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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54살 「重修山陰縣學記」과 43살 「應天府重修儒學記」의 비교
2019년 6월 23일
* 왕양명이 54살에는 여러 편 글을 길게 썼습니다. 그 가운데 왕양명이 가장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쓴 글은 산음현 현학을 새로 수리한 것을 기념하는 글 「重修山陰縣學記」입니다. 왕양명 자신이 43살에 썼던 글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성현의 심학을 새롭게 고쳐서 썼습니다.
이 글은 왕양명 54살의 학술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양명의 학술이 불교의 선학(禪學)이라는 비난을 받아왔고 51살에 이단학술이기 때문에 금지 당하였고 그 뒤에 쓴 글입니다. 그래서 핵심 내용은 심학(心學)이라는 자신의 학술은 선학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하였습니다. 명나라시기에 선학이라고 비난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는 진헌장(陳獻章, 1428-1500)입니다. 이때부터 누구든지 정좌를 가르치면 일반학자들은 선학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왕양명(1472-1529)도 정좌를 가르쳤기 때문에 진헌장처럼 선학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에는 51살(1522)부터 강학과 출판을 금지 당하였습니다.
왕양명이 54살에 쓴 글에서는 심학이 유학의 정통학술이라는 것을 변호하였습니다.
첫째, 심학의 핵심은 맹자가 말한 진심(盡心)이라고 보았습니다. 심학의 근원은 요순우 임금의 대화를 기록한 『상서、대우모』 16글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6글자의 중요한 단어를 하나씩 설명하였는데, 『중용』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상서、대우모』에서 말하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심(心)과, 『중용』에서 말하는 성(性) 둘을 결합시켜 심성(心性)에 관하여 심성 본체론을 세우고, 존심양성과 정일(精一)이 동일한 수양공부론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중용』의 성(性)을 설명한 바탕에는 왕양명이 47살에 쓴 「수도설(修道說)」에서 『중용』의 핵심이 성(誠)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영하였습니다. 『상서、대우모』에서 “도심이 미세하다.(道心惟微)”의 미(微)와, 『중용』에서 “귀신의 희미한 것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을 정말로 덮어서 숨길 수 없다.(夫微之顯,誠之不可掩如此夫!)”의 미(微)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不睹不聞)의 본체라는 뜻으로 동일하게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본체론 관점에서 심성을 결합시켜서 이해한 뒤에, 맹자의 심학에서 존심양성(存心養性) 수양공부가 바로 『상서、대우모』의 정일(精一)공부라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왕양명은 47살 「수도설」에서 맹자의 진성(盡性)이 본성의 전체를 확충시킨 성인 경지라고 보았고 진심(盡心)을 따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54살 「산음현 유학기」에서는 맹자의 진심(盡心)이 “도심의 전체를 확충시킨 경지(一於道心)”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맹자의 진심(盡心)이 도심의 전체를 모두 다 확충시킨 성인 경지라고 보았습니다. 사실상 진성이나 진심 모두 최고 성인의 경지를 말하는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왕양명은 맹자의 존심(存心)은 도심을 유지하고 잃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이 『상서、대우모』의 정일(精一)공부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존심양성 단계는 정(精) 공부 단계에 해당하고, 도심 전체를 확충시킨 단계(一於道心)의 일(一) 경지가 아닙니다. 왕양명은 정 공부와 일 경지를 합하여 말한 것입니다.
