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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굴렁쇠여수 원문보기 글쓴이: 임경화(4기)
<여순사건 유적지를 돌아보며>
-여순사건 역사기행의 시작은 동 14연대 주둔지 앞에서-
고3 아이들의 입시로 전국이 들썩이던 지난 12일(목), 어린이도서연구회 여수지회 회원 11명과 박지연씨 아들 태백이가 함께 여순사건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우리 회원 중에도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서 아이들을 시험장에 보낸 고3 학부모가 있어서 그 집의 아침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를 안내해 주실 강사님이 오셔서 반갑게 첫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를 안내해 주실 분은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님이다. 20여년을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한 길로 매진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화양면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역사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여수의 설화, 민담 등을 수집하고 공부하다가 여순사건에 대해 파고 들게 되셨다고 한다. 십여년 전에 여수지역사회연구소(줄여서 여사연이라고 한다.)에서 여순 주간에 벌이는 여순사건 역사기행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지금도 한결 같이 여순사건의 재조명,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뵐 수 있어서 무척 존경스러웠다.
오늘 날씨가 무척 좋다고 말씀을 드리니 여순사건 관련한 역사기행을 십 수 년 해봤는데 날씨가 궂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면서 아마 영령들이 도와주시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 말이 하도 의미 깊게 들려서 그냥 수사론적으로 하시는 말씀 아니냐고 여쭈니 진짜로 그런 느낌을 받았고 그런 체험을 했다고 하신다. 선생님이 어린 시절 무척 겁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여순사건 일을 하면서 여천 호명마을 암매장지나 학살지 등을 어두운 밤에 혼자 간 적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 가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고. 영령들이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이런 이야기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를 안내해 주신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님-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신월동의 14연대 주둔지이다. 바다 쪽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해군들이 수상비행기 활주로로 썼던 곳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한화공장 안에 시멘트 굴뚝이 보였다. 공장 안에는 당시의 14연대 터를 보여주는 유물(공장 입구의 탄약고, 동굴형태의 저장소 등)이 몇 있지만 밖에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 이 시멘트 굴뚝이었다.
신월동 14연대 주둔지가 바로 1948년 10월 19일 밤 9시에 일어난 여순사건의 첫 시발지이다. 여순사건의 공식 명칭은 현재 ‘여순 10.19사건’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여수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말이 이제는 ‘여순 10.19사건’이란 말로 바뀌어가고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부끄러웠다. 말로만 나를 길러준 이 산천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상념에 젖기도 한다.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14연대 출동 명령이 내려지자 그 명령에 부당함을 느낀 좌익 계열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하사관들이 주도하여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반란군들은 국동 지서, 서정 지서를 접수한 후 여수경찰서를 점거하여 치안권과 행정권을 접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공무원 3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20일 아침 반란군들은 통학 기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갔고 300여명의 경찰들이 몰살당했다. 14연대의 반란이 일어나자 전군이 여순 반란 진압 편제로 운영되어 구례, 광양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3일째 되는 날 반란군과 군과의 교전이 있었고 24일날은 반란군이 진압되고 26일날 반란군 세력이 완전 소탕되었다. 이후 14연대의 반란 사건은 일주일만에 평정되었지만 여수 지역민들에게는 이제부터가 비극의 서막이었다. 반란이 진압되자 군 당국은 여수 지역민들을 서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남초등학교에 모이게 해서 (집에서 안나오는 사람들은 가담자로 분류한다는 협박을 한다.) 20일날 남로당 주최의 군중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손가락총’이 등장한다. 사람들을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군가한테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가담자로 따로 분류했다. 무자비한 색출 작업이 진행되는데 어이없는 이유로 가담자들이 분류되었다. 당시 여수천일고무에서 만든 군인용 운동화인 지까다비를 신은 사람, 군용 팬티, 군용 신발을 신은 사람, 머리가 짧은 사람들은 무조건 가담자로 분류되어 주요 인사는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 진압작전을 총지휘한 김종원은 일제강점기때 일본남양군도 중사 출신으로 진압작전이 아주 광란적이었다. 그는 이후 양민학살의 지휘관으로 활약하여 국가에서 주는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백두산 호랑이는 속인이 범접하기 힘든 영험함을 가진 존재에게 주는 명예가 아닌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우리의 근. 현대사이다. 그는 여순사건의 적극 가담자로 분류한 사람들을 다시 중앙초등학교로 집결시켰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1만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방 공간, 6. 25전쟁까지 양민학살 사건이 많았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학살 사건이 우리 지역에서 벌어졌다니...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고 국민들에게 반공의 이데올로기를 심어놓기 위해 여순사건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의혹이 충분히 드는 대목이다.
