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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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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도서관 스크랩 [제3회 천강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안경 / 김진영
커피향 추천 0 조회 146 15.01.21 15: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3회 천강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안경

 

/ 김진영(본명 김영옥)

 

 

꽃은 청록색 군락 속에서 제 존재를 알리듯이 또렷또렷했다. 밋밋한 것들 속에 붉은 것을 하나하나 박은 듯도 했다. 한순간 꽃잎이 아득히 멀어지더니 피를 뚝뚝 흘려놓은 것처럼 점점이 흩어졌다. 실제로 생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미란은 코를 벌름거렸다. 뜨겁게 익어가면서 내뿜는 풀냄새, 흙냄새 외에는 나지 않았다. 점묘법처럼 흩어져 있던 꽃잎이 또다시 한데 모여들더니 코를 칠 듯이 출렁거리며 다가왔다. 오교수와 함께 양귀비가루를 먹었을 때처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뻘건 대낮에 환각에 빠져들 것 같았다. 양산을 기울여 앞을 막았다. 양산 그림자가 눈과 코 주위를 덮었다. 대지 50만평이 넘는 양귀비 테마파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년쯤에 완전히 개방을 하면 꽃마차를 끌게 될 아직은 말라비틀어진 조랑말 두 마리만이 메밀밭 한쪽에서 먹이를 먹고 있을 뿐이다. 건너편 국도에도 땡볕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땡볕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꽃밭은 붉은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 짐승은 금방이라도 국도로 기어갈 것 같다.

 

새벽에 오교수의 집에서 나온 미란은 양귀비 밭으로 왔다. 밭에 들어가 오줌을 누었다. 오줌은 질금질금 나왔다. 오교수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온 성기는 찢긴 꽃잎처럼 너덜거렸다. 벌겋게 해졌는지 오줌이 닿자 쓰렸다. 가방에서 잿빛 털로 뒤덮인 가죽을 꺼냈다. 멧돼지 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것이다. 잿빛에 갈색이 간혹 섞인 숭숭한 털, 검고 끝이 뾰족한 발톱이 두 개씩 박힌 커다란 발, 코털까지 박힌 길고 뭉뚝한 코를 가진 멧돼지는 미란의 몸만 빌린다면 아무나 들이박거나 물어뜯을 것처럼 여전히 야생미가 뚝뚝 흘렀다. 미란은 가죽을 뒤집어썼다. 뻥 뚫린 눈구멍에 눈을 맞추자 정수리 부분이 일어서면서 두 귀가 빳빳하게 섰다. 길고 뭉뚝한 코 부분은 빈 자루처럼 홀쭉했다. 팔과 다리를 끼우고, 몸을 맞추었다. 멧돼지는 콧구멍으로 흙을 툭툭 건드리며 걸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땅을 거칠게 파헤쳤다. 양귀비꽃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멧돼지는 앞발을 치켜들고 야아, 하고 포효했다. 건조하게 말라있는 듯한 살이 오교수의 손길이 닿으면 촉촉하게 되살아나 물기를 머금었다. 점점 집요해지던 오교수의 손길이 떠오르자 멧돼지는 뒷발로 막 뛰었다. 양귀비꽃들이 픽픽 쓰러졌다.

 