셋째, 유학의 심학이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바로 정명도가 「식인편(識仁篇)」에서 강조하였던 만물일체에 근거한 것입니다. 심학은 천지 만물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여 하나처럼 여기고 실천하는 것이며,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왕양명이 말하는 불교의 선학은 소승불교를 말하며 대승 불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심학은 만물일체를 인정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유학의 중요한 인륜 곧 오상(五常)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결론은 불교가 인륜과 사물을 외면하지만, 유학의 심학은 오상의 인륜을 실천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왕양명은 정명도가 주장한 만물일체의 인(仁)에 근거하여 심학이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양명이 50살부터 주장하기 시작한 명덕과 친민의 일치(明德、親民,只是一事。)를 반영한 것입니다. 50살에는 『대학』의 명덕과 친민이 일사(一事)라고 해석하였고, 54살에는 『중용』의 대본과 달도(達道)에서 달도를 만물일체 관점에서 해석하였습니다. 결국 『대학』의 친민과 『중용』의 달도 둘을 만물일체 관점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만물일체에 근거한 친민과 달도 둘이 선학과 다른 것이라고 제시하였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심학의 근원에 관하여 첫째 근원은 『상서、대우모』, 『중용』, 『맹자』 등 선진시기 유학이며, 둘째 근원은 정명도의 만물일체의 인(仁)이라고 보았습니다. 심학의 만물일체가 불교의 선학과 다른 특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북송시기 장재(張載)는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같은 편이다.(民吾同胞,物吾與也。)” 또는 “천지가 만물을 화육하는 마음을 본받는 마음을 갖고, 살아있는 백성들에게 내가 하늘에서 받은 사명(天命)을 다하고, 끊어진 옛날 성인의 학술을 계승하여, 만세에 걸친 태평을 열겠다.(爲天地立心,爲生民立命;爲往聖繼絕學,爲萬世開太平。)”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정명도가 요약하여 만물일체이며 핵심은 인(仁)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은 장재와 정명도가 주장한 만물일체를 심학의 중요한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면, 왕양명은 54살에야 심학에 관하여 어설프나마 체계를 세웠습니다. 『대학』의 명덕과 『중용』의 솔성을 통합하여 설명하였는데, 둘을 연결시킨 중요한 채널이 바로 『상서、대우모』의 “도심이 미세하여 감지하기 어렵다.(道心惟微)”는 구절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맹자의 심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여 맹자의 존심양성과 『상서』의 정일공부를 풀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맹자의 심학을 온전하게 다 풀어서 심학을 완성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54살에 쓴 글을 43살에 쓴 글에 비교해보면, 43살에는 심즉리(心卽理)와 지행(知行) 관점에서 심학을 설명하였는데 아무래도 많이 어설픕니다. 이때는 지행합일을 주장하고 마음에서 본체를 깨달아야한다고 강조하였을 뿐이며 두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43살보다는 47살에 쓴 글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53살에 황성증(黃省曾)에게 보낸 서신에서 「수도설」이 미완성이라고 말하였지만, 54살에는 심학에 관하여 여러 자료를 인용하여 적극적으로 연관시켜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고 47살에 쓴 「수도설」을 많이 개진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왕양명의 견해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왕양명은 길게 작문하는 것을 무척 어렵게 여겼고, 더구나 학술적인 논문을 쓰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왕양명은 대체로 남들과 대화하면서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잘하였지만, 글로 쓰려고 하면 어려웠는지 학술적인 논문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게 쓴 글도 자세히 살펴보면 엉성한 곳이 많습니다. 50대에는 학생 황성증(黃省曾)에게 『논어』를 설명해줄테니까 글로 써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습니다. 바빠서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탁한 것 같습니다.
왕양명이 글쓰기를 어렵게 여겼던 까닭은 어렸을 때 많이 놀고 과거시험에 필요한 팔고문(八股文) 짓는 것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에 문학을 배워서 글짓기가 그나마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이 좋아하였던 문학은 고아한 고급문학이 아니라 당시 절강성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연극과 유행가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반사람들의 정서와 심리를 잘 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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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重修山陰縣學記」(乙酉,1525,왕양명 54살):
절강성 소흥부 산음현(紹興府 山陰縣)의 현학(縣學)은 세월이 오래되어 많이 무너졌습니다. 산음현학의 교유(敎諭) 왕한(汪瀚) 등이 지현 고탁(顧鐸)에게 건의하여 건물을 모두 새로 고쳤고, 학생들에게 해주어야할 말을 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아버지 삼년상에 있기에 거절하고 해주어야할 말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고탁이 북경 형부 낭관으로 전직하고 낙양 출신 오영(吳瀛)이 산음현 지현으로 와서 다시 부족한 건물들을 짓고 나에게 글을 다시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남경에서 관직에 있을 때(왕양명 43살) 응천부(應天府, 남경) 유학(儒學)을 새로 수리한 과정을 기록하면서 말하였던 것(「應天府重修儒學記」)이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국가가 선비를 양성하는 까닭은 과거시험에만 매달리지 말고 실제로는 성현이 되는 학술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산음현 현학에서 곧 성인을 모시는 큰 건물(殿), 높이 돋은 땅바닥에 사방을 둘러 지은 건물(廡), 강학의 전용건물(堂), 학생들과 일꾼들의 기숙사(舍) 모두 확장하여 수리하였고, 학생들에게 주는 양식의 지급 규칙들도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모두 담당 관원들이 학교를 정비해야하는 일입니다. 천하에 널리 적용되는 도리(仁, 『孟子、滕文公下』:“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 孫奭疏:“ 孟子言能居仁道以爲天下廣大之居。”)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찾고 또는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학교를 개선시켜야하는 일입니다. 예전에 「응천부 유학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조심스럽게 반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학술을 왜 배워야하는지를 말한 내용에 상세한 체계가 부족하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고향 소흥부(산음현은 소흥부 소속) 선비들을 위하여 한 마디 드리려고 합니다.
