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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1/2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제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 KBS 역사스페셜 2009년 9월 5일 방송, 전문 기록 -
1908년, -중국 자금성- 중국 청(淸)나라 선통황제(宣統皇帝)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의 마지막 황제였다. 중국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
[1959년 중국 푸순(撫順 무순) 전범 재판소, 영화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末代皇帝' 중에서]
"아이신줘러 푸이, 전범자 아이신줘러 푸이(愛新覺羅 애신각라 溥儀 부의), 나이 53세, 만주족 북경 출신...."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 줘러, 아이신 줘러.....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라(愛新覺羅) , 이것은 청황실의 성씨(清皇室 姓氏)입니다. 성이 꽤 길죠. 그런데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골타와 누루하치, 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골타(阿骨打)는 여진족으로 1115년 금(金)나라를 세운 금태조이고요, 누루하치( 努爾哈赤)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後金) 그러니까 청(淸)나라를 세운 청태조입니다. 오늘 우린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카이펑(開封 개봉)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宋)나라의 수도였다. 1100년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5만에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徽宗)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산과 활기찬 수도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황제의 후원 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엔 치욕적인 한족(漢族)의 역사가 서려있다. 1100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의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거란의 간접 통치를 받던 여진족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했다. 중국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합이빈) 인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완안 여진족(完顔 女眞族)도 거란의 간접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1만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완안 여진족은 거란의 통제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팔리성 전투- 1만의 여진족(女眞族)이 요(遼)나라 10만 대군을 하얼빈 인근 출하점(出河店)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룻밤 새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출하점 전투의 주역은 바로 완안 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阿骨打 金 初代皇帝 太祖)는 곧바로 금(金)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하를 건너 한족(漢族)의 나라인 송(宋)의 수도 카이펑(開封 개봉)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수도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1127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 함락-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강지변(靖康之變)!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는 여진족에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됐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다.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 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1068-1123)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인물은 아골타의 네째 아들 완안 올출(四太子 完顔 兀朮)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때문에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됐다. 완완 올출도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중국 드라마 '팔천리로의 雲月'중에서 남송의 악비(岳飛)가 금나라 완안 올출(完顔 兀朮)을 만나는 장면]
(八千里路雲和月 팔천리로운화월)
".... 金兀朮(김올출) ...."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 올출을 金兀朮(jīn wū zhú)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 올출을 왜 김올출이라 부를까. 금나라(金國) 왕자의 성(姓)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金氏)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甘肃省 甘肅省)의 경안현」엔 뜻밖에도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감숙성 경안현 완안마을-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네째 아들 완안올출 즉 김올출(金兀朮)이라 했다. 왜 금 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의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밭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긴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에 정체를 숨긴 채 5천 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공동체를 이뤄 8백 여년 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1140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 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 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先人影 완안 종실 선인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올출의 후손인 완안 청베이(44세)]
"김올출(金兀朮)은 금 희종(金 三代皇帝 熙宗)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릉왕(金 四代皇帝 海陵王, 完顔亮 완안량 liàng)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릉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형(完顔亨 hēng)은 해릉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 顔 顏
자막 → "김올출은 금 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헝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 자막
후손들도 완안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전 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완안씨 사당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 올출의 비가 있다. 완안 올출(完顔 兀朮)의 비(碑)에도 역시 김올출(金兀朮)이라는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 太师(師) 都元帅(帥) 金兀术(朮) (태사 도원수 김올출)- 왜 자신들의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김씨라 부를까?
[완안 올출의 후손인 완안 청베이(44세)]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왔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金) 자에 담겨있다.
"金兀朮 즉 김올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입니다만 중국에선 대단히 드문 성입니다. 중국 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조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리시죠.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 볼까요.
668년 고구려(高句麗 즉 高麗)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리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渤海)를 건국합니다. 그러다 926년 거란족(契丹族)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요,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遼)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 때 여진족(女眞族)은 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아골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金)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漢族)의 나라인 송(宋)을 침략해 중원대륙을 초토화시키는데요,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입니다."
