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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책
이 홍사
책!
책이라는 글씨를 타이핑하고 흰색바탕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책이라는 글씨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상하네. 늘 쓰는 말인데 이렇게 낯설 수가.......
다음에 술이라는 단어의 자판을 두드렸다.
책, 술, 두 단어다. 두 단어가 나란히 있으니 더 낯설다. 술이라는 단어를 클릭하여 앞으로 넣어보았다. 술, 책, 이상하다. 단어를 붙여보았다.
술책,
무슨 술책이야? 권모술수의 안개를 피우는, 무슨 계략적인 언어로 둔갑되었다. 어감이 영 별로다. 이 두 단어를 띄우고 연결고리로 과를 넣어본다.
술과 책!
이렇게, 단어를 연결하여 보니 모니터의 단어가 어색하지가 않다. 일단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술과 책이라........ 어감이 낯설지 않다. 그렇게 단어를 조립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시계를 본다. 아직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책!
책이 나왔다.
그게 지난달이었다.
미얀마에 출장을 가서 머물 적에 책이 나왔다는 전갈을 받았고 사무실을 지키는 여동생으로부터 표지 사진을 받았다. 장기출장이라 내가 책을 보기도 전에 먼저 읽은 가족들의 서평이랄 것까진 없고, 읽은 소감을 갖가지 통신매체를 통해 받았으니 나로서는 따끈따끈한 신간이 주는 신선함은 좀 떨어져있었다.
시는 괜찮지만 소설은 단언컨대, 유통기한이 있다. 역사소설이 아니라 리얼리즘은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금세 구문이 된다. 식기 전에 빨리 책으로 구워내야 하는 물건이다. 출하시기를 늦추면 상하는 물건이 바로 리얼리즘소설이다. 출하시기를 잘 조정해야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출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을 먹고는 곧 바로 출판사에 원고를 넘겨주고 출장을 갔다.
아무튼, 책이 나왔다.
책이 나왔으니 출판기념회를 빙자하여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과 한잔 나누고 싶었다. 미얀마에서 돌아와 우편으로 책을 보낼 적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번 모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참석할만한 가까운 사람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출판기념회를 빙자한 모임에 와서 받아가란 얘기다. 심지어 경무에게도 보내지 않았다.
일 년에 반은 해외에 나가있는 관계로 이따금 있는 문학모임에 나가 본 지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멀리서 날마다 언제 한잔하자는 약속을 전화로만 해놓고 유예시키던 이들과 한잔을 나누고 싶었는데 적당한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책이 나왔고 연말이 되었으니 한자리에 모이기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출판기념회를 거론하기가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하여 경무를 불렀다. 녀석은 시 산하의 새로 개관한 문화체험관의 팀장으로 가서 전화를 할 적마다 바쁘다고 했지만 기어이 짬을 내서 저녁 한 그릇하자고 끝내 역정까지 내서 불러냈다.
그게 보름 전쯤이었다.
퇴근을 하고 경무가 사무실로 왔다. 둘은 사무실 앞 골목, 동태찌개 전문점 식탁 앞에 둘이서 마주 앉았다. 누른 봉투에 든 책을 건네자 경무는 책을 표지부터 끝까지 대충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형! 출판기념회는 해야죠?
기다렸던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던지.
경무가 시집을 내었을 적에 내가 주선해서 북 리뷰를 했으니 출판기념회는 경무 자신의 숙제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출판기념회라고 할 것까진 없고 책을 빙자하여 한번 모이면 좋지.
-언제가 좋겠어요?
-연말이고 옛날 멤버들이 한번 모이는데 의미가 있는 거지. 네가 알아서 해라.
녀석은 멀리서 참석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아예 연락도 하지 말고 가까운 사람끼리, 경상도 말로 ‘속닥하게’ 하자고 했다.
-속닥하게? 거 좋지. 거울이 비싸다고 얼굴이 예쁘게 비치는 건 절대 아니야. 속닥하게 하는 거야. 오붓하게 하는 게 아니고.