-여사연에서 펴낸 여순사건 자료집에 가담자 색출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중앙초등학교>
서초등학교, 남초등학교 등지에서 가담자로 색출되었던 여순사건 적극 가담자 1500여명이 사건 직후부터 12월까지 수용되었던 비극의 현장 중앙초등학교이다. (당시에는 종산국민학교로 불렸고 현재의 이름은 여순사건후인 1951년 9월 1일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
이곳에 수용된 적극 가담자들은 재판과정도 없이 즉시 총살되거나 학살되어 암매장되었고 그중 125명은 만성리 마래터널까지 끌려가서 희생되었다. 지금은 체육관이 자리한 이 장소에 당시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시신을 우물 속으로 매장하기도 했고 학교 본관 건물 왼쪽에 시신을 매장 했는데 2001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유골 발굴 사업을 했다고 한다. 발굴했을 때 시신은 못찾았으나 불탄 흔적이나 신발 매장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아마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매장된 것 같다고 하신다.
-당시 우물이 있던 자리-
-파란 설치물 주변이 당시 시신이 불태워졌던 흔적이 발견된 곳-
이 곳에 수감된 이들은 이후 대전교도소로 이감되는데 이들 중 1300여명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몰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수감된 사람 중에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도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공포가 지역을 휘감았는지 얼마나 공동체가 갈라지게 되었는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살아남은 이들과 가족, 후손들은 평생을 반란세력이라는 손가락질과 연좌제 등으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만성리 형제묘>
-형제묘 오르는 길-
만성리 마래터널을 지나 왼편에 오동도, 남해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형제묘가 있다. 형제묘는 중앙초등학교에서 극렬 가담자로 분류되었던 125명이 이곳까지 묶여와서 한곳에서 학살 당하고 한꺼번에 묻힌 곳이다. ‘형제묘’라는 이름은 제주 4.3의 ‘백조일손지묘’의 의미처럼 억울한 넋들이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붙인 이름이라고 알려졌었는데 최근에 다시 밝혀진 바로는 남해의 한 형제가 매년 10월이면 이 산소에 와서 성묘한다고 해서 형제묘로 불린다고 한다는 설명을 해주신다. 여순사건 재조명 사업이전에는 주변이 모두 잡풀 더미로 덮여있어서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고 하니 이만큼 형제묘 주변을 단장하고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오신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노고에 감사를 느낄 뿐이다. 비석이 세워진 날 영령들의 억울한 넋들이 잠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125명의 억울한 넋들이 함께 모셔진 형제묘-
형제묘의 비석은 여느 비석과 다르다. 이미 만들어진 비석에다 양옆과 뒤에 다시 비석판이 덧씌워져있다는 것이다. 비석에 형제묘의 사연을 적어놓은 글이 있었는데 이해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로 그 글을 얇은 비석판으로 덧씌워놓은 것이다. 여순사건의 유족들은 아직도 이념 갈등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령들에게 올린 술잔 하나 미처 준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급하게 음료수를 따라 올려드리고 묵념을 했다.
