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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95회. '발굴, 밀양 고분벽화의 비밀' (2000.12.02.)
95회 : 발굴, 밀양 고분벽화의 비밀
발굴, 밀양 고분벽화의 비밀
방송일: 20001202 조회수 : 219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발굴!! 밀양고분벽화의 비밀..더빙 최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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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발굴현장
-천둥 번개... 11" -(효과음...보다가)
지난 9월,
태풍 사오마이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뒤//
-무너진 무덤 15" (보다가)
-경남 밀양시 청도면에선
봉분 한쪽이 무너져내린 무덤 한 기가 발견되었다.
-윗 그림보다 좀 더 타이트 7" -무덤의 조성시기는 조선초기-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의 무덤이었다.
*문중사람 인터뷰
계속해서 비가 왔습니다. 비가 그친 뒤에 보니까 넓이가 1미터 이상 넓게 폭도 1미터 직하로 내려가면서 갱이
있는데 석실 후미부분의 면석을 완전히 제껴..도굴꾼들의 발자국..부장품은 가져갔는지 알 수 없고..
-내려다본 구멍 6" -무덤내부엔 도굴때문인지 특별한 부장품은 나오지않았다.
-내부 8" -(보다가)
그런데 발굴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무덤안 석실벽면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림 타이트 틸업 9" -(보다가)
그림이 그려진 건 모두 3개벽면..//
무덤이 조성될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있었다.
-남벽 4" -600여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벽화..
-동벽 6" 그 안엔 고려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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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발굴!!밀양고분벽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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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기본세트...위의 마지막 벽화사진이 뒤에 깔려있고 >
(손으로 뒤를 가리키며)지금 제 뒤에 있는 이 그림들이 지난 9월 밀양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입니다.
무덤은 밀양박씨 문중에서 관리해오던 것으로 그 주인공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살았던 인물...
송은 박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된 고분벽화인 것입니다
이 벽화는 발견되자마자 세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고구려벽화의 웅장함이나 섬세함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지만 그보다 8세기뒤인 고려시대..
그것도 고려말 조선초의 무덤에서 벽화가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벽화는 당시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공민왕릉의 벽화) 이건 고려시대 공민왕릉에서 발견된 벽화인데...얼핏보기에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머리 부분을 자세히 보면 12간지의 동물들이 그려져있습니다.
바로 12지신상입니다.
(수락암동고분벽화..)이외에 대표적인 고려벽화인 경기도 개풍군 수락암동에서 발견된 수락암동 1호분벽화와
(액자화면에 파주서곡리의 12지신상) 파주 서곡리 벽화에도 12지신상이 그려져있습니다.
(거창둔마리의 주악선녀도) 그리고 이 벽화는 경남 거창군 둔마리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벽환데....
여기엔 12지신상 대신 선녀의 모습이 그려져있습니다.
이렇게 고려시대 고분벽화에 그려진 그림들은 추상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뒤의 그림들 가리키며)그런데 박익묘의 벽화에선 특이하게도 일상적인 인물들을 소재로 당시의 풍속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우선 벽화가 발견된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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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600년전 고려벽화가 발견되다.>
-차 트래킹 5" -(흘리고)
-벽화가 발견된 곳은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무덤으로 줌인 12" -마을 뒷산에 있던 무덤이 태풍에 무너져 내리면서 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PD 걸어올라가고 10" -무덤의 주인공은 송은 박익-무덤은 그 후손인 밀양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발굴내부에서 팬..돌 도르래 8" -무덤에선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보다가)현장음..도르래소리 좀 듣다가
-풀 15" -취재팀이 도착했을 때-//
발굴팀은 무덤석실안으로 들어가기위해 석실의 북쪽벽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들 벽면의 손상을 막기위해 작업은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 내려가는 컷트 끝부분에 멘트 7" -(보다가)
-벽면 뚫려있는 그림 -1시간여의 작업 끝에 북쪽벽이 옮겨지고 석실내부로 들어갈 입구가 생겼다.
-석실내부 13" -드디어 석실내부가 공개되었다. 이미 두차례 도굴꾼이 지나간 탓인지
석실내부는 심하게 손상되어있었다.
-벽면 17" -벽화가 남아있는 벽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흙이 두껍게 덮여있었고...
일부 그림이 그려져있던 벽면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당초 틸다운하면 서쪽벽 11" -그러나 다행히도 일부 남아있는 그림은 제법 선명한 편이었다.
-서쪽스틸 10" -서쪽벽엔 무엇인가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세명의 여자와 한명의 남자가 그려져있었다.
-동쪽벽 풀팬 10" -동쪽벽은 서쪽벽보다 좀 더 많은 그림이 남아있었다.
-동쪽벽 타이트 11" -(보다가)
-하지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그림은 얼마되지 않았다.