-형!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요.
-이것 보세요. 류 경무시인! 어감에 차이가 있지. 속닥하게는 좀 비밀스럽게 하는 것이고 오붓하게는 친밀하게 하는 차이. ‘확실히’가 아니고 누구 말마따나 ‘학시리’ 어감에 차이가 있는 거야.
오붓하게는 아니고 ‘속닥하게’ 하자고 정한 날이, 금요일인 오늘이고 장소는 멀리 찾아볼 것도 없이 그날 먹은 동태찌개 전문점이었다. 식당에 따로 딸린 방이 있어 장소를 물색할 필요도 없이 그곳에서 하기로 간단하게 합의를 보고 카운터에 있는 여주인을 불러 날짜를 일러주며 그날 방을 좀 비워두라고 했다.
-몇 명이나 되죠?
주인여자가 그걸 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말에 둘 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파악해보고 알려드릴게요.
경무가 식탁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소주잔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두 병의 소주를 비우며 참석할만한 인원, 아니 모셔도 좋을 위인들을 손꼽아 보았다. 구미라는 문학의 불모지에 문학의 텃밭을 마련한 몇 분의 선생님들을 모시는 건 당연하다는 데 뜻을 모았고 같이 습작을 했던 몇몇이 거론되었고 다음으로 같이 산행을 다니며 친하게 지내는 지역문화연구소, 다양하게 문화나 창작활동을 하는 회원들을 불러내는 건 실례가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지역문화연구소는 어느 정치인의 후원하는 단체가 아니다. 정치색은 없고 지역의 문화를 살리자는 데 순수한 뜻을 두고 모인 지역의 문화인들이다. 경무는 오히려 그 팀을 부르지 않으면 결례가 된다고 했다. 그렇게 부를 사람을 꼽고 헤아려보니 스무 명 남짓, 게 중에서 사정상 빠지는 사람을 감안하면 열댓 명 정도, 그 정도의 인원이면 경무 말마따나 ‘속닥한’ 자리가 되겠다.
이야기가 그쯤 되자 경무는 카운터에 앉아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있는 주인아주머니를 다시 불렀다.
-오실 사람이 열대 명쯤 될 거 같네요.
-열댓 명, 알았습니다. 저 방 두 칸을 합치면 충분할 거 같네요.
방이 충분하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뒤통수에 대고 다시 말했다.
-열댓 명이 아니고 열댓 명쯤입니다. 쯤!
녀석은 열댓 명이 아니라 쯤을 강조했다. 아주머니가 경무를 돌아보고 씽긋 웃었다. 영양가가 있는 고단백 웃음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 싸고 사람이 사근사근 좋아 보여서 사무실에 누가 오면 가끔 데려가는 집이다.
이미 식은 동태찌개를 안주삼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참석할만한 사람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누구는 경무가 연락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내가 직접 전화를 넣기로 했고 지역문화연구소는 총무인 애롱이사장에게 전화를 하면 단체 문자가 들어갈 것이니 경무가 연락하기로 했다.
성공이다.
그날 경무를 부른 저의는 바로 그것이었는데 무리 없이 내 뜻대로 성공리에 끝이 났다. 경무는 방에 걸 수 있는 작은 현수막과 샴페인을 거론했지만 거추장스런 짓은 하지 말고 그냥 ‘속닥하게’ 한잔 하자고 했다.
반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식당 앞, 인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각자 알아서 적당한 시기에 연락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책 열심히 읽고 그날 책에 대해서 네가 얘기해라.
-알았슈.
그게 보름 전쯤이었다. 그 동안 경무가 제대로 연락을 했는지 안부전화를 가장하여 두 번이나 통화를 하며 확인했다. 더러는 그렇잖아도 한잔 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경무가 제대로 연락을 한 모양이다.
조금 전에는 일삼아서 예약한 앞 골목 동태찌개 전문점에 가서 문을 열었는지 확인을 했다.
