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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3)
2014년 2월 16일 / 고전 14:20,
마 6:2-4
6. 자기의 가치를 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광불휘(眞光不煇) - 진정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 眞:참 진, 光:빛 광, 不:아닐 불, 煇:빛날 휘
도광양회(韜光養晦) -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 韜:감출 도, 光:빛 광, 養:기를 양, 晦:그믐 회 /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원래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은밀히 힘을 기른 것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과거 덩샤오핑 시절 중국의 대외정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한다. 덩샤오핑은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내부적으로 국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는데, 이를 '도광양회'라고 표현했다. 이런 정책은 당시 서구 열강들에 대항할 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추지 못한 중국의 처지에서 매우 현실적인 방법론이었으며, 이후 199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에 오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화평굴기(和平崛起) - 和:화할 화, 平:평평할 평, 崛:우뚝 솟을 굴, 起:일어날 기 / 중국이 2003년 말부터 채택한 외교노선을 표현한 것으로 평화롭게 국제사회의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는 뜻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2004년 1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을 순방하며 중국의 새로운 외교노선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나 자신의 가치 평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소평가를 해도 해로울 때가 있지만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어떤 가치라던가 미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지 말되 묵묵히 경건의 훈련을 통해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진 ‘오베르랑’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 산에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회복해 보니 어느 낯선 집 방안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계곡에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름은 무엇이며 여기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그 집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이름과 주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나오지만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인정은 그만두고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합니다. 그런데 강도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을 살린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야 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선행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명 살리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 미국 기자출신의 필립 얀시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40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8천명을 인터뷰했더니 크게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이 되더랍니다. 하나는 스타형 인간들입니다. 스타형 인간들은 항상 앞에 나서서 자기를 들어내는 사람들로 유명(有名)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감추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조연역할을 잘 하는 사람들로 무명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일이 무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만큼이라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 대구에 내려가면 유명한 석조건물 예배당 서현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50여 년 전에 전라도 황등에서 7년 동안 돌을 실어다가 세운 그 당시 동양 최대의 석조 예배당이었습니다. 이 예배당은 사형선고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장로님 한 분이 단독으로 지어 바친 예배당이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던 어느 날 밤중에 이 장로님이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돈 300만원은 거액이었는데, 이 돈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 돈 가지고 돌아오는 주일 건축헌금 하세요. 결코 제 이름으로 하지 마시고 목사님 이름으로 하세요.”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음 주일 가난한 목사님이 300만원 건축헌금을 드리자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에 가난한 집사님들도 여기저기서 100만원씩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집사님들을 초청해 어려운 가운데 100만원씩 거액을 헌금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 헌금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단독으로 교회를 지어 바쳤다는 말을 역사에 남기지 않으려고 우리들을 밤중에 찾아와 돈을 주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정말 향기 나는 장로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섬기는 충성스런 장로님이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 장로님이십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자신이 받은 많은 은혜는 모르고 자신이 행한 지극히 작은 선행이 있기만 하면 굉장한 것처럼 과시할 때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 귀한 그릇이 되어 언제나 자기의 가치를 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보배를 담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더욱 귀한 그릇으로 들어 쓰실 것입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위대한 사도요 또 갖가지 신비한 체험과 능력을 소유한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도 했고 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히 자기의 가치를 부인하고 조금도 자기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 하며 영광을 돌린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과시는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되며, 넘어짐의 선봉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자기의 가치와 인격의 광채를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생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던지, 누구에게 선을 행하던지, 자기를 부인하고 언제나 ‘나는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이요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의식 속에 살면서 혹시 칭찬을 받던지 영광을 받게 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돌리는 귀한 신앙생활의 자세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16:18 / 교만은 파멸의 앞잡이이고 거만한 마음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잠 11:2 / 우쭐대며 행동하면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긴다. 