-동쪽벽 스틸 8" 무엇인가를 들고있는 여자 세 명과
그 뒤에 일부 손상된 채 남아있는 남자 한 명...// 모두 네명이다.
-매화줌인 6" -그런가하면 동쪽벽 끝부분에도 그림이 남아있었는데...//
-타이트 5" -매화와 대나무였다.
-남쪽벽(조명 비춘) 5" -마지막으로 그림이 남아있는 벽이 남쪽벽-
-약간 팬 9" -여기엔 한사람만이 그려져있었는데 말고삐를 잡고있는 남자였다.
-스틸 7" -(본다)
-동서남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마치 일반 풍속화처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인터뷰
여기 나온 풍속화는 고려시대 회화로 유일한 것이다
그시대 고려사 묘사되었지만 이걸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생생하게 보여지고 있는 건 그 시대 의복구조나 풍속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쪽벽 끌어올리기 14" -발굴팀은 그림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벽면에 흙의 덧개가 심하게 껴서 그 아래 숨겨진
그림들이 더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북쪽벽과 똑같은 방법으로 남쪽벽을 끌어올렸다.
-장비들 -흘리고..)
-끌 타이트에서 11 -가는 붓과 끌로 조심스레 흙을 털어낸다.
-풀 털어내는 모습 -(보다가)
-흙 털어낼 때 5" -1시간즈음 지났을까...희미한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 그림 보일 때 줌인 6" -그리고 잠시 후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틸업,, 10" -(보다가..그림 보이면)
-말고삐를 잡고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팬할 때 12" -두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서로 마주보고있는 것이 남쪽벽에 나타난 그림이었다.
-조명 비출 때 10" -동쪽과 서쪽벽은 어떨까..
석실내부로 들어가 살펴보기로 했다.
-떨어져나간 모습 8" -동쪽과 서쪽벽은 벽면에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아서 일부 그림만이 남아있었다.
-보존처리 작업 15" -발굴팀은 우선 보존처리작업을 하기로 했다.
남아있는 부분마저도 떨어지기 쉬운 상태여서 약물처리로 벽면을 안정시켰다.
-물뿌리는 모습 -(보다가)
-종이 떼는데 난초 보이면 15" -보존처리 작업이 진행되면서 처음엔 보이지않던 그림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석실 풀 5" -그렇다면 동쪽과 서쪽벽엔 어떤 그림들이 더 남아있을까?
-서쪽 벽 팬 15" -(보다가)
-서쪽벽엔 처음 발견되었던 네명의 남녀그림
앞쪽으로 일부 손상된 그림이 남아있었다.
-발 부분 4" -한쪽 발만 남아있는가하면
-머리 12" -머리부분만 남은 여자의 모습도 보인다.
-틸업..찻잔 -그리고 그 위로 찻잔 같은 그릇을 든 손이 보인다.
-여자 4" -한 무리의 사람이 또 있었다.
-동쪽벽 17" -(보다가)
동쪽벽 역시 처음 발견되었던 매화와 대나무 그리고 네명의 남녀가 그려진 그림앞쪽으로 일부 손상된 그림이
남아있었다.
-손상된 부분 풀 3" -비록 아랫부분만 남아있지만 여기에도 한 무리의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타이트 8" -그리고 이들도 무엇인가를 들고가는 모습이다.
(보다가)
-틸업 -(보다가)
-상체만 남아있는 여자그림은 머리에 뭔가를 이고 가는 모습이다.
-매화줌인 10" -사람들외에도 남아있는 그림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매화인듯한 그림이 남아있고//
-당초 8" -천장과 벽면사이엔 당초문양이 남아있다.
-모사설치 20" -이렇게 동쪽과 서쪽..남쪽//세 벽면에 남아있는 그림들을 모두 찾아냈다..
그렇다면 이제 벽화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발굴팀의 이동주박사의 도움을 받아 벽화의
전체모습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림 그리기 13" -(보다가)
-잠시 후 전체적인 모습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이동주인터뷰
매화 난초 이 그림이 남쪽 입구쪽 양측에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인물화 묘사..인물화는 일단 네명씩 여기도
네명이고 여기도 네명이고...나머지는 훼손된 부분도 네명씩
세트관계로 분석...
-C.G. 22" -현재 벽화에 남아있는 부분들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해봤다.
(보다가)
-600여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송은 박익 묘의 벽화는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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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무덤안의 고분벽화가 그래픽으로 처리되어있고..유인촌 벽화앞에 서 있다.
이것은 묘의 석실내부를 그대로 재연해놓은 것입니다.
실제 석실 크기는 가로 90센티 세로 2미터..높이 80센티로 사람이 들어가서
서기는 다소 불편한 크깁니다...그래서 실제 크기보다 두배 확대해서 재연해놓은 것입니다.