옛날 성인들이 배웠던 학문은 심학이며, 맹자가 말하였듯이 진심(盡心)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요순우 임금들이 물려주고 받았던 말은 『상서、대우모』에 기록 16글자가 있는데, “인심이 위험하고 도심이 미세하다. 정(精)하고 일(一)하는 정일(精一)공부를 하여 중(中)을 쥐고 잃지 않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씩 설명하면, 첫째, 도심은 『중용』에서 말하는 솔성(率性)이며 인욕이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도심은 귀와 코 같은 감각기관으로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사유능력이 아주 지극히 미세하지만 발현되며 『중용』에서 말하는 성(誠)의 근원입니다. 둘째, 인심은 인욕이 섞여서 사유능력이 위험합니다. 잘못된 판단(僞, 판단오류)의 시작점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듯이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측은하게 여기는 것은 『중용』에서 본성이 저절로 발현되는 것을 따른다고 말하였던 솔성(率性)의 도리(道)입니다.
그런데 우물로 기어가는 어린아이를 옮겨놓은 행동을 하면서, 마음속에서는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는 의도가 있거나, 동네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의도가 떠올랐다면, 이것은 본성이 저절로 발현되는 순간에 인욕이 섞여서 이런 의도로 바뀐 인심입니다. 배를 굶주리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은 어떤 의도도 없기 때문에 본성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따른다는 솔성의 도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침이 솟는 맛을 다 내려고 하거나, 입맛에 당기는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는 것은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에 인심입니다. 셋째, 일(一)은 마음 전체가 모두 도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정(精)은 도심이 순일(純一)하지 않거나 또는 인심이 섞이는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중(中)을 설명하자면 『중용』에서 말하는 도리(道)가 중(中)이며, 마음 전체를 모두 도심이 되어 조금도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중(中)을 쥐고 잃지 않는다.(允執厥中)”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 전체가 도심이 된 경지(一於道心)를 『중용』에 대입하여 설명하면, 도심이 유지되는 것이 중(中)이고 도심이 발현되는 것이 화(和)입니다. 도심이 발현되는 것을 유가의 덕목 오상(五常)에서 설명하면, 이러한 도심을 따라 부자(父子)관계에서 발현되면 부자가 서로 친(親)하며, 군신관계에서 발현되면 서로 의(義)하며, 부부, 장유(長幼), 붕우 세 가지 관계에서 발현되면 각기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되며, 이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중절(中節)의 화(和)이며 천하의 달도(達道)입니다. 도심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옳은 원칙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원칙이며 앞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유지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상서、대우모』에서 말하는 도심을 똑같이 갖고, 『중용』에서 말하는 본성을 똑같이 갖고, 달도(達道)를 똑같이 여길 것입니다.