-우리는 365일 연중무휴예요. 오뉴월 눈 오는 날만 문을 닫아요.
혹시 문을 닫은 게 아닌가, 확인하러 왔다는 내 말에 주인 여자가 웃으며 농을 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식탁 셋을 붙여서 수저와 접시에 컵을 엎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해놓았다.
먼저 찜을 얼큰하게 해서 소주를 마시고 찌개는 밥을 먹을 적에 하면 좋겠다는 말에 주인여자는 찜은 식으면 질기고 맛이 떨어진다고 하며 손님이 오시는 대로 바로바로 찌개를 올리면 된다고 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자고 했다. 식당은 이른바 세팅 완료였다.
경무는 조금 일찍 서둘러 퇴근을 하겠다고 했다.
다시 사무실에 오는데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지역문화연구소 총무인 기획사를 하는 애롱이사장이 회원 전체에게 보낸 단체 메시지인 모양인데 나에게도 들어왔다. 본명이 김예룡인데 나이가 적다고 동생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이름을 바로 부르기도 뭣해서 부드럽게 애롱이사장이라고 부른다. 김 사장!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친근감이 있다. 그렇게 부른 지가 이십오 년이 넘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나만 그렇게 부른다. 언젠가 애롱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애교스러운 재롱둥이라고 말했고 당시에 우리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름이라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메시지 내용은 오늘 저녁 출판기념회에 많이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 받은 문자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잊고 있을까봐 다시 한 번 더 보낸 것이리라. 내용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간단하게 ‘쐬주’ 한잔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라는 얘기였다.
사무실에 들어오니 불을 켜둔 채 여동생이 퇴근을 하고 없었다. 동생 책상의 노트에 적힌 다음날 배차 상황을 훑어보는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리할배의 전화다. 오리할배가 책 뒤표지에 실린 서평을 간략하게 한 줄을 써 주셨다. 오리할배는 이 동네에 있는 중학교 교장을 삼 년이나 했으니 이 동네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동태찌개 식당도 같이 몇 번 갔었으니 길을 묻는다고 전화를 할 이유가 없다. 뭔가 께름칙하다.
-오리할배! 오고 계시능교?
넘겨짚어 물었다.
-지금 영양인데 곧 출발할 거고 탑리시인한테 전화를 해봐라, 못 간단다. 오늘 장날이라고 바쁘다고 하던데? 그 띠발 눔은 툭하면 장날 핑계를 댄다.
오리할배 고향은 영양군 청기면이다. 아마도 고향에 무슨 볼일로 갔었던 모양이다,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00번지로 시작되는 시가 오리할배의 첫 시집에 상재되어 있다. 하여 나는 오리할배의 출생지를 본의 아니게 외우고 있다. 탑리시인이 오시지 않으면 곤란하다. 자갈치소설가와 오붓하게 한잔하자고 누누이 약속을 했는데, 탑리시인이 빠지면 ‘속닥하게’에 금이 가는 일이다.
오리할배의 전화를 끊고 바로 탑리시인께 전화를 때렸다.
-오, 훌륭한 소설가!
탑리시인은 발신번호를 보고 누군지 알고 계셨다.
-오늘 대단히 슬픈 비보를 받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무슨 비보?
-오늘 참석하지 못하신다면서요? 그 보다 슬픈 비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항, 오늘 장날이라 늦게 끝이 나고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자갈치소설가께서 오시기로 했는데?
-자갈치소설가와 오리할배가 죽이 잘 맞아. 고스톱 라이벌인 걸. 그렇게 한잔해.
-늦더라도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세요.
-내가 시간을 좀 조정해볼게. 장날이라 지금 좀 바빠.