국도 위를 달리는 한 남자를 본 것은 그때였다. 사냥개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남자는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뒤에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아왔다. 야구모자가 팔을 뻗어 남자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뒤로 벌렁 자빠진 남자는 그 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다. 야구모자와 남자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남자의 머리통을 가격한 것은 아주 순식간이었다. 멧돼지는 눈을 껌벅거렸다. 가죽을 쓰면 진짜 멧돼지가 된 듯 사물이 나른하면서 뭉개진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었다. 환각을 돌로 깨듯 우락부락의 손에 들린 작은 손도끼를 보았다. 멧돼지는 양귀비 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구모자와 우락부락이 쓰러진 남자를 풀 더미 속으로 질질 끌고 갔다. 멧돼지는 눈을 꾹 감고 숨을 골랐다. 붉은색이 눈앞을 서서히 채웠다. 가득 찬 붉은색은 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남자는 농약병을 들이켰다. 농약병이 붉은색을 다 채우더니 그라목숀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읽혔다. 멧돼지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흰 승용차가 여시골 마의 고개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날카롭게 눈에 박혔다. 저렇게 사고가 일어나는구나. 오늘은 무슨 날이기에 두 번이나 놀라운 광경을 볼까. 여시골에서 누가 두 팔을 들고 힘껏 집어던진 것처럼 승용차는 서너 바퀴 굴렀고, 뒤집힌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며 국도로 떨어졌다. 며칠 전에도 SM5 승용차 한 대가 굴러 떨어진 사고다발지역이기는 했다.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순간 아까 가수 상태에서 본 붉은 얼굴에 이어 지방뉴스 시간에 본 군수 얼굴이 그린 듯 또렷하게 떠올랐다. 왜 이 순간 그 얼굴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활활 탈 것 같았으나 불은 앞 범퍼만 태우다 꺼졌다. 달려가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양귀비 밭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사이 앰뷸런스가 달려왔다. 주홍색 유니폼을 입은 두 사람이 승용차 속의 사람을 끄집어내어 앰뷸런스에 실었다.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레커차가 왔다. 승용차 앞 범퍼에 이빨을 박아 넣는 레커차는 죽은 짐승을 덥석 무는 하이에나였다. 양귀비 밭은 비뚤비뚤한 발자국에, 대궁들은 마구 휘어졌고, 꽃은 찢겨 너덜거렸다. 밭둑으로 나온 멧돼지는 도로 들어가 대궁을 일으켜 세웠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청년이 양귀비 밭 사이로 난 농로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은 멧돼지를 보고도 앞으로만 걸어갔다.

 

새벽의 일을 털어버리려는 듯 미란은 양귀비 밭으로 들어갔다. 붉은 양귀비들이 미란을 에워쌌다. 미란은 양귀비꽃에 갇혔다. 흙냄새나 풀냄새는 났으나 꽃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때까지 별다른 향기를 못 맡았다는 걸 자각했다. 꽃잎에 코를 바짝 대었다. 향기는 밋밋했다. 꽃잎이 크면 향기가 없다고 했던가. 꽃잎은 지름이 십 센티쯤이었다. 갑자기 네 장의 꽃잎들이 서로 흑자색 꽃술을 숨기려고 발광했다. 움직임이 멈추자 꽃은 긴 대궁 끝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미란은 손으로 꽃을 만졌다. 네 장의 꽃잎을 짓이기듯이 차례로 만졌다. 얇은 꽃잎은 주름이 선명해지면서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었다. 거기서 조금 더 만지면 꽃잎은 완전히 시들어버린다. 길이가 일 미터 정도인 대궁 끝에는 고깔모자처럼 생긴 푸릇한 열매가 달려있다. 열매가 덜 익었을 때 칼집을 내면 흰 유즙이 방울방울 맺히면서 굳어진다. 관상용으로 심은 양귀비 열매는 생아편 부분을 빼버리고 심으니까 유즙이 없다. 오교수의 집 뒤뜰 독일가문비나무 아래에는 흰 양귀비꽃이 자랐다. 스무 그루 이상 심으면 단속에 걸린다고 했으나 서른 그루가 넘었다. 오교수는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릴 때면 가루를 먹었다. 오교수는 미란에게 칼을 쥐어주며 열매에 칼집을 내라고 했다. 깊이 찌르면 유즙이 안으로 스며들어 나오지 않으니까 살짝 스치듯 찔러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유즙이 딱딱하게 굳으면 절구통에 빻아 가루로 만든다. 배가 아플 때나 두통이 있을 때나 몸살기가 있을 때 먹으면 효과가 좋지만 많이 먹으면 효과가 뛰어날 거라고 믿었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청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농로 위를 걸어갔다. 도보행진 중이듯 절도 있는 걸음걸이였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양귀비 밭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양귀비꽃에 갇힌 여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미란과 청년은 농로 위에서 마주쳤으나 청년은 무작정 앞으로만 걸어갔다. 미란이 두 어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얼굴이 검붉게 익은 청년은 범선과 종려나무가 있는 바틱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온 청년은 복학을 하는 대신 새벽부터 저녁까지 걷기만 했고,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셔츠를 갈아입었다. 가게에서 셔츠를 외상으로 가져오면 청년의 어머니가 갚았다. 청년은 셔츠가 더러워지면 빨지 않고 불에 태워 없앴다. 군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궁금하지만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어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경운기가 종아리를 칠 듯이 바짝 다가와도 청년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앞으로만 걸어갔다.