순임금이 고신씨의 후손 설(契)을 전국의 토지와 백성을 담당하는 사도(司徒)에 임명하시고 백성들에게 인륜을 가르치라고 일러주었는데, 바로 달도(達道)를 일러주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모두 군자가 되었고, 도덕수준이 높고 뛰어나서 국가가 집집마다 표창해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세상이 되었던 까닭은 대체로 가르치는 사람은 위에서 말한 내용을 가르쳤고, 배우는 사람도 위의 내용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요순우 성인들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될수록 심학이 쇠퇴하니까 사람들의 거짓(人僞)이 나타났습니다. 정치가는 공리(功利)를, 학자는 경전을 설명하는 글(訓詁)을, 학생은 외워서 읊는 기송(記誦)을, 문학가는 아름다운 글짓기(辭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며 일어난 뒤에는, 성인들이 가르쳤던 심학은 이리저리 조각조각 나뉘었고 세월이 갈수록 서로를 모방하였고, 결국에는 옳지 않은 것을 자신들의 입장에서 옳다고 주장하고, 인욕이 섞인 사유(思惟)를 하는 인심이 뜨겁게 유행하고 도심의 미세한 사유가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게 되었습니다.
몇 백년마다 이런 잘못을 깨닫고 본원을 회복시키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이러한 심학을 불교의 선학(禪學)이라고 떼를 지어 시끄럽게 욕하고 있습니다. 아! 심학을 어떤 방법으로 다시 밝힐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선학과 유가 성인의 학술 모두 타고난 도심을 다한 진심(盡心)을 추구하지만【이 글의 전체 내용을 보면, 왕양명은 도심 전체를 모두 다 확충한 것이 진심(盡心)이라고 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점은 아주 작습니다. 유가 성인은 진심을 추구하면서 천지 만물이 한 덩어리(일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 부자(父子)가 친하지만 천하에 친하지 못한 부자가 있다면 나의 도심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우리 군신이 의롭지만 천하에 의롭지 못한 군신이 있다면 나의 도심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 부부가 유별하고 장유가 유서하고 붕우가 유신하지만, 천하에 유별하지 못한 부부가 있거나, 유서하지 못한 장유가 있거나, 유신하지 못한 붕우가 있다면 나의 도심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 식구들 모두 잘 먹고 따듯하게 살고 즐기지만 천하에 배불리 먹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부자의 친, 군신의 의, 부부의 별, 장유의 서, 붕우의 신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의 도심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인들은 법률(紀綱)을 세워 정치를 하고, 예악(禮樂)을 만들어 교화를 하였습니다. 대체로 지나치게 큰 것들은 자르고 아주 작은 것들은 이어서 서로 돕도록 제도를 만들고, 개인마다 도심을 이루고 남들도 도심을 이루도록 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타고난 도심을 다하는 진심(盡心)의 방법을 추구한 것입니다. 도심을 다하면 가정, 국가, 천하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인의 학술이 바로 진심이라고 주장합니다.
불교의 선학도 마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달도(達道)도 분명히 우리들이 타고난 마음입니다. 그들은 내 마음에서 타고난 도심이 어둡지 않다면 끝난 것인데 어찌 외부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외부 생활에 옳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어찌 내 마음속에서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진심이겠지만, 자신만을 위한 사심과 이익에 치우친 것에 빠졌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들은 도덕규범이라는 인륜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외부 사물을 버리더라도, 자기 혼자 착하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데, 결론은 불교의 진심으로는 가정, 국가,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유가 성인의 학문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내 마음과 외부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천지 만물을 하나라고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선학은 자신만을 위한 사심과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과 사회생활이라는 내외를 구분한 것이 유가 성인의 학문과 다른 까닭입니다. 만약에 심성(心性)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인륜을 제외시키고 사물을 버렸다고 판단된다면, 이런 학술은 정말로 불교의 선학입니다. 그런데 인륜을 제외시키지 않고 사물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오직 맹자가 말한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공부를 한다면, 이런 학문은 분명히 요순우 임금이 물려주신 정일(精一)의 학문인데, 어찌 불교의 선학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세상의 학자들은 과거시험과 글짓기의 습관을 배워서 자신의 도심을 내버려두고 더럽히고 해치고 공격하는데, 이것은 성인의 진심 학술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것이며 빨리 달려갈수록 더욱 멀어지는데 어떤 끝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학자가 심성을 설명해주고 배울 학생들을 불러 모으면, 이들은 아주 놀라서 선학이라고 간주하고 거꾸로 원수처럼 봅니다. 이런 태도는 아주 슬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오해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남이 틀렸다고 비난합니다. 이런 태도는 잘못된 구습이 이들의 도심을 가렸기 때문이며 이들의 직접적인 잘못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오해를 알면서도 남들의 오해를 무시하고 말해주지 않는 것도 자신만을 위한 사심입니다. 잘못된 오해를 설명해주고 알려주더라도 더욱더 깜깜하게 반성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 고향 소흥부에는 호걸 선비가 많고, 또한 남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잘못을 깨달은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선비와 학자들은 잘못된 구습에 가려진 자신을 용납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의 요청을 받고 특별히 한 마디 말씀을 해드립니다. 아! 내가 어찌 특별히 우리 고향 선비들에게만 한 말씀을 하였겠습니까!