바쁜 티가 역력했다. 탑리시인은 길게 통화할 짬도 없는 모양이다. 탑리시인은 탑리에서 약국을 한다. 시골 노인들이 오일장이 서는 날, 장에 나오는 걸음에 장터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 간다. 언젠가 탑리에 가서 탑을 둘러보고 탑리시인의 약국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인구가 다 빠져나간 촌구석에서 약국을 하지 말고 시내로 나오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탑리시인은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고 했다. 면민이 칠천 명에 육박할 적에 투약하는 환자가 천오백 명이었고 지금 면민이 고작 천육백 명으로 줄었는데 투약자가 천오백 명이라고 하면서 인구가 빠져나간 것과 약국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했다. 결국 노인들만 남았다는 얘기인데 탑리시인께선 평생 그곳에서 약국을 하면서 시를 쓸 작정인 모양이다. 아무튼, 탑리시인은 바쁜 와중에서도 시간을 조정해보겠다고 했으니 늦게라도 연락이 있을 게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건 왜 이렇게 익숙해지지 않는 품목인지.......
오늘은 새벽부터 목욕을 다녀와서 부산을 떨었는데 시간이 더디다.
식당의 준비를 확인하고 와서 들고 가기 좋도록, 새로 나온 책과 서재에 진열해 놓고 쳐다보며 아끼던 양주 그리고 어렵게 구한 러시아산 보드카를 쇼핑백에 따로 따로 담아놓았다.
시계를 또 쳐다본다.
아직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조금 전에 안동에서 상도가 출발한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지금쯤 고속도로에 올렸을 것이고, 자갈치소설가께선 부산에서 기차를 탔다고 했으니 지금쯤 한참 올라오시고 있을 것이다. 언제 짬이 되면 한잔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자갈치소설가와 가장 많이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기회가 닿은 것이다. 내려가는 차편을 걱정했으나 주말부부인 상도가 금요일이라 부산으로 내려가기에 그 차를 이용하면 되니 마음 놓고 한잔을 하며 그간의 회포를 풀 수가 있겠다.
술과 책이라........
모니터의 술과 책이라는 글씨 뒤에 커서가 껌뻑인다. 달아서 뭔가를 쓰라는 얘기다. 술과 책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산만하기만 한 내 사유는 엉뚱한 곳으로 치닫는다.
책을 읽다가 너무 슬퍼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가 생각난 게 있어서 메모를 하고, 그 메모가 나중엔 책이 되어 나오니 술과 책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면 조금 억지스럽지 않은가. 아니다. 달리 풀이해서 오늘은 책을 빙자해서 술자리를 만들었으니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이치다.
굳이 술과 책에 대해서 연관관계를 찾지 말고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도 정감이 가는 낱말이다.
술과 책!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잠시 망설일 필요가 있다.
술은 마셔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책은 읽어서 취한다.
맞는 말이다. 비교하기는 좀 거시기해서 거시기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둘 다 마누라라는 물건보다는 서열이 앞서는 품목들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가급적 쓰지 말아야한다.
마누라에게 걸렸다간 다음날부터 밥상이 허술해진다.
들고 가기 좋도록, 쇼핑백에 담아서 회의용 원탁위에 얹어놓은 책과 술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즐겁고 마음이 푸근하다. 저렇게 담아놓은 것을 정물화로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려놓은 정물화를 보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이라도 찍어둘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커서가 껌뻑이는 노트북을 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쇼핑백에 든 책을 한 권 꺼내놓고 보드카를 꺼내서 책 위에 얹어놓고 휴대폰의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 다음 책과 양주를 나란히 놓고 또 셔터를 눌렀다. 다음은 책을 대여섯 권 꺼내 세워두고 책이 쓰러지지 않게 양쪽에 술 두병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자동으로 바로 갤러리에 저장이 된다.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걸작이다. 참 정감이 가는 사물이다.
사진을 보고 있는데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문화연구소 총무인 애롱이사장이다. 식당에 도착했다는 전갈이다.
-벌써?
-일찌감치 나서서 걸어서 왔더니 금방이네요. 오픈게임으로 한잔 마셔야죠.
