.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귀 주인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와서 그 나귀를 풀어가자 거기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나귀를 두고 질문하며 답했던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그 나귀를 풀어가도 된다고 허락한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기꺼이 예수님께 동의한 것입니다.
나귀 주인도 그 사람들의 말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고!
거기 모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해 깊은 신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나귀를 예비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고 희생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7.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 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7. When they brought the colt to Jesus and threw their cloaks over it, he sat on it.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귀를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말안장 대신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그 위에 덮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을 허접하게 모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진실했습니다.
구멍난 자신의 옷을 주님 엉덩이에 깔아드렸습니다.
요즈음 장로님들을 당장에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최고급 안장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요즈은 대리석으로 교회 바닥을 깔고 장의자를 가져다 놓습니다.
옛적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가마니를 깔아 놓고 예배드렸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넘어서 새벽기도회를 온 것입니다.
제 노파심이지만 옷 대신에 금빛 나는 안장을 들고 오는 사람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제 옷 구겨진다고 그것을 챙기면서 제 돈이 많다고 안장을 사 들고 오는 사람들의 진실성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물 나는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8. Many people spread their cloaks on the road, while others spread branches they had cut in the fields.
나귀가 밟고 가면 거기에 나귀 발굽 모양으로 구멍이 뚫리고 말 것입니다.
옷이 귀한 그 시절에.......
저는 제 옷을 땅바닥에 깔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나무 가지는 몰라도........
그들은 최선의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 인간론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9. Those who went ahead and those who followed shouted,
“Hosanna![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b]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들의 찬양은 진실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도 안 돼서 주님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 비참하게 죽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찬양의 의미가 무엇인가?
주님은 이것을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진실했습니다.
그에게는 주님을 속이려는 뜻이 전혀 없었습니다.
29.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막14:29-31)
베드로가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성격상 죽는 자리까지 주님을 따라가겠다는 말은 주님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신의 옷을 안장 대신에 깔고
다른 사람들은 옷을 벗더니 땅바닥에 깔고
하지만 그들이 자신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주체적으로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 문제를 겟세마네에서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막14:38)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영적 문제입니다.
주님조차 그 일을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거든 기도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그랬던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오늘의 찬양하는 사람들은 실은 내일 주님을 부인할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방법론
10. "복 되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0. “Blessed is the coming kingdom of our father David!”
“Hosanna in the highest heaven!”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진실되게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주일이 안 되어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첫째 이유가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론에 대한 것이었고 또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방식 때문입니다.
주님은 처절하게 악당들에게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패배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어린이처럼 무력하게 되는 일입니다.
악당이 못을 박으면 그대로 못이 박히는 방식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십자가의 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신학적 근거로 유대인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유대인 만이 아닙니다.
한국의 역사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놈들이 십자가 군기를 들고 우리나라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명분으로 삼아서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했으니 이스라엘인의 입장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믿어주겠습니까?
그들에게 제일 믿을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의 군기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때려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끼리 싸움이 난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기독교 나라가 무기 장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한 손에 십자가 깃대를 들고 다른 손에 칼로 살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살상을 위한 종교적 추진력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런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제 전쟁에 이용해 먹는 인간들이 이 비극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제 사업에 이용해 먹기도 하고.......
아주 난리가 또 났습니다.
예수님을 같은 주로 모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싸움이 나더니
아브라함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내용을 죽음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 성령의 역사 : 신앙 고백
물론입니다.
애초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 언급하지 않고 있는 다른 상황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39.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40.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셨다.(눅19:39,40)
당시에도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적대하던 당시의 사람들을 향해 옳거니 그 패륜아들 할지 모릅니다.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그들은 당시에 가장 보수적인 경건한 무리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한 것은 경건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찬양하자 제 일 계명을 어기는 그런 불경한 일을 하지말라고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들이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자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거룩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을 적대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 된 것입니다.
누구의 의견이 더 유력한 것인가?
며칠 후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신학적인 혼란도 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 우리가 아닌 성령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것인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마16:17)
그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건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야 하며 또 그 희생의 십자가의 방식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없습니다.
* 혼란스러운 성전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11. Jesus entered Jerusalem and went into the temple courts. He looked around at everything, but since it was already late, he went out to Bethany with the Twelve.
그 날이 저물었으니 주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둘러보신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성전은 독재자 헤롯이 건축한 것입니다.
헤롯은 이두매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자이지만 로마에 빌붙어서 왕이 된 것입니다.
그의 그런 약점을 보상하기 위해 지은 것이 성전입니다.
그는 그럴수록 더 화려하게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 거짓된 것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조차 이 성전의 껍데기에 현혹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
한국의 대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화려하고 웅장한 것은 신앙이 없음을 인한 보상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무너뜨리시고 사람은 세우고 의미도 없는 행위가 끈질깁니다.
성 베드로 성당 어쩌고 했던 개신교가 자기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처럼 한국 교회도 눈을 떠야 합니다.
돌 하나 위에 돌이 남지 않을 것들이 제대로 보여야 합니다.
주님은 내일 그 성전에 가실 것입니다.
그곳을 둘러보실 때 밤이 다가왔습니다.
그 날 하루 예루살렘은 참으로 번거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