왕양명,「重修山陰縣學記」(乙酉,1525,왕양명 54살):
山陰之學,歲久彌敝。教諭汪君瀚輩以謀於縣尹顧君鐸而一新之,請所以詔士之言於予。時予方在疚,辭,未有以告也。已而顧君入爲秋官郎,洛陽吳君瀛來代,復增其所未備而申前之請。
昔予官留都,因京兆之請,記其學而嘗有說焉。其大意以爲朝廷之所以養士者不專於舉業,而實望之以聖賢之學。今殿廡堂舍,拓而輯之;餼廩條教,具而察之者,是有司之修學也。求天下之廣居安宅者而修諸其身焉,此爲師、爲弟子者之修學也。其時聞者皆惕然有省,然於凡所以爲學之說,則猶未之及詳。今請爲吾越之士一言之。
夫聖人之學,心學也,學以求盡其心而已。堯、舜、禹之相授受曰:“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道心者,率性之謂,而未雜於人。無聲無臭,至微而顯,誠之源也。人心,則雜於人而危矣,偽之端矣。見孺子之入井而惻隱,率性之道也。從而內交於其父母焉,要譽於鄉黨焉,則人心矣。饑而食,渴而飲,率性之道也。從而極滋味之美焉,恣口腹之饕焉,則人心矣。惟一者,一於道心也。惟精者,慮道心之不一,而或二之以人心也。道無不中,一於道心而不息,是謂“允執厥中”矣。一於道心,則存之無不中,而發之無不和。是故率是道心而發之於父子也無不親;發之於君臣也無不義;發之於夫婦、長幼、朋友也無不別、無不序、無不信;是謂中節之和,天下之達道也。放四海而皆准,亙古今而不窮,天下之人同此心,同此性,同此達道也。
舜使契爲司徒而教以人倫,教之以此達道也。當是之時,人皆君子而比屋可封。蓋教者惟以是教,而學者惟以是爲學也。聖人既沒,心學晦而人偽行。功利、訓詁、記誦、辭章之徒紛遝而起,支離決裂,歲盛月新,相沿相襲,各是其非,人心日熾而不復知有道心之微。間有覺其紕繆而略知反本求源者,則又哄然指爲禪學而群訾之。
嗚呼!心學何由而復明乎!夫禪之學與聖人之學,皆求盡其心也,亦相去毫厘耳。聖人之求盡其心也,以天地萬物爲一體也。吾之父子親矣,而天下有未親者焉,吾心未盡也;吾之君臣義矣,而天下有未義者焉,吾心未盡也;吾之夫婦別矣,長幼序矣,朋友信矣,而天下有未別、未序、未信者焉,吾心未盡也。吾之一家飽暖逸樂矣,而天下有未飽暖逸樂者焉,其能以親乎?義乎?別、序、信乎?吾心未盡也。故於是有紀綱政事之設焉,有禮樂教化之施焉。凡以裁成輔相,成己成物,而求盡吾心焉耳。心盡而家以齊,國以治,天下以平。故聖人之學不出乎盡心。
禪之學非不以心爲說,然其意以爲是達道也者,固吾之心也。吾惟不昧吾心於其中則亦已矣,而亦豈必屑屑於其外? 其外有未當也,則亦豈必屑屑於其中? 斯亦其所謂盡心者矣,而不知已陷於自私自利之偏。是以外人倫,遺事物,以之獨善或能之,而要之不可以治家國天下。
蓋聖人之學,無人己,無內外,一天地萬物以爲心,而禪之學,起於自私自利,而未免於內外之分,斯其所以爲異也。今之爲心性之學者,而果外人倫,遺事物,則誠所謂禪矣。使其未嘗外人倫,遺事物,而專以存心養性爲事,則固聖門精一之學也,而可謂之禪乎哉!世之學者,承沿其舉業、詞章之習以荒穢戕伐其心,既與聖人盡心之學相背而馳,日鶩日遠,莫知其所抵極矣。
有以心性之說而招之來歸者,則顧駭以爲禪,而反仇讐視之,不亦大可哀乎!夫不自知其爲非而以非人者,是舊習之爲蔽,而未可遽以爲罪也。有知其非者矣,藐然視人之非而不以告人者,自私者也。既告之矣,既知之矣,而猶冥然不以自反者,自棄者也。
吾越多豪傑之士,其特然無所待而興者,爲不少矣,而亦容有蔽於舊習者乎?故吾因諸君之請而特爲一言之。嗚呼!吾豈特爲吾越之士一言之而已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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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응천부 중수 육학기(應天府重修儒學記)」(甲戌, 1514, 왕양명 43살):
