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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한 마음을 … (말씀을 믿고)
2009년 8월 2일 / 대예배 / 마태복음 14:22-33
마 14:22-33 /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고 그동안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23) 그런 뒤에 기도를 드리려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밤이 되자 24) 바람이 일고 물결이 사납게 밀어닥쳐 제자들은 바다 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5) 새벽 네 시쯤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유령이 걸어오는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27) 예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말을 건네 안심을 시키셨다. “나다. 무서워하지 말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정말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29) “걸어오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물위를 걸어갔다. 30) 그러나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베드로는 “살려 주십시오, 주님!” 하고 소리쳤다. 31) 예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시고 32)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이 세상에서 도덕적이고 훌륭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세상적으로는 허물이 많고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회개하여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믿음 중에도 큰 믿음을 소유할수록 하나님은 더 기뻐하시는데 여기에서 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심과 행함 즉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미지근하게 또는 내 생각, 계산대로, 내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전진하기는 커녕 뒤로 퇴보할 뿐입니다.
▶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믿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창 12:1-4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이유를 묻지 아니하고 말씀하신대로 순종했습니다. 또 백세 때 난 외아들 이삭을 잡아 제사로 드리라고 했을 때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아니 미친 짓일 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흡족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어드립시다.
▶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도 하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부족한 어부였지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주저하지 아니하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제자의 길,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오늘 읽어 드린 본문의 내용을 보면, 한 번은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풍랑을 뚫고 저편에서 흰 그림자가 물위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더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안과 공포에 쌓여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내니 두려워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심한 풍랑 속이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심한 풍랑의 물결을 헤치고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주님! 만일 주시거든 나로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앞뒤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배에서 바다 위로 뛰어 내렸더니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얼마 못가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눈이 요동치는 물결을 보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던 귀는 물결 소리만 듣게 되자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왈칵 겁이 나 그만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물 위를 걸어본 사람은 베드로밖에 없습니다.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도 홍해나 요단강이 갈라진 다음에 걸었지 베드로처럼 물 위로 걷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여 실수도 했지만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라면 바다 위라도 뛰어내리는 적극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처음부터였습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피곤과 실의에 가득차서 물가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짜증이나 화를 내기는커녕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나이다.”하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이 잡았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이요,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명령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30-33).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바다를 걷던 베드로가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잡아 건져주신 예수님은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진 원인을 믿음이 적어 의심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부끄럽게 물에 빠졌지만 베드로는 이번 일로 인하여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했던 믿음을 채우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그의 삶에는 앞으로도 실수도 있었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일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더 얻고자 합니다.
■ 목표를 가지십시오. /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티르오이트시의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가 남달리 열심히 일을 하던 어느 날 에디슨을 만났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하고 에디슨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헨리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 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노력한지 13년 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큰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 확신(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미국의 유명한 농구 코치 중에 아돌프 루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의 손을 거치면 누구라도 큰 선수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떤 스포츠 기자가 그의 기고만장을 꺾기 위해 한 후보 선수를 스타로 만들어 보라고 제안을 합니다. 루프는 흔쾌히 제안에 응했습니다. 그날부터 코치는 후보 선수에게 ‘전 미대표팀 센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모든 선수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자 차츰 그 선수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피눈물하는 노력 속에 그 후보 선수는 불과 2년 만에 진짜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습니다.
무슨 일에든 확신이 없거나, 믿음을 갖고자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만이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합니다.
■ 오직 앞만을 바라봅시다. / 토마스 칼라일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그의 방대한 원고를 끝내고 그 원고를 존 스튜어트 밀에게 읽어보라고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창백한 얼굴로 칼라일에게 밀은 하녀가 그만 실수로 그 원고를 불쏘시개로 사용했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칼라일은 그 소리를 듣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2년 동안의 노고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는 원고를 다시 써야겠다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방대한 원고를 다시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칼라일은 거리를 걷다가 석공이 길고 높은 벽을 쌓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작업 관경을 지켜보던 칼라일에게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 가자. 내일은 다음 페이지를, 모레는 그 다음 페이지를 … . 좋다! 그렇게 하자.” 그는 천천히,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굉장히 지루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계속했고, 마침내 그 원고를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완성된 원고는 첫 번째의 것보다 더욱 훌륭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쁜 기억이나 불행한 사건에 얽매어 가야할 앞길을 포기하지 마십시다.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일뿐입니다. 설령 현재의 일조차 실망적일지라도 믿는 이들에게는 말씀만을 믿고 전진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실수나 불행은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는 것이요 특히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파도처럼 밀려와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씩 당신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십시다. 어제 실패했으면 어떻습니까? 어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나십시다. 오늘만은 실패로 끝내지 마십시다.