** (주) 여진, 금의 만주에서의 영역은 고려의 영역과 충돌합니다. 고려가 요하에서 선춘령까지 만주의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습니다.
관련 링크 :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29&pn=1&num=7270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 이곳엔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이 모여들곤 했다. -커발한 개천각(開天閣)-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李裕岦 1907~1986) 선생이 설립해 스물 네 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천제, 치우천황,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桓雄天帝 蚩尤天皇 檀君王儉 高朱蒙 大祚榮 ...)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의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 大金帝國 太祖 大聖武元皇帝 阿骨打 (대금제국 태조 대성무원황제 아골타) -
구한말(舊韓末)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란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는 이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 사람(大金國太祖皇帝는 我平州人)…'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주) 고종황제는 옛 조선(古 朝鮮)이 한(韓)으로도 불렸기에 국명을 한국(韓國)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한국(韓國)과 대비하여 구한(舊韓)이라 표현하는 것.*
중국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합이빈, 흑룡강성) 근교의 아청(阿城 아성)시는 금나라 수도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滿洲族)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석가래는 우리나라 옛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다. 한 켠엔 볏집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 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족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 버리고 이젠 만족(滿族)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북경)의 수도 도서관(首都 圖書館)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에 고문헌 자료실엔 각종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서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란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쫒기던 송은 양자강 건너 항저우(杭州 항주)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호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호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다. 호(號)는 완안(完顔)씨로 (여진에서의)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王)과 같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之主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 欽定四庫全書 松漠紀聞 *眞(진. 번체) = 真(진. 간체)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내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활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였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금사(金史)》본기 -
金之始祖諱函普,(금나라 시조는 함보라 불리웠는데)
初從高麗來,(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때)
年已六十餘矣。 (이미 60여세 정도였다.)
兄阿古乃好佛,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하여)
留高麗不肯從,(따라 오지 않고 고려에 머무르면서)
曰:(말하기를)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후세 자손은 반드시 서로 모여 살 자가 있을 것이니)
吾不能去也。(나는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獨與弟保活裡俱。(홀로 아우 보활리와 함께 왔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吉迺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
신라와 고려인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가면 대략 900년대 초반이 된다.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한푸(函普 함보)는 고려(高麗)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을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
신라말 고려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滿洲)로 이동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중국 수도 도서관 고문헌실에선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 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 주장은 근거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청(清)나라 국편 공식 역사서.
'사서를 보니 신라왕실인 김씨가 수십세를 이어왔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
金之始祖諱哈富 (舊作函普。) 初從高麗來, (按: 《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 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 舊地相錯, 《遼、金史》中, 往往二國互稱, 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 居完顔部布爾噶 (....) 水之涯。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지금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00여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다는 데 대해 가지고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이다 아니다 이런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 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松漠紀聞), 금사(金史),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뿐 아니라 금지(金誌), 삼조북맹회록(三朝北盟會編-편-) 등에도 줄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민족으론 최초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떠습니까?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굴까요?"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김부 金傅)의 무덤만이 이곳 경기도 연천에 있다.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는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경순왕 9년 -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 겨울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그렇게 신라 천 년 사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多勿)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麻衣太子遺蹟址碑(마의태자유적지비)-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에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엔 수백 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천 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 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金克守)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고려사(高麗史)》예종 10년,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金克守)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란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신라 고도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해사록(海槎錄)》- 김세렴(金世濂)의 일본 여행기
'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김행)의 후손이다.'
金傅雖降而麗王幷 其外孫完顔阿骨打卽權幸之後 乃宰割中國傳世百年 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
「김부(金傅 경순왕)가 비록 항복하여 려왕(麗王 고려왕)에 병합되었지만 그 외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곧 권행(權幸, 金行)의 후예가 중국을 분할하여 다스려 백 년의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神明)의 후예라 일컫지 않겠는가. 」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金幸)인데 왜 권행(權幸)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삼태사 묘(廟), 경북 안동시 북문동- 왕건은 이 세사람에게 태사(太師)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金幸)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太師公 權幸)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新羅 慶州 金氏)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100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서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죠. "
김함보가 누군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명예교수]
"김함보(金函普)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가지고 여진지역에 옮겨간 걸로 추론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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