응천부(남경)는 수도 서울이기에 응천부의 학교는 동남지역 학교교육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명나라 초기에 태학으로 만들었습니다. 홍무 14년(1381)에 처음 창건하였고, 정덕 기유년【정덕 연간에는 기유년이 없기에 왕양명 본인 또는 편집자의 잘못입니다. 기유년이 옳다면, 기유년은 홍치 2년(1489)이며 왕양명이 말하는 몇십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었다는 말에 부합합니다.】에 다시 수리하였습니다. 다시 수리한 뒤부터는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덕 7년(1512)에 응천부 지부 장종후(張宗厚)가 새로 수리할 것을 처음 건의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중승(中丞)으로 전직하여 떠났습니다. 백보지(白輔之)가 지부를 맡아 썩고 망가진 것을 바꾸고 고치고 부족한 건물들을 크게 보완하였고, 자신의 봉급을 내어 영성문(欞星門) 밖에 돌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응천부 부승 조시헌(趙時憲)도 설계와 기획에 협력하였고 그래서 수십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하루아침에 수리를 마치자 빛날 만큼 볼만합니다. 학교의 교사와 학생 모두 감동하여 열심히 공부하려고 합니다. 공자 사당과 학교(廟學)가 새로 수리되자, 교수 장운룡(張雲龍) 등과 학교의 전체 학생 2백여 명이 지부와 부승 두 사람의 공적을 기록하고 다시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사양할 수 없어서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여러 교사와 여러 학생들은 지부와 부승 두 사람이 학교를 수리한 공적을 잘 안다면 동시에 열심히 공부하여 두 사람의 공적을 성공시켜야한다는 것도 잘 알 것입니다! 훌륭한 학자들을 교사로 임용하고 학생들의 기숙사와 강당을 구분하고 갖가지 물품들을 새로 바꾸고 급식을 제대로 공급하는 것은 국가가 세운 학교제도이며 어느 학자 개인이 세운 학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서진 것을 수리하고 썩은 것을 바꾸고 부족한 급식을 제대로 공급하고 게으른 학업을 잘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담당 관원의 책임이며 어느 학자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학문은 배워서 성현이 되는 것입니다.
성현의 학문은 심학입니다. 심학에는 도덕이라는 땅, 충신(忠信)이라는 터, 인(仁)이라는 집, 의(義)라는 길, 예(禮)라는 문에, 염치라는 담장, 육경이라는 출입문, 사서(四書)라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내 마음에서 찾아야하며 겉모습만 꾸미는 것에서 빌려올 것도 없으니 공부가 얼마나 쉽지 않습니까? 행동하여 실천하여야하며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으니 효과가 얼마나 크지 않습니까? 하은주 삼대의 학술은 모두 이렇습니다.
