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묵호성당( 라 파트리치오 신부)
패트릭 라일리 신부 순교터 · 춘천교구 묵호성당
“목자는 양떼를 두고 떠날 수 없어”… 그날의 외침 들리는 듯
“양떼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느냐.”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자들은 당시 춘천교구 묵호본당 주임이었던 라일리 신부에게 함께 피난 가기를 요청했다. 신자들은 공산군이 묵호 인근에 올 무렵까지도 배를 마련하면서까지 피난을 권유했지만, 라일리 신부 답변은 요지부동이었다. 라일리 신부에게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한이 있더라도 목자가 있을 곳은 양떼 곁일 뿐이었다.
당시 전교회장이었던 남봉길(프란치스코) 회장이 거듭 피난을 청했지만, “피난 안 간 교우들도 많고 회장님도 안 가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나는 성당에서 죽어도 괜찮으니, 나 때문에 못 가지 말고 얼른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라”며 오히려 남 회장을 걱정했다. 라일리 신부는 남 회장의 끈질긴 권유로 마지못해 일본식 가옥에 마련했던 성당을 떠나 만우리에 있는 남 회장의 집에 머무르며 미사를 집전했다.
남 회장의 노력으로 강릉이 공산군에게 점령된 이후에도 라일리 신부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군은 라일리 신부가 묵호에 있었음을 알고 수색망을 좁혀 왔다. 남 회장은 공산군이 마을을 수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라일리 신부에게 다락방에 숨어 있기를 청했지만, 라일리 신부는 “자신이 붙잡히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날 라일리 신부는 공산군에 붙잡혔다.
착한 목자를 기리는 성당
라일리 신부의 순교터에서 남쪽으로 15㎞가량 이동해 라일리 신부가 죽기 전까지 사목했던 묵호본당을 찾았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하얀 기둥에 하늘빛깔을 띤 외벽이 인상적인 고딕성당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성당 모습에 순례를 위해 성당을 방문하는 이뿐 아니라 비신자들까지도 찾곤 하는 곳이다.
이 성당은 라일리 신부 생전에는 없던 곳이다. 그러나 라일리 신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당이자, 무엇보다도 라일리 신부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곁을 지켰던 묵호본당 공동체의 성당이라는 점에서 라일리 신부를 기억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장소다.
사실 라일리 신부가 순교한 이후 묵호본당은 목자 없는 공동체로 남겨졌다. 전쟁 이후 사제 부족으로 사제파견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호본당은 라일리 신부를 기억하기 위해 다시 본당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춘천교구장 구인란(Thomas F. Quinlan) 주교는 한국전쟁으로 순교한 사제들을 기억하는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1957년 라일리 신부를 기념하기 위해 묵호성당을 신축하고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묵호성당 옆에 펼쳐진 마당 한 가운데에 ‘라 바드리치오 순교비’라고 적힌 순교비가 서 있었다. 푸른 잔디 위에 서서 라일리 신부의 생애가 담긴 순교비 아래에 적힌 성경 글귀를 나도 모르게 되뇌고 있었다. 그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라일리 신부의 생애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가톨릭신문, 2020년 9월 13일,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