 

양귀비 밭 사이로 군데군데 붉은 양파 자루들이 세워져 있다. 자신의 땅이 국유지로 들어가는 걸 반대한 농부들은 양귀비 밭 사이에서도 양파나 마늘이나 콩을 경작했다. 수건을 푹 눌러쓴 아주머니 몇이 양파를 거두고 있다. 어머니가 있을까봐 미란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도 일당 사 만원을 받고 양파 경작지에 나가 일했다. 양파를 캐는 것보다 알이 변변찮은 것들을 굵고 실한 것으로 삥 둘러싸면서 망에 집어넣는 게 힘들다고 했다. 만지기만 해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얇은 분홍 꽃밭 사이에는 양배추들이 자라고 있다. 밭둑에는 팻말이 꽂혀 있다.

 

땅 주인이 허락하지 않아 양귀비를 경작하지 못했습니다. 테마파크 개장 시기에 맞추어 꼭 경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널리 양해바랍니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오후에 집으로 오너라.”

오늘은 시를 읽어주는 날이 아니다. 미란이 우물쭈물하자 오교수가 말했다.

“어제 그 시집을 마저 끝내기로 하자. …박 군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구나.”
“네?”

“아까 정오 뉴스 시간에 나왔는데 무슨 고개에서 굴렀다고 하더구나. 아까운 친구가 죽었어.”

미란은 양산을 접었다. 가방에 집어넣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아이와 양귀비 밭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여자에게 정말 군수가 죽었냐고 물어보았다. 아장아장 걸으며 꽃대를 쓰러뜨리는 아이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물었을 뿐인데 알고 있어 속으로 놀랐다. 그러게 여시골에 길을 내달라는데 왜 반대하냐고! 그러니까 여시에게 잡혀 먹히지. 틀림없이 여시가 잡아갔을 거야. 어떤 여시오? 하고 미란은 물었다.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어떤 여시이긴 말 그대로 여시지. 여자는 양귀비꽃 속에서 찍는 사진이 정말 좋다고 너스레를 떨며 미란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그리고는 잠깐 기다리라며 아이를 안은 채 한손에는 활짝 편 양산을 들었다. 모네의 그림처럼 자신들 뒤로 양귀비꽃이 대각선으로 나오게 하고, 꽃은 점점이 흩뿌려진 것처럼 찍어달라며 폼을 잡던 여자는 끝마무리로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진사야, 뭐야. 미란은 셔터를 눌러주고 걸음을 옮겼다. 붉은 양귀비꽃들이 농로 위를 걷고 있는 청년의 하반신을 잘라먹었다.

 

미란은 국도변을 걸어 올라갔다. 건너편 기암괴석에는 망이 쳐져 있다. 망 윗부분은 찢겨 너덜거렸다. 한 구석에는 낙석주의와 야생동물주의라는 팻말도 꽂혀 있다. 기암괴석 위는 솔숲이고, 그 너머는 여시골이다. 여시골 지름길을 타면 국도를 이용할 때보다 이십분이 단축되었다. 길이 고불고불한데다 기암괴석이 받치고 있는 쪽은 곡선으로 확 휘어졌으나 이십 분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길을 넓히고 포장해 달라는 민원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군수가 반대했다. 여시골에는 유적지로 지정된 고인돌과 수령이 삼백 년이 넘는 침엽수림이 가득 차 있어 훼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군수는 사유지를 사들여 양귀비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도 반대했다. 농토에서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군수의 주장이었다. 군수는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드는 것도, 드라마나 역사극 세트장 짓는 것도 반대했다. 농민이 실속 있게 잘 살 수 있는 방법만 고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촌놈을 앉혀놓아 발전을 하지 못한다고 욕을 했으나 군수는 농민들에게 파프리카나 참다래나 자색고구마나 노란방울토마토를 수확하게 했으며 삼베를 다시 짜게 해 농가소득을 올려준 신지식인이었다. 미란은 땅바닥을 살폈다. 특별히 사고가 났던 흔적은 없었다. 순간 야구모자가 쓰러뜨린 사람과 여시골에서 굴러 떨어진 승용차의 주인이 동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일인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오교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미 했었다는 것도 알아챘다. 빠른 걸음으로 국도변을 올라갔다. 등 뒤에서 굉음이 울려 몸을 움츠렸다. 철근을 실은 대형 화물차가 몸을 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건너편으로 와서 살펴보았으나 핏방울은 없었다.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풀숲으로도 가보았다.