(남쪽 가리키고) 현재 그림은 동서남 세벽면에 남아있는데 그 중 남쪽벽면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며)그러나 동서벽면은 보시다시피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이 되어있는데..
아마 조성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그림이 그려져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우선 서쪽벽면을 보면
선명하게 남아있는 네명의 사람외에 그 앞쪽으로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그림 하나하나 가리키며)이건
병을 들고가는 여자의 모습이지요..그리고 그 뒤엔 찻잔을 잡고있는 손이 보입니다...이 부분에도
그림이 그려져있었다는 이야깁니다..(동쪽 벽면 가리키며)그런가하면 동쪽벽면을 보면 역시 선명하게 남아있는
네명의 사람외에도 그 앞쪽으로 그림이 남아있는데 이건 머리부분은 훼손되었지만 그릇을 들고가는 여자지요...
그리고 그 뒤에 신발부분만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옆으로 또 한명의 여자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맨뒤에 머리에 뭔가를 이고가는 여자모습이 보입니다..모두 네명입니다...
(동쪽벽면 가리키며)이렇게 훼손된 부분을 보면 이 그림의 원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는데...
네명씩 한 조가 되어서 한그룹..두그룹..그리고 이 앞의 여백까지 세그룹이 그려져있던 것으로추정됩니다.
그러니까 모두 12명이지요...그리고 현재 동서벽면이 좌우대칭구조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서쪽도 같은 구도로
그림이 그려져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성당시 이 벽화의 모습은 동서 각각 12명씩 모두 24명의 사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북쪽과 천장을 가리키며)
그런데 이 벽화를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북쪽면과 천장에는 그림이 전혀 발견되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벽화들은 동서남북 네 개의 벽면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그림이 그려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벽화의 북쪽벽면과 천장에도 그림이 있었던 걸까요...?
또 만일 있었다면 어떤 그림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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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북쪽벽에는 주인공 박익이 그려져있었을 것이다.>
-안휘준 안으로 들어간다. 9" -천정과 북쪽벽의 그림상태를 확인해보기위해 지난 30여년간 고대벽화를 연구
하고 있는 안휘준교수가 발굴현장을 찾았다.
-벽화 본다 현장음)요선이 유일하게 천장에 남아있고..
흙을 채워넣은듯한 느낌을 줘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안휘준)금이 있는 걸 보면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석실풀에서 천장으로 15" -천장에도 그림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림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않아 육안으로는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천장의 표면상태로 그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밖에 없었다.
*안휘준인터뷰
천장에 우툴두툴..이쪽부분에는 아무것도 안그려졌을 가능성...
저쪽은 우툴두툴 덜해..그림이 그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적외선 촬영준비 31" -그림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보기위해 적외선촬영을 해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쓰이는 검은 먹은 적외선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때문에 천장에 적외선을 쏘면 육안으로 보이지않던 먹선도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사진 10" -예상대로였다.
천장의 남쪽부분에서 그림의 흔적인듯한 먹선이 드러났다.
*전문가인터뷰
천장에는 회를 바른 상태에서 회가 클랙이 갔다..회벽의 클랙...
굵은 선은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한 부분이다.
천장에는 회를 바른 상태에서 여기에 많은 잔금을 회벽에 클랙이 갔고 굵은 흑색으로 나타난 건 인위적으로
그림을 그렸더 흔적..
-당초문양 15" -천장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한가지 단서가 있다.
바로 벽면과 천장사이에 그려진 당초문양이 그것이다.
-차 트래킹 5" (흘리고)
-덕흥리고분 C.G. 8"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시대 대표적인 고분벽화인 덕흥리고분벽화..
-사진 11" -(보다가)
-이 벽화에도 벽면과 천장사이에 문양이 그려져 있다.
-두개 비교 8" -송은 박익의 묘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문양이다.
-이것은 바로 벽면과 천장의 그림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천정그림 9" -천장에는 내세 즉 하늘의 세계를 그렸다.
따라서 당초문양이 있다는 건 바로 천장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민왕릉 9" -그렇다면 송은 박익 묘의 천장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있었을까?
고려시대 다른 고분벽화들을 보자
-고려벽화천정 28" -(보다가)
-공민왕릉 천장 -개성에 있는 공민왕릉의 벽화를 보면 천장에 북두칠성과 삼태성을 그렸다.
-(보다가)
-안동 서삼동 이외에도 고려시대 고분벽화의 천장에는 모두 별자리가 그려져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북두칠성과 삼태성이다.
*안휘준인터뷰(테이프 20)
"여기에 보이는 이러한 선이 말하자면 별과 별을 이어주는 선은 아닐까..