슬기로운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사람이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어떤 훌륭한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욕을 듣게 되고 멸시와 수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것 같아도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 임택진 목사님의 ‘멀고도 어려운 길’이라는 수상집에서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어떤 교양있는 신사 한 분이 젊은 목사님 댁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은 안 계시고 젊은 사모님이 전화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사는 사모님에게 부탁을 하면서 “혹시 전화 받으시는 분이 목사님 부인이시면 이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대뜸 앙칼진 음성으로 “예? 목사님 부인이냐고요? 부인이 뭐예요? 말씀을 좀 바로 하세요!”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부인이라고 했다고 불쾌해 합입니다. 이 신사는 계속해서 “여보세요! 목사님 부인을 부인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하고 되물으니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그것도 모르세요?”하는 말에 이 신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은 ‘부인’이라는 말이 아주 낮춤말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혹 그 이하의 어떤 낮춤말로 ‘당신이 목사 여편네요?’ 하더라도 ‘예! 제가 목사 여편네입니다.’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 20세기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슈바이쳐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파리에 내려서 시상식 장소인 덴마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 때 슈바이쳐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같은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슈바이처는 특등실에 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식 박사 학위가 3개이고, 명예 박사학위가 20개이고,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의 칭호를 받은 귀족입니다. 또 노벨 평화상의 막대한 상금도 받을 분이었습니다. 당연히 특등실에 타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1등석을 뒤져도 없습니다. 2등석에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등칸에 갔습니다. 거기 슈바이처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얽혀서 그들을 진맥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십니까?.” “저는 제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한 곳을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앞으로 생활 자세는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거나 과시하지 마시고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도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l편 1절에도 보면 “얼마나 복되랴!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이 남 짓누를 궁리나 하고 있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는 이는. 얼마나 복되랴!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따라 살지 아니하는 이는. 얼마나 복되랴! 남 우습게나 여기고 제 잘난 체만 하는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이는.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읽으며 늘 명상하는 이는. 이런 이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리라.”고 했습니다.
7. 언제까지 배우라는 말입니까?
● 욥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하나님께로부터 깨우침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까지 받읍시다.
욥 1:1 /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9절)
욥은 자타가 인정하는 그리고 하나님까지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경건한 신앙인이요, 흠잡을 데 없는 다복했던 큰 부자였습니다. 7남 3녀를 가진 아버지요, 당시 목축업으로서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동안에 전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자녀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마저 문둥병 같은 병을 얻어 마을 입구 한적한 곳에 나가서, 머리끝부터 다리까지 악창이 나서 진물이 흘러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잿더미위에 앉아있는 비참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고난을 통하여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욥이 갑작스런 재앙을 만나고 흉측한 질병으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이 친구들 사이에서 퍼졌습니다. 욥은 외로웠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친구들의 충고에 욥은 “자기는 무죄하다.”고 변명을 합니다. 친구들은 상처난 곳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욥의 상처를 깊고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일로 나와 다투시는 지를 좀 알게 해 주세요. 주님이 손수 만들었던 이 몸은 학대하시면서도, 악인들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고 형통하기만 하니 그런 것이 주님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욥은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욥을 비판하고 죄를 회개하라고만 합니다. 자기들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몰아붙입니다.
마침내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욥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만물에 대해서 욥에게 70개가 넘는 질문을 던졌으나 욥은 그 질문에 하나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별자리에서 진흙에까지, 그리고 금수에서 새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욥에게 이러한 많은 질문을 던지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물에 대해 세밀한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에 대해서 이렇게 세밀한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찌 인생에 대해서도 관심과 선한 계획을 가지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마 6:26, 30 /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욥 38:1-40:2 / 욥 40:6-41:34)으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끝날 때마다 욥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데, 첫 부분에서는 욥의 겸손한 응답이 나오고(욥 40:3-5),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욥의 회개의 응답이 나옵니다(욥 42:1-6).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질문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지(가볍고 아무 것도 아님)를 처절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지한 말을 많이 했는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무지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자기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무지한 말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 것을 회개하며 다시는 말을 더하거나 대답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① 욥이 고난을 통해서 어렵게 얻은 해답은 2절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마침내 2절에서,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 교훈입니다.