 

미란은 기암괴석 밑을 돌아 산 출구 쪽으로 올라갔다. 산을 거꾸로 올라가는 셈이다. 산자락을 따라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좁은 흙길이 나 있다. 흙길 오른편에는 상수리나무, 편백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들어차 있다. 사람이 거꾸로 처박힌 형상의 나무와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는 나무가 눈에 띄기도 했다. 콧날을 벌름거려 아카시아 향내를 맡았다. 뻐꾸기 우는 소리와 함께 미란을 약간 나른하게 했다. 산 중턱을 넘어서자 검은색 그랜저가 흙길을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얼굴로 달려드는 흙먼지를 털어내는 자신을 백미러로 지켜보는 눈이 느껴졌다. 등이 오싹했다. 곡선으로 휘어진 곳으로 가보았다. 소나무 두어 그루가 부러지고, 풀이 짓밟혀 있을 뿐이다. 새벽에 목격하지 않았다면 사고가 났다고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흙길을 건너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고인돌 뒤로는 진흙더미나 풀 더미 같은 무덤들이 웅크리고 있다. 고인돌은 위가 편편했고, 옆은 칼로 조각한 듯 똑발랐다. 오교수 집으로 갈 때 가끔 이 길을 이용했다. 고인돌 위에 올라앉으면 거북이 등껍질 속에 들어앉은 듯 기분이 좋았고, 오교수 집에 가기 싫은 마음도 서서히 옅어져갔다. 미란은 아나운서가 되려고 했다. 낙방을 하자 실력을 더 쌓으려고 타지로 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아카데미 학원에도 다녔다. 오교수 말대로 하얗고 깨끗하고 투실한 달항아리 같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세 번이나 낙방을 한 것은 지방대학 출신에다 각 지고 튀어나온 광대뼈에다 폐쇄적인 분위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인돌 위에 올라앉자 이것만은 새벽의 일을 다 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 어떻게 된 일이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전부 맞는 거지? 왜 나한테 물어. 난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넌 뭘 봤는데? 너도 봤잖아. 그러니까 돌 너도 보긴 봤구나, 네가 본 걸 말해보라니까! 미란은 화를 내며 고인돌과 말다툼을 했다. 산 입구에는 야생동물 포획금지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팻말을 뽑아 멀리 던져버렸다.

 

미란이 서재로 들어서자 황병기의 침향무를 듣고 있던 오교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검은 안경에 잔양이 반사되어 미란의 눈을 찔렀다. 한 걸음 비켜서자 검은 안경은 미란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쳐주었다. 검은 안경으로 미란을 가둔 오교수는 녹음기 버튼을 누르며 시작하자고 했다. 미란은 멧돼지 가죽이 든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 낭송했다. 아침에 밀쳐버린 밥상이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갔을 때도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역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또 밀쳐버리고 마루기둥에 기대 소리 내어 읽고 읽은 이수익 시집이었다. 오교수는 만년필로 빠르게 글을 적어나갔다. 오교수의 검은 안경 속에 간간이 책을 펼쳐 들고 서 있는 미란이 들어 있었다. 서재 왼쪽 창가로는 독일가문비나무가 보였다. 뒤뜰과 독일가문비나무 우듬지는 그늘에 갇혔고, 붉은 잔양이 흰 양귀비꽃을 붉은 양귀비꽃으로 만들었다. 뒤뜰 건너편 안방 창도 불이 붙은 듯 탔다. 낭송을 끝낸 미란은 말했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에 국도에서 남자 둘이서 손도끼 같은 걸로 군수 머리를 내리치는 걸 봤어요.”

말하는 순간에도 그가 박 군수인지 확신은 서지 않았다. 검은 안경이 오교수의 표정을 감추고 있었으나 별 동요가 없는 듯했다.

“어디서 그걸 봤단 말이냐?”
"양귀비 테마파크에서요.”

“그쪽은 널 못 봤니?”

“못 봤을 거예요. 봐도 짐승 한 마리 봤겠죠.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겠어요.”

“네가 먼저 그 일을 할 필요는 없어. 그게 맞는다면 너만 본 것이 아닐 거다. 기다려 보자.”