그리고 동그란 이런 점은 어떤 별 하나를 나타내주는 게 아닌가
이게 조각이어서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천장에 뭔가 그려졌다면 천상의 세계 하늘의 세계를
나타내는 일월성신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북쪽벽면 흙 털어내는 거 타이트 17"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면 북쪽벽에도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과연 그림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우선 북쪽벽면에 남아있는 흙을 조심스레 털어보기로 했다.
-김PD와 발굴팀 현장음)지금 상태가 어떻습니까.
바닥에 조금 남아있어요..이걸 액스레이 촬영 해봐야할텐데..
-그림남은 부분 줌인 10" -북쪽벽의 오른쪽 아래부분에 회칠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반적으로 회칠을 했다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다.
-적외선 사진 12" -역시 적외선 촬영결과 검은 선이 드러났다.
- 6" -그런데 남쪽벽의 아래쪽에 비슷한 모양의 선이 있다..벽돌을 쌓은듯한 모양의 그림을 그리고
-남쪽벽 풀 4" 그 위에 인물을 그린 것이다.
-동쪽벽 10" -이러한 구도는 동쪽벽도 마찬가지다.
동쪽벽에도 인물그림 아래쪽에 벽돌을 쌓은 듯한 모양의 그림을 그렸다.
*인터뷰
북벽하부에 먹선이 있는 걸로 봐서 남쪽중앙에 그림이 있는 것처럼 북쪽 중앙에도 그림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벽화 22" -그렇다면 북쪽벽에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고구려고분벽화에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대부분의 고구려고분벽화는 북쪽벽에 특별한 사람을
그리고 있다.
바로 무덤의 주인공과 그 부인들이다.
*안휘준 인터뷰
이게 고구려전통이 면면이 이어져내려왔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이 408년에 축조된 덕흥리고분하고 비교해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이게 현실로 들어가는 전실북벽에 그려진 게 주인공이고 거기 13군태수가 보고를 하는 조회장면인데 여기도
주인공이 북쪽에 그려져있어 인물들이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비슷한 일이 아마이 고분벽화 제작시에도
나타나지않았을까 생각하게된다.
-덕흥리고분벽화 13" -덕흥리고분벽화에서 13군태수가 일제히 바라보고 있는 곳은 북쪽이다
그리고 그곳엔 주인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동서남 훑는다 16" -송은 박익 묘 벽화의 구도도 덕흥리고분벽화와 똑같다..
동쪽과 서쪽에 그려진 인물들은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고있는데 바로 북쪽이다..
-천정과 북쪽 8" -600여년전 처음 벽화를 그렸을때엔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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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여전히 무덤안 >
현재는 그림이 남아있지않지만
이 벽화가 조성될 당시엔 북쪽면과 천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추정해보면
(북쪽 가리키면..초상화 등장) 북쪽은 주인공 송은 박익이 그려져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천장 가리키면..별자리 등장...)천장은 삼태성이나 북두칠성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벽면엔 현실세계를 그리고 천장엔 천상의 세계를 그려
죽은 뒤에도 현실과 같은 삶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이후 전해내려오던 고분벽화의 양식이나 사상이
그 표현방법만 조금 달라졌을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밖으로 걸어나와...)
그런데 발굴중에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지대석부분 가리키면...그 부분에서 묘지석 화면이 나온다.)묘지석은 지대석밑에서 발견되었는데
(묘지석에서 박익이라는 글씨 뽑아져나와) 묘지석에 새겨진 글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박익이라는 것이
확실히 나타나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망연대입니다.
(묘지석에서 연대 부분 뽑아져나온다)박익의 사망연대가 경자 2년..
즉 1420년 세종2년으로 되어있습니다.
문집의 사망연대인 1398년과는 22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익이 살았던 연대는 정확히 언제일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 시대 지방에서는 흔치않던 무덤벽화가 만들어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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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고려말 충신이었던 박익선생>
-현장 줌아웃 13" -박익의 실제 사망연대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무덤안으로 들어간다 9" -사망연대를 확인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유골의 상태를 파악해보는
것이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이다.
-김재현교수 마스크 쓸 때 6" -형질고고학을 전공한 김재현교수-
-김재현 장비 꺼낼 때 12" -김교수가 유골을 통해 확인하려는 건 송은 박익이 처음부터 이곳에 묻혔는지 //
아니면 이장을 했는지의 여부다.
-수건 쓴 상태 16" -(보고)
- 묘지석의 기록에 의하면 박익이 이곳에 묻힌 것이 1420년이다. 따라서 1420년에 사망했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묻혔을 것이고 문집의 기록대로 1398년에 사망했다면 다른 곳에 있다가 1420년 이곳으로 이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김재현인터뷰
척추부분..가지런해...그외 골반의 대퇴골..관절 그대로 남아 일부뼈는 벗어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래
죽어서 바로 매장된 형태다 그렇게 봤을때는 오히려 지석의 연대가 맞을 확률이 있지않을까..