우리 명나라는 과거시험으로 관원을 선발하지만 학교를 세운 취지는 어찌 하은주 삼대와 다르겠습니까? 학교를 세우지 않는 것은 국가의 잘못이고, 학교를 수리하지 않는 것은 관원들의 잘못입니다. 학교가 세워지고 수리를 하였더라도, 학교 안에 살면서 학교를 세우지 않고 수리하지 않는 것은 교사들의 잘못이며 학생들의 수치입니다. 지부와 부승 두 관원이 학교를 수리한 것은 담당 관원의 책임을 다한 것이고, 여러 교사들과 여러 학생들은 서로 학문을 닦아 잘못과 수치에서 벗어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도덕의 땅을 확장시키고 충신(忠信)의 터를 다지고 인(仁)의 집에 살고 예(禮)의 대문을 열고 염치의 담장을 튼튼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배워서 관원이 되어 크게는 천하를 보호하는 일을 맡고, 다음으로는 지방의 성(省)이나 군(郡)을 보호하고, 작게는 고향 마을과 가족을 보호하는데, 국가가 학교를 세운 취지와 담당 관원이 학교를 수리하는 마음을 어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仁)의 집을 비워두고 의(義)의 길을 버리고 도덕과 염치를 무너뜨리고 성현의 육경을 이용하여 나쁜 짓을 하여 학교가 이런 못된 사람들의 집합장소가 된다면, 국가가 학교를 세웠지만 학생들이 쓰러뜨린 것이고 담당 관원이 수리하였지만 학생들이 무너뜨린 것이니 이것은 특별히 무슨 마음에서 그랬습니까?
응천부는 모범이 되는 서울(남경)이기에 영웅호걸과 뛰어난 위인들이 대대로 이어오고 있으며 문학도 빛나고 과거시험 합격자도 아주 많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새로 수리한 것에 대하여 여러 교사들과 여러 학생들이 기꺼이 개혁하려는 뜻을 가진 것을 높이 칭찬하고 앞으로 성현의 학문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왕양명, 「應天府重修儒學記」(甲戌, 1514, 왕양명 43살):
應天,京兆也,其學爲東南教本,國初以爲太學。洪武辛酉,始改創焉,再修於正德之己酉。自是而後,浸以敝圮。正德壬申,府尹張公宗厚始議新之,未成而遷中丞以去。白公輔之相繼爲尹,乃克易朽興頹,大完其所未備,而又自以俸餘增置石欄若干楹於欞星門之外。於是府丞趙公時憲亦協心贊畫,故數十年之廢一旦修舉,煥然改觀。師模、士氣,亦皆鼓動興起。廟學一新,教授張雲龍等與合學之士二百有若幹人撰序二公之績,徵予文爲記。
予既不獲辭,則謂之曰:
多師多士,若知二公修學之爲功矣,亦知自修其學以成二公之功者乎!夫立之師儒,區其齋廟,昭其儀物,具其廩庖,是有國者之立學也,而非士之立學也。緝其弊壤,新其圬墁,給其匱乏,警其怠弛,是有司者之修學也,而非士之修學也。士之學也,以學爲聖賢。
聖賢之學,心學也。道德以爲之地,忠信以爲之基,仁以爲宅,義以爲路,禮以爲門,廉恥以爲垣牆,『六經』以爲戶牖,『四子』以爲階梯。求之於心而無假於雕飾也,其功不亦簡乎?措之於行而無所不該也,其用不亦大乎?三代之學皆此矣。
我國家雖以科目取士,而立學之意,亦豈能與三代異!學之弗立,有國者之缺也。弗修焉,有司者之責也。立矣修矣,而居其地者弗立弗修,是師之咎,士之恥也。二公之修學,既盡有司之責矣,多師多士無亦相與自修其學,以遠於咎恥者乎!無亦擴乃地,厚乃基,安乃宅,辟乃門戶,固乃垣牆!學成而用,大之則以庇天下,次之則以庇一省一郡,小之則以庇其鄉閭家族,庶亦無負於國家立學之意、有司修學之心哉!若乃曠安宅,舍正路,圮基壤垣,倚聖賢之門戶以爲奸,是學校之爲萃淵藪也,則是朝廷立之而爲士者傾之,有司修之而爲士者毀之,亦獨何心哉?
應天爲首善之地,豪傑俊偉,先後相望,其文采之炳蔚,科甲之盛多,乃其所素餘,有不屑於言者。故吾因新學之舉,嘉多師多士忻然有維新之志,而將進之聖賢之學也,於是乎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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