오교수는 손바닥으로 미란의 어깨를 만졌다. 유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어깨의 상처, 그 오래 아물지 못하는 흉터를 맹인에게 만지게 하고 싶다*는 시를 떠올리며 미란은 오교수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선배가 준 약도를 보며 오선학 교수 방을 찾아낸 미란은 심호흡을 하며 노크를 했다. 볼이 사과처럼 빨간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가죽의자를 돌려 앉은 채 창 쪽을 향해 있던 오교수가 대뜸 말했다. 외워보시오. 미란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알고 있는 시를 한 번 외워보시오. 오교수는 조금 더 친절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오교수의 말을 알아들었으나 당황한 머릿속에는 시가 들어있지 않았다. 노란 스웨터를 입은 여자아이는 오교수의 목소리가 든 녹음기를 틀어놓고 노트북 자판기를 두들겼다. 오교수가 중도실명을 해도 계속 교단에 설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름 없는 지방대학을 살리고 있어서라고 하던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오교수가 가죽의자를 핑그르르 돌려 미란을 바라보았다. 검은 안경을 쓴 오교수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데 미란은 오교수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면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날 것 같은 맑은 물 같은 얼굴, 그래서 무서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미란은 삼년 째 놀고 있었다. 어머니는 대학만 나오면 좋은 곳에 취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등록금을 낼 때마다 이제 다섯 번만 더 내면, 이제 두 번만 더 내면 고생 끝이라는 말을 했다. 삼년을 썩는 동안 미란은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은 탐내지 않기로 했고, 불가능한 것이나 미래를 기다리지 않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라는 말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냥 편안하게 외워보세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미란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오교수의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간혹 등을 서늘하게 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시를 외웠다.

 

죽은 채로 이렇게 살겠다, 불끈 쥔 주먹 같은, 숯 검덩이 가슴 같은, 아니, 시커멓게 타버린 눈물 같은 솔방울 몇 개 달고, 철 안든 대나무 곁에 서 있다…**

좋아요. 미란 씨가 내 일을 하는 데는 적격입니다. 나는 학생들한테 시를 가르치고, 시 평론서를 씁니다. 평론서가 더 유명하죠. 시론을 쓰는 것이나 강의준비는 근로 장학생이 도와줍니다. 시 낭송도 하죠. 그런데 그 애들은 시를 모르거나, 인생을 모르니까 아무리 그럴싸하게 낭송을 해도 내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하죠. 방송국의 아나운서를 사서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너무 매끄럽기만 한 여자를 만질 때처럼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할 때가 많아요. 매끄러운 피아노를 만졌을 때처럼 말이오. 나는 거친 나뭇결까지 느껴야 하는데. 미란 씨의 목소리는 뭐랄까, 달항아리 같다고 할까요. 아무 그림도 없이 깨끗하고 하얗지만 만지면 어쩐지 투실할 것 같은 항아리 말입니다. 자신이 할 일이 너무 간단해서 미란은 그것만 하냐고 물었다. 내일은 수업이 세 시간밖에 없으니까 이걸 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미리 읽어 오시면 좋고요. 오교수는 책 한 권을 미란 앞의 책상 위로 던졌다. 오교수의 검은 안경 속에는 집어 들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하는 미란이 들어 있었다. 미란은 속으로 한숨을 쉰 뒤 책을 집어 들었다. 날 보고 오교수의 안경이 되라니. 그것도 도수만 높은 안경이 되라니. 그러나 미란은 시를 낭송했고, 어머니한테는 조교 비슷한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오교수가 집으로 부른 뒤부터는 논문심사나 평론서 때문에 일이 많다고 했다. 미란은 가끔 생각했다. 오교수가 앞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고용했을까하고.

 