-문중제사 40" -문집에 기록되어있던 것과는 달리 박익의 사망연대는 1420년 세종2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당시 박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지금도 밀양박씨 가문에서는 봄 가을 두 번-
박익을 위한 제사를 모시는데 박익은 밀양박씨 가문의 18대조다.
당시 밀양박씨가 어느 정도 권세를 누렸는지 알아본다면 박익의 삶이 어떠했는지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경현 인터뷰
박씨가 최고명문에 속하는데 고려에서 그 박씨 중에서도 제일 으뜸가는 게 밀양박씨..밀양지방 지배족이었던
밀양박씨는 밀양지역에서 가장 경제력과 권력과 부를 갖춘 집이었다.
-묘지석 이름 11" -박익이 살아있던 시절...
밀양박씨는 권력과 부를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사재소감 13" -실제 박익의 묘지석에 보면
박익은 살아생전 사재소감이라는 벼슬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사재소감은 어떤 직책이었을까?
*문경현인터뷰
사재소라는 건 궁중에서 쓰는 고기라든가 물고기라든가 소금 혹은 뗄감을 공급하는 조달청..
그런 관청의 책임자는 감이고 차관이 소감이다.
-고향마을 23" -요즘으로 치면 행정부처의 차관에 해당할 정도의 고위관직인 사재소감...
당시 박익의 권세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그러나 박익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마을로 내려온다.
-소나무 -그가 낙향 한 이유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려조충열록 15" -고려시대 충신들을 기록해놓은 려조충열록에 보면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한 72명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는데 그 중 한명이 송은 박익이다.
*김광철인터뷰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국가 사회를 끝까지 지켜내려고 그래서 그것이 여의치않았을 때 다른 왕조에서는 복무
하지않기위해서 고향에 은둔하면서 제자들과 지방사회에 질서를 만들어가는데 크게 기여했던 절의의 선비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색 5" -송은 박익은 고려에 충절을 지킨 3은인
-길재 5" 목은 이색..야은 길재..그리고 포은 정몽주와도
-정몽주 5" 절친한 사이였다..
-영상 41" -고향에 내려온 뒤..송은 박익은 3은과 서신으로 시를 주고받으며 충절의 뜻을 함께 했는데
그 중 40여편이 아직 남아있다.
-이 시는 정몽주가 박익을 찾아 밀양에 왔을 때 주고받은 시다.
-c.g. 10" -송은 박익의 충절은 조선조정에서도 기려졌다.
정종때 박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영상과 영돈령으로 추증되고
-c.g. 7" -박익은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밀양박씨가문으로 권력과 부를 두루 갖추고있던
박익- 그는 고려충신이었다.)
*문경현인터뷰
그러한 누대의 고위관직과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방의 토호니까 그 분묘를 상당히 호화롭게 장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와같은 지방에서는 처음 보는 벽화가 그려졌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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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무덤안에서>
(북쪽의 영정이 나타나고...)
고려충신이었던 송은 박익-
그의 고려에 대한 충절은 그림속에도 나타나있습니다.
(동쪽으로 걸어온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건 매화이고 ... 이건 대나무입니다.
동서벽면의 인물들 사이에 그려져있는데요...
(동쪽벽면의 매화 그림 옆에 왕건릉의 세한삼우도 등장) 그런데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박익 묘에 그려진 것과 비슷하지요...이는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릉의 벽화에 있는 그림인데...
(왕건릉의 그림 손으로 가리키며)이게 매화고 이건 대나무....그리고 이건 소나무입니다.
이 세가지는 겨울에도 잘 견디는 식물이라고 해서 세한삼우라고 하는데 바로 충절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이 세한삼우가 등장하는 벽화는 고려태조 왕건릉이 유일했습니다.
(왕건릉 그림과 박익묘 그림 비교)그런데 이 중 소나무만 제외한 매화와 대나무가 박익 묘에 등장한 것입니다...
바로 박익의 충절을 기리기위한 그림이라는 것을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왕건릉 그림 사라지고)
(행렬도 가리키며)그렇다면 이 벽화에 그려진 또다른 그림들은 어떨까요?
우선 동서벽면을 보면 훼손된 부분까지 모두 24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향해 가고 있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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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걸까?..복식을 통한 분석>
-벽화내부 3" -(흘리고)
-그림들 19" -벽화에 등장하는 옷을 살펴보면 이들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가는지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벽화에 나타나는 옷은 크게 남녀 두가지 유형이 있다.
-남자옷 7" -남자들이 입은 옷은 모두 같은 형태다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긴 겉옷을 걸쳤고 둥근 모자를 썼다.
