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사랑의 부칙 / 김 근 우
궁에서 손님이 온다. 운이 좋아야 평생 한두 번 모시는 귀한 손님이다. 마음 같아서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싶다. 그런데 속세의 거친 음식은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전갈이다. 마음을 바꿔 방울방울 고이는 생명수를 받아 거안제미(擧案齊眉)하기로 한다. 온다는 날짜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몇 번이나 그리고 또 그린다. 손가락이 저리도록 만날 날을 세어가며 귀빈을 기다린다. 어서어서 오시기를.
삼신할머니가 다녀갔다는 기쁜 소식을 딸아이가 전했다. 빅뱅을 잉태했던 태초의 기운을 닮은 점 하나가 고요한 궁궐에서 힘을 내고 있다. 4주 8주 12주…. 어미와 아가는 생명 완성의 계단을 하루하루 오르며 쿵쿵대는 심장 소리를 키워갔다. 급팽창의 에너지를 품은 세포들이 아가를 쑥쑥 키워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비의 점 하나가 이뤄낸 기적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날, 웃음보다 눈물이 더 큰 반가움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 둘을 입을 다물고 낳았다. 진통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눈을 감고 수를 세었다. 아이 손을 잡고 걸음을 걷는 마음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진통과 마주했다. 큰아이 때는 초저녁부터 문 두드리는 기미가 있었다. 산통의 정점까지 세어가는 숫자 기둥을 조금씩 무너트리며 아이는 문을 여느라 밤을 새웠다.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세상으로 나왔다. 산모 방이 조용했다는 간호사들의 말을 들은 친구가 왜 그랬는지 몰라 의아한 얼굴이다. 내 나름의 환영식이라고 했더니 그 속을 누가 알겠냐며 하얗게 눈을 흘겼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끼를 품에 안은 어미들의 사랑은 애틋하다. 염낭거미의 모성 행동이 눈물겹고 문어의 그것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하물며 사람의 모성이야. 인간의 어미들은 마음에 그득히 고인 사랑의 진액에 인내와 독기를 풀어 넣은 복잡한 언어를 섞는다. 자칫 달콤한 것만 주었다가는 쓰고 매운 것을 만났을 때 스스로 견디는 힘을 낼 수 없어서 일터다.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원시 동굴의 어미라고 달랐겠는가. 자궁에서 자궁으로 이어지는 탯줄의 매듭마다 어미들의 달고 쓰고 매운 사랑은 장구하게 새겨져 왔으리라.
내가 산고를 조용히 넘고자 했을 때도 내심으로는 나만의 언어로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싶어서였다.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문을 함께 연 것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열어갈 때도 힘이 되고 싶었다. 생각은 그랬는데 몽당연필만큼이나 궁색했던 내 참을성은 금세 동이 나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일상에 등 떠밀려 사느라 마음이 급했다. 아이들을 내 시선이 닿는 곳으로 끌어가고 싶어 스스로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했다. 주고 싶은 것에 눈이 멀어 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어린 것의 맑은 눈을 보지 못했다. 어미의 갈급함은 여린 마음을 고되게 하는 ‘미안한 사랑’을 하고 말았다.
다시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았듯이 아이들도 기다리지 않고 그들 방식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사랑을 전하는 말이나 행복을 지켜가는 그들 방식 중 일부는 내게 생소하다. 더러는 칠십 년이 다 된 내 언어 수용체로는 낯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눈이 이제야 어렴풋이 생겨가는 지금의 나도 그러할 진데 어린 것들 마음이 오죽했으랴.
생각해 보면 부모의 명령과 자녀의 순종이 사랑과 짝이 되는 사회, 입보다 귀를 열어야 하는 언어가 만연했던 공동체 속에서 생각을 키웠던 나였다. 그렇게 닫힌 엄마가 입 다물고 끄는 대로 무작정 따라오느라 아이들은 숨이 가빴을 것이다. 그 거친 호흡 소리는 어떤 것으로도 상쇄하지 못할 이명으로 내 마음에 박혀있다.
궁에서 온 손님의 속세 살이가 벌써 다섯 달을 넘어갔다. 방긋방긋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이 쉴 새 없이 날아온다. 옹알이로 주고받는 아이들 영상 속에는 딸아이에게 건네주지 못한 행복의 말들이 그득하다. 사랑을 행복으로 만들어가는 그들의 언어에는 내가 남발했던 명령문이 없다. 된소리 거친 소리도 빠져 있는 게 보인다.
수학자는 수식으로, 미술가는 시각적인 상징으로, 문학가는 은유의 옷을 입힌 글로써 세상과 소통한 이야기를 각자의 언어로 표현한다. 마음속의 행복을 그려내는 빛깔도 사랑을 표현하는 말도 세월 따라 사람 따라 다르다. 진화가 반드시 진보는 아닐지라도 변화가 이루어낼 아이들의 새로운 사랑법을 옹알이하는 아가처럼 하나씩 배워 간다.
걸러내지 못한 욕심으로 몸피만 키웠던 부실한 사랑을 펼친다. 설명보다 행동이 앞섰던 내 부족한 사랑에 ‘미안’이라는 부칙 하나를 추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