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표 본드/ 박성준
유리잔에 깨진 손잡이를 붙이다가
본드의 빵빵하게 부른 배를 만진다
벌러덩 뒤집힌 코를 잘 막아두지 않아
폭식성에 찌든 누런 군침들이 본드 입구에 말라붙어 있다
짧은 다리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길
돼지가 무거운 발을 내딛고 있는 걸까
누런 고무 화합물이 살 굽는 냄새로
목 비튼 지문을 간직하고 떨어져 나간다
돼지의 걸음 뒤로 유리잔과 손잡이는
서로 잊었던 시간을 지운다, 감정도 없는
축축한 살을 꼭 껴안고 있다
식탐이 말라붙은 환각 속에서
짧은 목으로 돼지가 먼 하늘을 되뇌어본다
머리 위에서부터 망명한 저 바람은
알프스 동굴까지 외치*-외치! 굳은 몸을 부르며
살찐 미라의 주검 직전 표정을 돼지에게 문질러놓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 잃어버린 웃음들이 흘러나온다
물렁물렁한 살 안쪽을 쭉 쥐어짤 때마다
식육점 갈고리에 두고 온 몸이 달그락거리고
흔들리는 오후 한때가 본드 주둥이 끝에서 굳어가고 있다
저 차갑고 허전한 육체
얼마나 맛있게 굳어갈 주검의 준비 과정인지
돼지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꺼이 틈이 된다
유리잔과 손잡이 사이 얼어붙은 강줄기가
웃다 멈춘 순간의 눈꺼풀만큼이나 단단하다
* 외치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이 찐 미라.
- 2009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 박성준 시인
- 1986년 서울 출생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2009년 <문학과사회> 등단
- 시집 <잘 모르는 사이> 외
《심사평》
올해 응모된 시 중 먼저 주목된 것은 정수연의 「숙련공」외, 서동빈의 「연가곡 마리오네트」외, 박도준의 「긍정의 힘」외, 서지석의 「맛있는 홍대, 베이커리」외, 김상혁의 「사랑의 기술」외, 박성하의 「고래잠」외, 박성준의 「돼지표 본드」외 등의 작품이었다. 이 중 최근 시의 경향에 근접해 있어 고유의 개성이 미만하다고 여겨진 경우와, 작품의 편차가 커서 시를 완결 짓는 힘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판단된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 정수연, 박성하, 박성준의 시편이었다.
정수연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있고 일상의 단편들 속에서 시적 모티프를 착안해내어 평범한 삶의 현실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발랄함과 유연함이 돋보였지만, 화법과 어조가 기성의 시인을 연상시킨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우리'라는 복수대명사의 반복적 사용이 특히 그러한 인상을 주었는데, 시적 화자로 '우리'가 제시된 이유와 맥락이 시 내부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심사자들이 당선작을 쉽게 결정하지 못할 만큼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것은 박성하와 박성준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안정된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우열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이 중 한 사람을 택해야 하는 일이 즐거운 고민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박성하의 시는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린 연금술적 기술과 정돈된 탁마(琢磨)가 수려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빚어내어 순도 높은 서정성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박성준의 시는 다채로운 어조를 바탕으로 사물의 이면을 투시하는 시선과 포착된 대상의 특질을 다양한 각도에서 부각시킬 줄 아는 구성력이 시의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오랜 논의와 숙고 끝에 우리가 최종적으로 택한 것은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더 돋보인다고 여겨진 박성준의 작품이다. 박성하의 경우, 파편적인 언어의 진행을 서정성 가득한 이미지로 끌고 가는 힘이 빼어났지만 시종일관 지속되는 단조로운 톤이 당선작으로 뽑기엔 미흡한 측면으로 여겨졌다. 박성준의 몇몇 시편은 각각의 사물이 언어의 표층에서 작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대상을 허투루 보지 않는 진지함과 숙고의 태도가, 그리고 시를 언어의 정교한 구성물로 만들 줄 아는 정밀함이 최근 시에 드물었던 시적 기량으로 여겨져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투고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모두의 앞길에 문운이 깃들길 기원한다.
- 심사위원: 김동식, 김태환, 박혜경, 우찬제, 이광호, 최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