욥은 지금 만난 힘든 연단을 바꿔줄 수 있는 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 당신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많은 고생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요, 폭풍우와 재난도 다스리시고, 사자, 악어, 하마 같은 거대한 짐승들도 먹이시고 기르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을 합니다. 은하계의 별들이 인류 전체의 숫자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방대한 은하계들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태양계를 바라보면서, 지구가 태양에 조그만 더 가까이 있으면 모든 생물을 다 타 죽어버릴 것이고,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지구는 얼음덩어리가 되어서 아무런 생물들이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지구가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하면서 낮과 밤, 사시사철을 정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과연 있겠습니까?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보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들까지 돌보시되 심지어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②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욥(3절)
우리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인가? 욥은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고통을 당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불평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치를 가린다’라는 말은 ‘이치를 어둡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대해 쉽게 무시해 버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무지함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가려 버리는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지(無知)한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연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놀라워서 욥은 스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욥기 38장에서 41장까지에 걸쳐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고난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를 놀랍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이제 드디어 욥은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욥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보니까,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졌습니다. 묻고 싶은 것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니, 물으려고 했던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았습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의 계획은 확실합니다.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은 사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중의 한 부분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요 정금같이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욥 42:5 /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욥은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풍문으로만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귀동냥으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압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나 정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1:1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이 발견한 것처럼, “하나님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학문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연구해서 이해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서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욥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우리들도 욥처럼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경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③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죄 사함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권한까지 받았습니다. 욥의 3친구들은 욥이 당한 시험에 대하여 본의 아니게 핍박을 하였고, 그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하여 욥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모두 용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욥 42:7-9 /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뒤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너희는 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내 종 욥은 얼마나 솔직하게 말하더냐? 8) 그러니 이제 너희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욥에게 가서 너희들을 위하여 번제를 올려라. 그래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이는 너희에게 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너희는 내 종 욥처럼 나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9) … 여호와께서는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욥은 이전보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중보기도를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계속 중보기도할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말입니다.
중보기도의 위력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모세의 중보기도에 달려있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모세가 손을 드는 것을 보고 힘을 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들에게 힘을 부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함께 돕는 자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날 모세가 혼자 산꼭대기로 올라갔다면 아마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아론과 훌이 동행했습니다. 아론은 그의 형이고 훌은 누나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다 나이가 많습니다. 모세도 인간인지라 지칠 수 있었습니다. 계속 팔을 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옆에 있던 두 사람이 모세를 돌 위에 앉히고 옆에서 모세의 팔을 받쳐주게 됩니다. 팀을 이룬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기도하면 지치기 쉽고, 금방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팀이 있으면 힘이 납니다. 서로 도와주고 서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쳐서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다고 할 때 서로의 팔을 붙잡아 기도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돕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팀으로 기도하는 것은 굉장한 힘을 가집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전투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함께 기도했던 아론과 훌과 같은 기도의 용사들도 필요합니다. 전쟁보다 더 피곤하기 쉬운 것은 기도의 팔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지쳤다. 피곤하여 넘어졌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의 힘을 모세의 기도하는 힘에 달렸기 때문에 모세가 기도하는 한 여호수아는 피곤을 모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골짜기로 내려가서 전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의 팀웍, 기도의 용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기도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복됩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고 발휘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감옥에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건져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실제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큰 상, 자손의 복, 장수의 복도 주셨습니다.
욥 42:10-17 / [다시 복을 내리시다] 욥이 세 친구들을 위하여 빌자, 여호와께서 그동안 욥이 말도 못하게 고생한 것을 돌아보시고 그가 전에 갖고 있던 재산보다 2배나 더 주셨다. 11) 그러자 욥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그동안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어려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또한 욥을 위로하느라 각각 금조각과 금고리를 그에게 선물하였다. 12) 여호와께서는 욥이 여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가 어려움을 당하기 전보다 더 많은 복을 내려 주셨다. 그래서 그의 재산은 양이 1만 4천 마리, 약대가 1천 마리, 소가 1천 쌍, 나귀가 1천 마리나 되었다. 13) 또한 딸을 셋, 아들을 일곱이나 주셨다. 14) 욥은 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첫째 딸은 ‘비둘기’라는 뜻으로 여미마, 둘째 딸은 ‘계피’라는 뜻으로 긋시아, 셋째 딸은 ‘눈화장품 넣어 두는 작은 상자’라는 뜻으로 게렌합북이라고 지었다. 15) 온 땅에서 욥의 딸들만큼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없었다. 욥은 그 딸들에게도 오라비들과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16) 그 뒤 욥은 140년을 더 살면서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보며 17) 천수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떴다.
만일 욥이 중도하차하였다면 과연 이러한 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 상은 경주를 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약 5:11 / 그들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주께 진실했으므로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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