-알았어. 내 금방 갈게.
후다닥 술과 책을 담아서 들고 나섰다. 밖에 나오니 이미 골목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애롱이사장은 걷는 걸 좋아한다. 재작년에 음주에 걸려 운전면허가 취소되고부터 걷는 걸 터득한 모양이다. 그리고 혈당이 조금 오르자 웬만한 길은 걷는다. 같이 산행을 하면 앞서서 가장 빨리 걷는 인간이다. 얼마나 빨리 걷는지 따라가려면 숨이 벅차다. 지금은 면허를 다시 땄지만 술자리가 있거나 가까운 길은 걸어서 다닌다. 걷는 걸 좋아하니 양복을 입더라도 신발은 언제나 운동화다. 아마도 시간을 계산하고 출발했는데 조금 일찍 온 모양이다.
마당에 내려가서 생각하니 노트북을 종료시키지 않았다. 쇼핑백을 현관 앞에 두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 노트북 보니 술과 책이라는 글씨 뒤에 커서가 껌뻑이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책을 빙자해서 술을 마시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왕창 넓히련다.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지도 않고 엉거주춤 선 채로 노트북을 종료시켰다.
다시 내려와 쇼핑백을 들고 골목을 빠져나와 식당에 가니 그 사이에 경무도 와있었다. 둘이서 찌개도 나오지 않았는데 소주병을 따고 있었다. 둘은 연배가 비슷해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안주 나오면 마시지?
-밑반찬이 좋은데 뭐.......형님덕분에 오늘 술 마시려고 차를 두고 왔어요.
경무가 내 잔을 채우며 말했다.
-뭐 타고 왔나?
술 마시려고 작정을 하고 직원보고 좀 태워달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한잔하는데 차 때문에 신경을 쓰기 싫었노라 했다.
-여기 좋은 술 가져왔는데.
쇼핑백을 디밀자 경무가 술병을 꺼내서 보더니 양주는 알겠는데 길쭉하게 생긴 이 술을 뭐냐고 물었다.
-러시아산 보드카.
경무는 술병을 보더니, 이게 몇 도야? 하면서 상표부터 살폈다. 상표는 키릴문자로 쓰여 있었다.
-이야, 이거 54도네. 울대가 짜르르하겠는데, 어디서 났어요?
-출판기념회 한다고 국제사절단이 왔지.
몽골에서 친바녀석이 나왔다. 며칠 전에 사무실에 들러 내게 주고 간 술이었다. 중고 중장비 가격도 알아보고 한국행 비자를 죽이지 않기 나왔다고 했다. 몽골은 비자조약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비자를 내면 이 년 안에 네 번을 나와야 한다. 그러면 비자가 이 년이 연장된다. 그렇지 않으면 비자를 다시 내야하는데 한국행이 인터뷰까지 해야 하는, 절차가 복잡하다.
친바는 몽골에서 내가 키워놓은 녀석이다.
지금은 접었지만 몽골에서 중장비 사업을 할 적에 매니저로 데리고 있던 녀석이다. 한국에서 칠 년을 불법체류하면서 공장에 다녔다는데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해서 데려다 놓고 키워놓은 녀석인데 지금은 제 소유의 포클레인이 네 대나 되는 어엿한 사장이다. 녀석이 나오면 내가 미얀마에 있었고 미얀마에서 돌아오면 녀석은 몽골로 날아가고 없었다. 통화만 했지 오랜만에 만난 녀석이라 중고 중장비 시세를 알라보러 하루를 같이 다녔다. 같이 다니면서 대화를 해보니 웬만한 포클레인은 제 손으로 다 고치는 도사가 되어 있었다. 집에는 재울 방이 없고 러브호텔에 재우기가 좀 껄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진섭이가 와서 제 집에 빈방이 있다며 데려갔다. 진섭이는 새마을 무슨 봉사단의 자원봉사자로 몽골에서 일 년을 근무하며 같이 뒹굴었으니 당시의 내 매니저였던 친바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진섭이도 지역문화연구소 회원이니 문자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다. 전화는 없었지만 오늘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다. 친바가 아직까지 같이 있다면 분명 같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사절단이 되는 셈이다.