-여자옷 8" -여자들도 색깔만 다를 뿐 모두 같은 형태의 옷을 입었는데 고름이 없는 긴 저고리에 치마를 입었다.
-민속박물관 외경 8" (흘리고)
-전문가와 투샷 9" -언제 어떤 용도로 입는 옷인지 알아보기위해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았다..
*최은수 인터뷰
길이가 좀 삼국시대보다는 짧아지는 형태고 깃의 여밈이 오른쪽 옆구리로 완전히 여며지는 게 고려시대에 많이
나온다..여자들 허리에 가는 띠를 맨 건 옷고름이 생기기전인 조선시대 전까지 나타나는 형태..
-출토복 4" -실제 고려시대 출토복 중 일반여성들이 입었던 평상복을 살펴보면
-복원복 5" -벽화속의 옷과 그 형태가 똑같다.
-옷의 여밈이 오른쪽으로 깊게 되어있고
-벽화와 비교 6" 길이는 허리아래까지 길게 내려온다.
벽화속에 등장한 여인들의 옷은 고려시대 여인들의 평상복인 것이다.
-벽화의 머리 4" -그렇다면 여성들의 머리모양은 어떨까? 머리는 모두 두갈래로 나눠 동그랗게 올렸다.
-고려불화 18" -고려시대 풍속을 담고있는 중요한 사료인 고려불화에서 비슷한 머리모양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불화엔 고통받고있는 중생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그 중 한 여인의 머리가 벽화속 여인의 머리와 똑같다.
-두개 비교 8" -삼국시대 이후 전해내려온 전통적인 여인의 머리모양이다.
-벽화 얼굴만 남고 -벽화속 여인들의 옷과 머리모양은 고려시대 여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머리 장신구 9" -그런데 여자들의 머리모양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머리장식이다...
각기 다양한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했다.
*고부자인터뷰
상당히 특징적인 거가 화관을 쓰고 있어요 우리가 말하는 족두리나 이런 거보다 어떤 그 꽃형태의 오른쪽으로
들어가보면 양쪽으로 꽃봉우리 있다 꽃관형태 관을 쓰고 있고 물론 다른 분을 보면 환두식으로 머리를 감아올린
분도 있긴하지만 대부분 여자들이 머리위에 꽃관장식을했다
즉 그건 평소에 그렇게 했다기보다 의례적인 거 장속에 나타나기보다 어떤 이분을 추앙하기위한 그런거라면
관을 갖춘 의관을 갖춘 특별한 걸로 흥미로운 거다..
-변상도 5"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있는 변상도다.
-머리에 물을 이고 있고 3" -변상도엔 궁궐의 시녀들이 했던 두가지의 모양의 머리가 나오는데
-비교 8" 머리장식을 하지않은 건 평소의 모습이고 꽃장식을 한건 의례에 참여하는 모습이다.
-화려한 꽃장식 10" -벽화속 여인들과 똑같은 장식은 아니지만 머리에 장식을 했다는 건 특별한 의례에 참여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자옷 15" -남자들의 옷을 통해서도 벽화속인물행렬도는 특별한 의례를 위한 행렬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단령비교 10" -남자들이 걸친 긴 옷은 고려시대 관리들이 많이 입던 깃이 둥근형태의 포...바로 단령이다.
-신발 12" -신발은 긴 장화인 목화다..
고려시대 관리들이 단령과 함께 신던 신발이다.
-복두를 쓴 관리 8" -고려시대 관리의 일반적인 복장은 목화와 단령...그리고 모자는 복두를 썼다.
-벽화속의 모자 5" -그런데 벽화속에 등장한 남자의 모자는 복두가 아니다..이것은 어떤 모자일까?
*최은수 인터뷰
여기에 쓴 모자는 원나라에 영향을 받은 그런 마름모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복식사에 보면 이런
마름모의 형태를 쓴 모자가 많은데 그 모자와 유형이 아주 같은 걸로 생각이 들고..
-원나라 그림 15" -원나라때 쓰여진 잡과사전인 사림광기에 보면 벽화속의 남자가 쓴 모자와 유사한 모자들이
등장한다.
(보다가)
-원나라그림 신하 들고있는 모습 10" -원나라의 그림에선 또한가지 재미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관리옆에서 시중을 들고있는 하인이
-비교 6" 관리의 모자를 들고있는데 박익묘벽화의 동쪽벽에 그려진
-혼자 들고있는 모습 2" 여인이 모자를 들고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남쪽벽 15" -남쪽벽에는 또 한 종류의 모자가 등장한다.
말고삐를 잡고있는 남자가 쓴 모자는 관리들이 쓴 모자보다 높이가 낮고 둥근형태를 띠고 있다.