■ 내 꿈이 작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리키만 그리브스의 일화 속에 나오는 잭슨 부인은 뜨개질을 퍽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시력이 무척 나빠 뜨개질을 시작하기만 하면 눈이 쑤시고 아파서 뜨개질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입고 있는 거의 모든 옷이 그녀가 손수 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하루에 한 줄씩 짜지요. 제가 실컷 짜 보았자 한 줄이랍니다. 하지만 하루에 한 줄씩 짜도 1년이면 옷을 한 벌 지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일은 너무 하찮아서 전혀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혹 시작했다 하더라도 곧 단념해 버립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잭슨 부인처럼 끈질기게 참는다면 언젠 가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 25장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실수한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별 것이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니 실망뿐입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하고자 하는 의욕조차 잃게 됩니다. 결국 자신에게 있는 소중한 달란트조차 포기하여 땅속에 묻어버리고 맙니다. 좌우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내가 남들보다 못하면 실망이 오고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이라도 앞서면 교만케 됩니다. 우리는 오직 푯대만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갑시다.
■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 조급한 사람은 자꾸 우물에 가서 숭늉을 달라고 합니다. 밥이 끓지도 않았는데 밥을 달라고 조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급한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게으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 시간쯤 장미를 바라보십시오. 장미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입니까? 아주 조금씩 자라기 때문에 그 자라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주간을 지난 뒤에 보면 달라진 모습을 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자라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장미는 죽지 않는 이상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작은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는 방법은 중요한 일을 성취해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한 방법입니다. 개미는 한 번에 모래 한 알갱이를 옮겨 도시를 짓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매번 조금씩 적은 돈을 꾸준히 모음으로써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하십시오. 얼마 되지 않아 흡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꺼번에 할 수 없으면 아예 시도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사고방식은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큰 이유가 됩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벽돌 한 장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한 번에 벽돌 한 장씩을 쌓아 올려 건물이 지어지는 것처럼 성공을 차근차근 쌓아 올리고 그 쌓아 올린 것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목표가 정해지면 최선을 다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놀고 있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 심고, 가꾸는 자에게 필요한 능력과 더불어 좋은 열매를 주십니다.
■ 오를 산이 있으면 길은 보입니다. /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지만 질병과의 전쟁에서 인간은 여전히 열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연두는 인간이 완전히 정복했다고 1980년 세계보건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18세기 유럽 사람들의 주요 사망 원인은 천연두였습니다.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20-40%가 사망하였고 고열, 두통, 요통, 구토 등에 시달리다 치료된다고 해도 얼굴에 흉터가 남아 평생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 무서운 천연두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사람은 제너입니다.
그는 5세 때 성직자였던 아버지를 잃고 역시 성직자였던 큰형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13세에 가까운 곳의 외과의사 밑에서 견습했다고 합니다. 그 후 8년 동안 제너는 의학과 외과술에 관한 지식을 철저히 배웠는데, 견습생시절 가축이 옮기며 비교적 위험성이 적은 질환인 우두에 걸렸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들이 천연두에 우연히 또는 고의로 접해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현상을 깊이 생각한 결과 그는 우두가 천연두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우두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계획적으로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고 비웃음만 샀다고 합니다. 당시 유명한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존 헌터 박사는 그의 의견을 듣고 “왜 생각만 하고 있는가, 왜 실험해보려 하지 않는가?”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1796년 5월 제너는 손가락에 우두를 금방 앓은 상처가 있는 세어러 네머스를 발견했고, 그녀의 상처에서 뽑은 물질을 제임스 핍스라는 8세 소년에게 접종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열이 나고, 약간의 병변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난 후 천연두 물질을 이 소년에게 다시 접종했는데 아무런 병도 생기지 않았으며 완전히 병에 대한 면역이 생겼다고 합니다. 1797년 그는 왕립학회에 그의 실험결과를 설명한 짧은 논문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그 후 1798년 그는 사례를 더 첨부하여 소책자인〈우두 백신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연구〉를 개인적으로 출판했지만 세상의 반응은 호의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격과 중상, 비방 등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종두법의 가치는 빠르게 증명되어 유럽과 미국, 그리고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결국 제너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큰 존경을 받았지만 자신의 발견을 이용해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길을 열어 놓으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무수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펼쳐 놓았습니다.