-캬! 죽인다. 술이 입에 짝짝 붙네. 역시 술은 무슨 안주로 먹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랑 마시느냐가 술맛을 좌우하네요.
경무의 말이었다.
-그걸 이제 알았냐?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술이야. 마시고나서 캬! 하고 감탄사를 내는 음식은 술 밖에 없을 걸.
-듣고 보니 그러네요.
밑반찬으로 나온 두부조림과 소주를 한잔 마시니 금세 찌개가 나왔다.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서빙을 했다. 우선 하나만 올리고 준비를 다해두었으니 손님이 오는 대로 바로바로 올리겠다고 했다. 찌개는 주방에서 반쯤 익혀서 나왔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서 불을 알맞게 조절한 주인여자는 맛있게 드시라고 말하고는 뒷걸음질로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
-형! 참 오랜만이다. 그렇죠?
-뭐가?
-구미라는 땅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기가. 아! 이 지독하게 메마른 문학 불모지!
-구미뿐만이 아니라 전국이 다 그래. 문학의 시대는 죽었어.
-형! 오늘 건배제의는, 시대는 죽었다. 죽은 문학시대의 부활을 위하여! 어때요?
-말이 되네. 정말 죽었어. 출판사들 사정이 말이 아닌 모양이더라. 기획사도 어렵지?
끓어 넘치는 찌개를 뒤적이는 애롱이사장에게 물었다.
-어렵죠. 저는 잠깐만 있다가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돼요. 직원들 일 시켜놓았고 할 일이 좀 남았어요.
-애롱이사장! 죽도록 일해서 돈 벌지 마라. 아이 새끼들 철들게. 죽도록 해서 왕창 물려줘봐야 다 헛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깔라족이라고 들어봤나? 그 종족들은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 절대로 제 새끼들에게 고기를 잡아주지는 않아.
-깔라족?
-그래 깔라.
깔라! 지독한 종족이다.
미얀마에 있는 인도족인데 불교를 믿지 않는 무슬림이다. 버마족과는 족속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다. 생김새부터 냄새까지 버마족과는 다른 인디언인데 경멸하는 투로 깔라라고 부른다. 허나, 깔라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깔라라고 마구 부르진 못한다. 우리가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어다. 이 깔라가 미얀마 경제를 쥐고 흔든다. 이문에 밝아 교묘하게 부를 축적한 족속이다. 버마족은 깔라들과 거래하기를 싫어한다. 한쪽 손에 돈을 쥐고 있는데 그걸 받아내려면 죽을 사정을 해야 하고 버틸 대로 버티다가 돈을 주는 족속들이다. 마땅히 주어야할 돈인데도 그렇단다. 깔라는 돈에 관한한 양심도 체면도 없다. 거래에 있어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족속이라 했다. 대신 받을 돈이 있으면 안주고는 못 배길 정도의 독촉이 들어온다고 했다.
미얀마에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국민의 순수미소를 들먹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여러 종족이 사니 약을 대로 약은 민족이 있다. 그 대표적인 족속이 깔라다. 심지어 버마족이나 샨족은 이웃에 깔라가 살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할 정도로 경멸하는 족속이다. 버마족은 버마족끼리 거래하고 깔라는 깔라끼리 거래를 한다. 깔라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 고기를 잡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죽도록 지독히 번 돈은 죽을 때 깔라의 무슬림 재단에 기부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 종족이다. 그 점은 배워야 하다. 우리는 죽도록 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데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렇게 잡아준 고기를 초년에 탕진한다. 그 다음 손가락을 빨다가 굶어죽는다.
깔라! 그 지독한 족속에게도 배울 게 있지만 깔라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자. 오늘 같은 날 술맛이 떨어질라.
