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딜러-요리사-미용사, 욕망과 거래의 삼각관계 신동일이란 감독 이름은 들어봤으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몇 안 되는 작품 중 어느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이 영화를 본 건 온전히 박희순 때문이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박희순을 이야기하면 개그맨 박휘순부터 떠올리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거의 처음 주연을 맡은 이 영화를 안 보고 넘어갈 수 없었던 거지. 보고 쌔끈한 느낌이 들면, 주위 사람들에게 강추해야지, 스스로 박희순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불쾌함과 난해함, 지루함을 숨기지 않았고, 나 역시 여기저기 이 영화를 떠벌리고 다니며 홍보대사 역할을 하기엔 무리가 있겠다 싶었다. 친구처럼 불쾌하다거나 난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바로 남았던 감상은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의 욕망을 극단에 배치하면 이런 비극이 나올 수 있겠다는 설득력은 있는데, 너무 단순한 거 아닌가?" 하는 헛헛함이었다. 물론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 세 배우들의 연기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고, 마음에 들었다. 특히 박희순은 작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일면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무릎 튀어나온 츄리닝 바람으로 담배 사러 나오다 마주치는 옆집 아저씨, 혹은 길 가다 종종 마주치는 동네 자장면집 주방장 아저씨 느낌이 났다. 배우같지 않았다. 지금껏 봐왔던 박희순과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영화를 본 지 어느새 닷새가 지났다. 앉아서 끄적거릴 시간도 별로 없었고, 밋밋한 첫 느낌만으로 글을 쓰기도 뭣해서 계속 미뤄두었다. 헌데 문득 문득 이 영화가 떠올라서 머릿속에 자꾸만 맴도는 거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만 보였던 세 사람의 욕망의 구도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하는 거다.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대사들이 불쑥 내게 말을 걸어 오는 거다. 극장에서 나온 지 114시간이 지난 지금, 너무 단순해서 밋밋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던 114시간 전의 나는 온데간데 없고 내 머릿속은 온통 이 영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거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새롭게 해석되는 다양한 의미들이 퐁퐁 샘솟는 거다. 이거 정말 흥미진진한 영화인 걸! STEP 1. 영화를 본 직후엔 사회적 성취와 경제적 성공을 이룬 외환딜러 예준과 신분상승을 꿈꾸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요리사 재문의 욕망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겉포장은 절친 사이의 우정이었다. 아내와 섹스를 하다가도 예준의 전화를 받고 그가 부르니 바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예준에게 향하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 이해 못할 깊이의 우정이었다. 그러나 재문의 아내 지숙이 잠시 외국에 나간 사이 벌어진 우발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고는 우정이라는 겉포장을 벗기고 서로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준은 재문을 통해 재문은 예준을 통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구했을 뿐이고, 자신에게 없지만 상대에게는 있는 그것들을 서로 교환했을 뿐이고, 그것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을 뿐이다. 극단적 상황에 상황에 몰리자 예준은 "너그들이 누구 때문에 사는데"라고, 재문은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신들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내놓았던 교환물(!)의 가치를 따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교환가치로 값이 매겨지는, 우리시대 인간관계에 대한 냉혹한 해부도다. STEP 2. 영화 곳곳에 숱한 은유들이 떠다닌다. 아니, 은유라고 하기엔 너무나 노골적이다. (아마도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너무 단순한 것 아닌가, 헛헛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준과 재문의 우정이 시작된 군대에서 그들이 계급장 떼고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매개는 운동권 필독서이자 혁명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유물철학의 기초, "철학에세이"다. 예준은 그렇게 무지랭이 노동계급 재문에게 평등을 가르쳤고, 너무 어렵고 지루한 책이었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문은 자기 책장에 "철학에세이"를 고이 모셔두었다. 예준과 재문은 철학으로 사상으로 묶인 동지라 할 수 있는가? 아니, 아니다. 그렇게 평등을 외치던 예준은 자본가 계급이 되었다. 그것도 자본주의의 최첨단 외환딜러다. 평등의 기초는 인간의 노동일진대, 예준이 서 있는 위치는 노동을 철저히 배제한, 한마디로 돈으로 돈을 버는 무자비한 자본증식의 세계다. 딜러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외환딜러라는 명예는 무한경쟁에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비정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그런 예준에게 평등이라니, 가당치 않다! 그럼, 재문은? 그가 "철학 에세이"를 고이 모셔둔 것은 그 안에 담긴 "평등"에 매료됐기 때문이 아니다. 군대에서 계급장 떼고 친구하자던 지식인 예준이 부러웠고, 닮고 싶었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이 된 예준과 다시 만났을 때 예준이 재문에게 내민 "영어"는 군대시절 "철학에세이"와 동급이다. 예준처럼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그 무엇! 그것은 영화 곳곳에서 나오는 대사 "미국 가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워너비 자본가, 워너비 지식인, 워너비 미국이 "평등"과 "우정"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출몰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계급의 자본가계급에 대한 욕망을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낸 자기고백이다. STEP 3. 재문은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만드는 요리사다. 예준은 자본주의에서나 의미 있는, 인간의 노동을 떠난 이윤창출의 현장 외환딜러다. 재문의 아내 지숙은 외형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시도하는 미용사다. 가장 본능에 충실한, 그래서 가장 솔직한 노동이라 할 수 있는 요리사와 가장 관념적이며 어찌 보면 하등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 영역의 외환딜러가 너무나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다. 아니, 관계라기보다는 앞서 말했듯 거래를 한다. 요리사로부터 먹을거리와 정서적 안정감, 인간적 유대라는,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욕구를 채운 외환딜러는, 대신 요리사에게 자본주의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돈을 댄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마치 소품처럼, 혹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예준을 욕망하는 노동자계급 아내 역할에 머무를 줄 알았던, 재문의 아내 지숙은 이들의 머리카락를 "자른다". 과연 미용사는 요리사와 외환딜러의 거래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객관의 위치에 설 수 있는가? 싹둑싹둑...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검은 화면 너머로 들리는 지숙의 가위소리는 과연 예준과 재문의 우정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치졸한 거래도 잘라낼 수 있을까? 글쎄... 미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보이는 모습, 외관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STEP 4, STEP 5, STEP 6... to be continued...?? 영화를 본 지 114시간이 흐른 지금보다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영화를 본 직후의 감흥이 점차 소멸되며 잊혀지는데,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재미에 재미를 더하면서 잊혀지는 독특한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화읽기의 새로운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