새벽에 오교수의 집에서 나온 미란은 양귀비 밭으로 갔다. 꽃 속에서 오줌을 누었다. 오줌은 질금질금 나왔다. 찢긴 성기에는 붉은 줄이라도 생긴 듯 쓰리고 아팠다. 양귀비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을 때까지만 만져야 한다. 거기서 더 만지면 시들어버린다. 미란은 멧돼지 가죽을 꺼내 뒤집어썼다. 처음 오교수의 집에서 나왔을 때 아무 곳으로나 걸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 산 위에는 시커먼 구름이 엉켜 있었는데 왼팔과 주먹에 힘을 잔뜩 준 채 울부짖고 있는 거인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들이박으려고 맹렬하게 달려가는 힘센 멧돼지 같기도 했다. 오교수의 수족이 되어 태국에 갔을 때 시장에서 멧돼지 가죽을 보자 그 날 새벽에 본 시커먼 구름과 거인과 멧돼지가 떠올랐다. 망설이지 않고 비싼 값에 가죽을 샀다. 호텔에서 멧돼지 가죽을 쓰고 물어뜯을 듯이 오교수에게 달려들어 보았다. 오교수가 겁먹은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분노가 삭았다. 아니 새어나오는 분노를 멧돼지 가죽으로 덮어버렸는지도, 나약한 자신이 멧돼지 속으로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란은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했다. 멧돼지는 길고 뭉뚝한 코로 흙을 파 올렸다. 흙이 콧구멍을 막았고, 흙먼지가 눈앞을 흐리게 했다. 양귀비꽃은 붉은 나비들 같았다. 찬 공기가 양귀비 밭을 훑고 가는지 붉은 나비들이 파르르 날갯짓을 했다. 그 날갯짓에 어쩐지 허영이 느껴져 멧돼지는 코 부분을 치켜들고 그 밑의 입을 벌려 나비 한 마리를 물었다. 건너편 국도에는 횟감을 실은 활어차나 양파를 실은 트럭이 간혹 지나다닐 뿐이다. 내일은 박 군수의 장례식이다. 멧돼지는 바쁘게 걸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땅을 파헤쳤고, 양귀비꽃이 픽픽 쓰러졌다. 멧돼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오전까지 기다려보고 그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면 경찰서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멧돼지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양귀비꽃 속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양귀비꽃들도 부드럽게 멧돼지를 감쌌다. 메밀밭 속에서 먹이를 뜯고 있던 조랑말 중 한 마리가 멧돼지를 보자 앞발을 치켜들며 제법 용맹스럽게 울었다. 멧돼지는 두 귀를 뒤로 젖히고 껄껄 웃었다.

 

미란의 어깨에 걸린 가죽이 든 가방과 부딪쳐도 청년은 검붉은 얼굴을 쳐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가방을 추켜올리며 미란은 청년에게 물었다. 넌 보지 못했니?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니? 청년은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갔다. 청년의 바틱 셔츠 자락이 펄럭였다. 범선의 돛이 부풀어 올랐고, 종려나무의 잎사귀들도 앞쪽으로 쏠렸다.

 

어제 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미란은 새삼 배반감을 느꼈다. 고개를 꺾고 기암괴석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제와 달라진 건 그림자 각도뿐이다. 팔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오후 두 시였다.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하나 없을까. 미란은 답답했다. 빠른 걸음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여시골 마의 고개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거푸 배반감을 느꼈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본 것이 박 군수가 맞는 것일까. 어머니도 박 군수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양파 경작지에서 들었다고 했다. 미란은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어머니도 오교수처럼 펄쩍 뛰었다. 잘못 나섰다간 네가 그 꼴을 당한다. 내 말 명심해라. 알겠나? 그렇지만 엄마, 억울하게 죽었을 수도 있잖아요. 시끄럽대도!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너도 진숙이처럼 츄리닝구 입은 채로 나가 못 돌아오고 싶나? 알아들었나? 내 말? 미란은 고인돌 위에 올라앉았다. 돌아, 정말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니? 말 좀 해봐, 응? 응, 난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넌 겁쟁이구나. 너야말로 겁쟁이 아니니? 미란은 벌떡 일어섰다. 나무들과 무덤들이 땡볕 안에 갇혀 꼼짝 못했다. 도로 주저앉으며 가방에서 멧돼지 가죽을 꺼내 썼다. 멧돼지는 앞발을 치켜들고 야아, 하고 포효했다. 함성소리는 편백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를 돌아 산등성이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화답이라도 하듯 뻐꾸기가 울었다. 멧돼지는 조금 나른해졌다. 갑자기 흙먼지가 멧돼지의 콧구멍을 막았고, 눈을 뒤덮었다. 멧돼지는 앞발로 앞을 헤치며 흙길을 살폈다. 검은색 그랜저가 지나가고 있다. 백미러로 멧돼지를 지켜보고 있는 눈길이 느껴졌다. 저 차는 뭘까. 멧돼지는 고인돌 위에서 뛰어내렸다. 지나가던 빨간색 승용차 안에서 여자 운전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멧돼지는 흙을 파 올리며 맹렬하게 뛰어갔으나 검은색 그랜저는 보이지 않았다.