*고부자인터뷰
남문벽에 이제 말을 끌고갈려고 하는지 두분 있다..
머리 우리나라형태로 상당히 특이한 거 발립형..그릇을 엎어놓은 것같은 깃털을 장식한 거같은 이러한 형태가
우리나라에서는 낯설다.
이게 몽고의 마지막 유제..
-관복그림 5" -1274년부터 80여년간 원의 간섭을 받던 고려시대
...
관리들은 복두대신 원의 영향을 받은 모자를 썼던 것이다.
-C.G. 11" -관복을 입은 남자와 머리장식을 화려하게 한 여인...이들은 특별한 의례를 위해 옷을 갖춰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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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무덤안에서>
(앞의 그림 받아서...의문 제기하듯이)의례를 위한 행렬이다.....?
자..그렇다면 그림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그림속의 사람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뭔가 물건을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이 서쪽벽면의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그릇종류인 것같지요...
(서쪽 벽면의 여자들 손으로 가리키며)이 여자는 두 개의 둥근 그릇을 들고 가고 또 이 여자는 조금 더 큰 그릇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벽면 가리키며)이쪽의 여자는 (빨간 판)빨간색의 직사각형의 판을 들고 가는데..
역시 두 손으로 아주 정성스레 받쳐들고 갑니다. 이 물건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건 이 행렬도에 그려진 사람들의 표정입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대체 이 행렬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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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죽은이를 공양하거나 천도하기위한 의례행위다.>
-벽화 틸다운 7" -(3-4" 흘리고)
행렬의 의미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벽화속의 물건 C.G. 19" 바로 벽화속의 인물들이 들고가는 물건이다.
(보다가)
-T자 든 남자 나올때 -벽화속에 등장하는 물건중엔 독특한 생김의 물건도 있지만
흔히 보던 그릇이나 병종류도 있다.
-이 물건들은 어디에 쓰기위한 걸까?
*전문가 인터뷰
음식을 담는다거나...요거는 지금은 저희가 제사다닐 때 납작한 걸 쓰지만 오목한 걸 쓰는데 꽃도 있는데
그런 형태를 충분히 담을 수 있는거지요
-벽화속의 물건을 든 모습들 16" -국립민속박물관의 김영재박사는
벽화속 인물들이 들고가는 물건에 주목했다. 그리고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김영재박사
여러사람들이 가면서 남자들 끼고 여자들이 주로 이뤄져 근데 손에는 물건을 들어 공양할 때 쓰여지는 물건
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왜냐하면 당나라에서 나오는 그림과 유사하게 나온다.
-당나라 그림들 43" -실제 당나라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그림은 벽화속의 그림과 유사하다.
의복을 갖춰입은 여인들이 물건을 하나씩 들고가는데... 그 물건들도 박익묘의 그림들처럼 대부분 그릇종류다.
(타이트한 그림 한컷정도 흘리고)
-타이트한 그림 이 행렬은 바로 공양을 위한 행렬이다.
불교가 성행했던 당나라에는 벽화속에 공양도를 유난히 많이 그렸다고 한다.
-요나라 그림 25" -당나라가 망한 뒤 건국한 요나라에서도 비슷한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다.
11세기 후반에 그려진 고륜1호묘 벽화에서도 물건을 들고가는 남녀의 행렬이 그려져있는데
이 그림 역시 불교적인 의례행위인 공양도다.
*홍선표인터뷰'
시녀나 신하가 섞여서 행렬을 이루면서 손에 물건을 들고있는 당대부터 본격화되기시작해서 요나라고분벽화에서
크게 유행..
밀양 고분벽화에서도 남녀가 세속적인 물건을 들고가는 건 음식공양과 관계된 걸로 추정된다.
-그릇을 들고있는 사람들 22" -그렇다면 박익묘에 등장하는 물건들도
-그릇들 공양의식을 위한 것일까..?
- -벽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그릇류다
이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면 그것이 바로 공양물이다...음식은 불교의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양물인 것이다.
-희미한 그림(병들고 있는) 10" -(흘리고)
-찻잔 든 손 5" -벽화속에 등장하는 작은 그릇..이것은 찻잔이다.
-절 40" -차도 불교의식에 쓰이는 공양물이었을까?
-자막 있을때 -화엄경에 의하면 차로 공양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차 하나만으로도 공양의식이 거행될 정도로 차는 불교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공양물인 것이다
-벽화속에 찻잔이 있다는 것은 벽화속의 행렬이 공양행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빨간 판 17" -그렇다면 이 여자가 들고가는 직사각형의 빨간 판은 무엇일까?
-빨간 판 타이트 -특이한 건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받쳐들고 있다는 것이다.