-양 옆과 뒷면이 덧씌워져 있는 형제묘-
-형제묘 내려 가는 길-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앞면-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뒷면-
형제묘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겨울이면 멀리 오동도 동백꽃을 볼 수 있겠고 평화로운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사건 당시에는 이곳이 바다와 연결되었던 거대한 협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학살과 매장이 벌어졌다고 하니 오동도 붉은 동백에서 핏빛 울음소리를 듣는 시인들의 시구가 그 연원이 깊었구나 하는 상념이 들었다. 2009년 여사연에서 이곳에다 위령비를 세우면서 형제묘의 비문과 관련한 갈등을 겪었던 경험이 있어서 위령비 뒷면에 이런 글만 새겨 넣았다고 한다. “……”이라고. 할 말 없음표, 점 여섯 개.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아 다 못하겠어서 누구든 알아서 생각하라는 점 여섯 개.
이곳에서도 우리는 비극적인 역사와 마주해야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애기섬에 얽힌 이야기다.
-유조선 왼편에 흐릿하게 보이는 바다섬-
이 섬은 오른쪽 큰 섬은 엄마섬이고, 왼편의 작은 섬은 애기 섬이다. 4.3사건, 여순사건이 지난 후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시켰는데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만든 조직이다.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검속, 집단총살을 자행했는데 여수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화정면, 남면 등지에서 총살했다. 애기섬에서는 약 120여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고 한다.
애기들과 함께 ‘국내 유일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타는 레일 바이크’를 타기 위해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곳 만성리. 이 일대에서 67년전 이렇게 처참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시월의 여수는 이렇게 기억해야 할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땅이었다.
-구례 상이 마을의 특이한 가옥 구조를 그림으로 설명해주신다-
선생님은 여순사건 유적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구례 산동 마을을 꼭 가보라고 하신다. 그곳에는 좀더 처연한 슬픔이 서려있다고... 여수에서 시작된 사건은 순천, 구례, 광양 등지로 번졌는데 특히 구례 산동에서 더 처절한 사건들이 펼쳐졌다. 진압군들은 구례의 산간 마을이 반란군 세력들의 거점지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마을을 불태웠다.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진압이 끝난 후 다시 마을로 들어와 급하게 살집을 마련했는데 방하나 부엌 하나의 작은 가옥을 지어서 살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고 가족이 늘어나자 집이 좁아져서 마주보는 곳에 또 다른 작은 가옥을 하나 지었다고 한다. 그것이 구례의 상이 마을의 특이한 가옥 구조를 만들었고 지금은 구례 중이 마을에 세 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지금은 산수유로 관광지가 된 구례의 산간 마을들에도 이런 처연한 역사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여수의 붉은 동백, 구례의 노오란 산수유꽃은 그냥 꽃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이름, 죽음과 침묵의 고통, 눈 멀고 귀 먼 가슴앓이를 간직한 꽃이었다.
-여순사건 역사기행을 마치며-
-태백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야무진 브이자 손가락-
여순사건 역사유적지 기행을 마치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사람이니만큼 여순사건의 진실에 눈 감지 말라고, 지난 20여년 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을 하면서 자유. 평등의 이념 논쟁으로 매몰되면서 많이 오해와 탄압을 받았다고. 이제는 평화와 상생, 인권의 문제로 여순사건을 풀어가야 하며 그런 관점에서 어린이들에게 여순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당부하신다. 숭고한 인간의 권리, 그것을 억압당했던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여순사건을 기억해 달라고 하신다.
약 두 시간의 걸친 여순사건 유적지 기행을 통해 선생님과 같은 차를 타고 간 덕분에 우리 지역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여수의 진보운동의 뿌리는 매우 깊었고 강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깊은 대목이다. 말로는 나를 길러준 내 고향과 이 산천을 사랑하다고 했으나 한편으론 타지역에 비해 진보운동의 바탕이 없다고 부끄럽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여수에는 인물이 없다.”는 말이 여순사건 이후 자조적으로 여수 사람들 입에서 나왔는데 그런 말을 비판하거나 그런 말에 가슴 아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바탕 실컷 울고 난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힘과 지혜를 모아봤으면 좋겠다. 태백이의 웃는 얼굴과 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