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요 14:6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 어떤 젊은 여성이 투신자살을 하려고 강물로 뛰어내렸습니다. 근처에 있던 한 청년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사실 수영을 할 줄 몰랐습니다. 단지 가련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기가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물속에 뛰어든 것입니다. 청년은 곧 허우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물속으로 들어갔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면서 익사 직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자살을 시도했던 젊은 여성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투신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 청년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물을 먹고 숨을 헐떡이는 청년을 안전하게 물가로 끌어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끝내려는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청년이 살려고 몸부림치는 광경을 보면서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한 줄기 빛, 즉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를 강물로 뛰어들게 한 것은 ‘절망감’이었지, 그녀의 원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극적인 순간에 자신이 살아야 할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다시 활기찬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잠 24:16 / 올바로 사는 이들은 수도 없이 넘어진다 할지라도 또다시 일어서고야 말 것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 오르지 못할 나무도 자주 쳐다보십시오. /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지 못할 나무일지라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도 있고, 나무 밑둥치를 잘라 과일을 따먹을 수도 있고, 긴 장대를 이용하여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66세 시각 장애인으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주인공 정진옥 씨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그것도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은 장애를 딛고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를 도우며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1968년부터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버스와 택시 기사로 30여년을 살면서 늘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는데 1992년 갑자기 찾아온 녹내장과 포도막염으로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되었지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으로서 공부를 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집 근처에는 시각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검정고시 고졸반이 없어 하루에 왕복 8번씩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서울서 인천 학익동의 시각장애인복지관까지 다녀야 했습니다. 5년 간 공부하여 고검 시험에 합격한 그는 “대학에 다닌다면야 좋겠지만 여건상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선은 마사지 기술을 배워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강자는 힘 있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자입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미리 포기하지 말고 쳐다보면 길이 열립니다.
■ 선한 목표를 가지십시오. / 어느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수년 동안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우편환이 동봉되어 왔는데, 죽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 매주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묘지 관리인은 직접 그 여인을 만났습니다. 관리 사무소 쪽으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운전사가 사무실로 뛰어와 “밖에 와 계신 부인께선 병으로 지친 몸이라 걸어 나올 수가 없으니 와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합니다. 차 안에선 병색이 완연한 늙은 부인이 앉아 아주 커다란 꽃다발이 안고 있었습니다. “제가 애덤스 부인입니다. 지난 몇 해 동안 매주 당신에게 5달러의 우편환을 보낸 사람입니다.” “꽃을 사라고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아들놈의 무덤 위에 놓아 달라고요. 저는 한 번도 그 일을 잊어버리거나 걸러 본 적이 없습니다.” 애덤스 부인은 다시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제가 앞으로 몇 주일을 더 못 살 거라고 해서 말입니다. 잘 됐지요. 제게는 생의 목표도 없었는데 ….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꽃다발을 놓아 주고 싶었습니다.” 관리인은 잠시 그 여인을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습니다. “부인, 저는 꽃을 사라고 계속 돈을 부쳐 주시는 걸 보고 늘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유감이라니요?” “유감이지요, 꽃은 잠시 동안만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곳엔 꽃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꽃을 보거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아,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매주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위로해 주는 모임에 나가고 있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 주립 병원이나 정신병원 같은 곳에 있는 환자들은 꽃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들은 꽃을 볼 수도 있고, 향내를 맡을 수도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부인, 보시다 시피 이 근처엔 ….” 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동안 앉은 채로 조용히 기도를 몇 번 반복하더니,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가 버렸습니다. 관리인은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에 운전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왔습니다. “그 동안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찾아 꽃다발을 전해 주느라 무척 바빴답니다.” 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들은 몹시 기뻐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니까 저한테도 얼마나 큰 기쁨이 찾아오던지 …. 의사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게 다시 건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생의 목표를 다시 찾았거든요.”
▶ 많은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은 모두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강력한 지도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둘은 열렬한 음악광이었으며 인생의 황금기를 적도 부근에서 보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린 랑바레네병원의 앨버트 슈바이처였고, 다른 사람은 ‘사이비 교주’로 불린 가이아나의 짐 존스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사랑을 실천한 성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짐 존스는 비극적인 집단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인생의 출발 및 과정은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복종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짐 존스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철저히 이용하는 이기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공허한 꽹과리 소리일 뿐입니다. 촛불은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힙니다. 희생과 수고 없이 얻어지는 것들은 무가치합니다.
▶ 선한 목적이라면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황금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것도 황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황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크리스토퍼’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루는 큰 갈등을 합니다. “내 이름처럼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을 쫓는 인생을 살 것인가?” 해답을 얻기 위해 콜럼버스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자.’ 그 후로 콜럼버스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 기간이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세월이었다.”
■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 몇 사람이 고기잡이배를 타고 낚시하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낚시에 열중한 사이에 점점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졌습니다.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지만 바닷물의 흐름이 바뀐 탓에 우왕좌왕하다가 방향을 잃었고 주위는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등불을 치켜들고 방향을 잡으려고 했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일행 중에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등불을 끄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기세에 눌려 불을 끄자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졌습니다. 하지만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둠 속에서 멀리 항구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잡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혼잡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방황할 때에는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바라보려고, 예수님의 음성만을 들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 놓았는데, 옆에 사슴이 뛰어 가니까 사슴을 잡으려고 따라 갑니다. 사슴을 따라가다 또 노루를 따라 갑니다. 그러다가 사자는 이것저것 다 놓칩니다. 허전한 마음으로 토끼에게 오니 토끼도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이것저것 다 가지려면 안 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좇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도 얻지 못하는 공허, 허무, 헛된 수고에 좌절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모든 것 내려놓고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뿐만 따릅시다. 그 길이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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