-불화의 포 18" -불화에 보면 빨간 천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공양물을 올릴 때 빨간 천에 싸서 올리고 제단을 꾸밀때도 그 바닥엔 빨간 천을 깐다.
바로 포다...공양의식을 거행할 때 쓰는 포인 것이다
-T자 15" -관복을 갖춰입은 남자가 들고있는
T자 막대는 무엇일까?
-당 11" -바로 당이다.
공양의식을 거행할 때 이 당에 빨간 천을 달아 절의 문앞에 세워두는 것이다.
-C.G.에서 남벽으로 9" -동쪽과 서쪽벽에 있는 인물이 공양을 위한 행렬이라면
-남벽 팬 13" 남쪽벽에 그려진 말고삐를 잡고있는 두명의 남자는 무엇일까?
-시왕도 16" -그 해답도 고려불화에서 찾을 수 있다.
열명의 대왕이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그림인 시왕도를 보면 말고삐를 잡고있는 두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바로 죽은 이를 데려오는 사자다.
-특히 불교의식에서 사자는 늘 두명씩 등장하는데
-남벽 5" -남벽에서도 말을 끄는 사람이 두명이다.
*박은경인터뷰
말 두 마리가 등장하는 건 바로 박익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싣고가는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C.G. 10" -벽화에는 공양행렬과 두명의 사자가 그려져있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이들 공양행렬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문중 풀 14"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발굴중에
-안으로 들어가기 무덤속에서 발견되었다.
(잠시 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혼유석 꺼내기 10" -무덤 주인공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쪽벽면위에서 발견된 이 돌은
-혼유석 보이면 -혼이 머무는 돌이라는 뜻의 혼유석이다.
*인터뷰
처음엔 알지못하고 자연석인 줄 알았는데 흙을 드러내다보니까 이런 문양이 보인다 그래서 이게 평범한 돌이
아니라고 들어냈다
흙을 털어보니까..
-만자와 연꽃 8" -(혼유석엔 세면에 문양이 새겨져있었는데)
모두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문양들이다.
만자를 거꾸로 해놓은 역만자와 연꽃문양이 보이고/
/
-연잎 7" -그 옆면엔 연잎이 새겨져있다.
-국화 7" -그리고 국화문양도 보인다.
-박은경 투샷 10" -이 그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은경인터뷰
혼유석에 나와있는 역만자 원래 만자는 이런 문양 이건 반대방향
원래 만자는 측천무후때 1만이라는 의미의 문자로 지정된 게 만자문양
만자는 무한한 생성력 상징..그런 의미를 이미지화한게 만자 문양..
-만자 11" -(흘리고)역만자는 무한한 생성력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아미타정토사상을 담고있다..
-국화 13" -국화도 고려불화에 많이 등장하는 문양으로 수복 즉 장수를 의미한다..
-연잎 11" -연잎은 불교의 대표적인 문양으로 윤회를 상징한다.
-연꽃 11" -연꽃 역시 진흙속에 피는 깨끗한 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문양이다..
*박은경인터뷰
바로아미타정토신앙사상을 혼유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결국 죽은 자가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게
그림에 이미지화돼 나타나다.
-아미타 삼존도 14" -아미타정토신앙이란 불교를 믿으면 죽은 뒤 극락정토에서 온 아미타보살이 죽은 이를
극락세계로 데려간다는 신앙이다
-혼유석 22" -이러한 아미타정토사상을 담고있는 혼유석엔 송은 박익이 극락세계로 천도되길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보다가)
그리고 그 사상은 무덤속 벽화로도 이어졌다.
*심봉근 인터뷰
고려는 전 국교가 불교였다 그러나 조선은 배불숭유정책을 했지만 전기에 있어서는 일반 생활에 있어서는
유교적인 생활을 했지만 사후에는 역시 불교적인 사상을 갖지않았나 싶어서 장례하는 절차에 있어서는 불교적인
요소가 강했다는 건 이걸 통해 알 수 있다.
-C.G. 25" -이러한 불교적인 의식이 박익묘 벽화에 그대로 표현돼 있었던 것이다.
-행렬도는 박익을 극락으로 천도하길 기원하는 천도공양행렬이고
말고삐를 잡은 사람은 박익을 극락세계로 데려갈 사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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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무덤안)..이 그림엔 불교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인 송은 박익이 사망한 건 1420년..세종2년-
숭유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이 건국된지도 28년이 지난뒤입니다..
그러나 아직 조선사회엔 불교적인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무덤 밖으로 나와서)
지난 9월 송은 박익의 묘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분벽화...
영원히 역사속에 묻힐뻔했던 이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고려말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상과 머리모양을 통해 당시의 복식문화를 볼 수 있었고..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초에도 죽은 이를 떠나보낼 때엔 불교적인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호흡 쉬고)그것은 바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