-깔라족인가 킬라족인가에 대해서 얘기 좀 해줘요.
애롱이사장이 익은 두부를 국자로 퍼서 내 접시에 담아주며 말했다.
-그래 깔라족은 킬러야. 상대하면 죽어.
-정말 킬러예요? 그런 족속이 있어요? 호기심이 바짝 당기는데.
-오늘같이 좋은 날 그 지독한 족속들을 입에 담기가 싫은데, 다음에 얘기해 줄게. 오늘은 그냥 술과 책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그럽시다. 대신 정치얘기를 꺼내면 벌로 소주 한 병 원 샷 하기.
애롱이사장이 제의했다.
그 말을 들은 경무가 두부를 우물거리며 덧붙였다.
-그 다음에 집에 키우는 개새끼 자랑하면 두 병, 원 샷.
-아니 바꿔야 돼. 정치얘기가 두 병으로, 정치얘기보다는 차라리 집에 키우는 개새끼 자랑이 귀에 덜 껄끄럽지.
-아이고, 형님! 말도 마이소. 요즘 그게 유행인지 메시지로 개새끼 사진이 날아오는데 환장하겠습니다. 분양받으라고 하고, 선물로 준다고 하고, 나는 개새끼가 딱 질색인데. 어디든 음식점에 들어가다가 식탁 밑에 개새끼나 고양이가 있으면 저는 바로 돌아서 나와요.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요. 동네주민들이 선물로 주어 안고 청와대에 들어간 개새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게 궁금하네.
-너 지금 개새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나? 소주 두 병, 원 샷 할래?
애롱이사장이 걸고 넘어졌다.
-개새끼 이야기지, 결코 자랑은 아니잖아?
-그만들하고, 엔돌핀이 팍팍 생성되는 얘기 없나? 그야말로 해피 에너지가 충전되는 이야기를 하자.
-그럽시다. 엔돌핀이 팍팍 돋는 책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죠.
경무가 책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경무는 다 읽었는지 모르지만 애롱이사장은 그때서야 쇼핑백을 끌어당겨 책을 한권 뽑아 들고 보더니 표지가 쌈박하다고 했다. 기획사 사장 눈에 쌈박하게 보였다니 다행이다.
-형! 서문이 좀 서글퍼요.
-그래? 서글프지만 솔직하게 썼는데?
서문에는 이국의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이제는 낙조를 깊숙이 관조할 나이라고 적었고 나의 석양도 저렇게 찬란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미얀마에서 적어서 출판사 메일로 날린 서문이었다.
-늙어가는 건 자랑이 아니에요. 형이 늙으면 나도 늙는 거잖아? 형 서문이 남의 얘기가 같지 않아서.......
-우리가 만난 지 삼십 년이 넘었지. 연륜을 더하는 건 자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일도 아니야. 곱게 늙자.
그때 벗어둔 윗도리의 주머니에 든 전화벨이 울렸다. 꺼내보니 오리할배였다. 지금 영양에서 출발한다는 전갈이었고 좀 늦을 거라고 했다.
-지금 영양에서 출발하신다구요?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거기에서 출발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바로 오는 고속도로가 없으니 족히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노안이 있는데 밤길운전에 위험하니 바로 대구로 내려가시라고 했다. 통화내용을 들은 경무도, 애롱이사장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다음 기회에 따로 한잔하기로 하고 조심해서 대구로 바로 내려가라고 거듭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리할배의 전화를 끊자 바로 벨이 울렸다.
보니 자갈치소설가다.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를 바꾸어주기로 약속했었다. 위치설명은 택시 기사에게 하기로 되어 있었다.
-택시 타셨습니까?
-기사님 바꿔줄게.
택시기사를 바꾸어주었다. 택시기사에게 등기 맞은편에서 유턴을 해서........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노법사가 들어섰다.
-이야! 책이 술을 부르는구나.
노법사 뒤에 강국장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술이 잘 익는 저녁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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