 

국도변에는 수박이나 딸기를 파는 트럭들이 늘어서 있다. 통닭을 파는 트럭에는 한 줄에 꿰인 닭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기름을 뚝뚝 흘렸다. 미란은 물을 뿌리고 가는 살수차 꽁무니를 따라갔다. 땡볕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밭둑의 호박잎이나 머위는 접힌 우산처럼 후줄근했다. 멀리 생기를 빼앗긴 양귀비꽃들이 보였다. 미란은 빠르게 걸었다. 트럭이 등을 칠 것 같았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육교를 지나고, 다리를 지나자 경찰서가 보였다. 성큼성큼 경찰서로 걸어갔다. 경찰서 앞에서는 퉁방울 같은 눈을 가진 경찰이 셔츠단추를 한 칸씩 내려 비뚤어지게 잠근 중년남자를 호송차에 밀어 넣고 있었다. 내가 왜 이걸 타. 호송차에서 뛰쳐나온 중년남자는 골목 쪽으로 달아났다. 서, 서, 안서면 쏜다. 경찰은 오 분 내로 차에 타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중년남자의 등이 멈칫했으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K시 경찰서까지 보내요? 라고 발악을 하며 달아났다. 서, 서라니까. 경찰이 중년남자 등을 향해 가스총을 발사했다. 중년남자는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미란은 돌아섰다.

 

산등성이에 걸쳐진 붉은 해는 가장자리가 점점 얇아지면서 너덜거리더니 양귀비 같아졌다. 청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농로 위를 걷고 있었다. 검붉게 익은 청년의 옆얼굴을 보며 미란은 물었다. 넌 왜 하루 종일 걷기만 하는 거니?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왜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계속 여기만 뱅뱅 돌고 있는 거니? 그리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니? 청년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훑었다는 느낌에 미란은 얼른 청년의 눈을 붙들었다. 그러나 청년은 앞으로 한 발짝 더 걸어간 뒤였다. 청년의 바틱 셔츠가 체크무늬 셔츠로 바뀐 것을 알아챈 것은 그때이다. 미란은 양귀비 밭으로 들어갔다. 양귀비꽃은 점점이 흩어졌다가 출렁거리며 한 덩어리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들었니? 그 말”
농로 위를 나른하게 걷던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말했다. 미란의 귀가 커졌고, 얼굴이 밝아졌다.

“이 양귀비 밭에 멧돼지가 나타난대.”

미란은 실망했다. 양귀비 밭에 주저앉고 싶었다.

“저기 저, 태풍에 쓰러진 것 같은 꽃대들도 멧돼지가 파헤쳐놓은 거래.”

“어머, 무서워라. 멧돼지는 사람을 물어뜯기도 하잖아. 요새 정말 멧돼지가 있긴 있어?”
“왜 없어. 저기 산에서도 봤다고 하는데. 무덤 주위를 떠돈다고 하던데.”
“아, 무섭다. 이곳도 이제 마음대로 못 다니겠어. 얼른 개장을 해야지. 군수가 죽었으니까 이젠 개장하겠지?”

미란은 배꼽을 쥐고 웃고 싶었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오교수였다.

 

새벽에 오교수의 집에서 나온 미란은 양귀비 밭으로 갔다. 꽃 속으로 들어가 오줌을 누었다. 오줌은 질금질금 나왔다. 성기는 완전히 시들어버린 꽃잎이었다. 미란은 멧돼지 가죽을 뒤집어썼다. 양귀비꽃들이 멧돼지를 가두었다. 멧돼지는 길고 뭉뚝한 코로 흙을 파 올리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땅을 찍으며 양귀비 밭을 돌아다녔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멧돼지를 가두었던 양귀비꽃들이 픽픽 쓰러졌다. 마치 멧돼지가 피를 뚝뚝 흘리고 지나가는 것 같다. 멧돼지는 앞발을 치켜들고 야아, 하고 포효했다. 테마파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박 군수의 장례식 날이다. 어젯밤도 미란은 오교수와 함께 지냈다. 그가 왜 심란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여서인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힘들어서인가. 미란은 오교수에게 물었다. 혹 새로운 소식은 없는가. 누가 정수리를 찍는 것을 봤다고 경찰서에 신고를 한 사람은 없는가. 박 군수의 사고에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은 없는가. 오교수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사만 해보면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걸 금세 알 텐데요. 미란은 짜증을 냈다.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하나 없을 수 있어요. 미란은 거푸 짜증을 냈다. 오교수는 착잡한 표정으로 미란을 검은 안경 안에 가두었다. 이맛살을 찡그린 미란이 검은 안경 속에 갇혀 있었다. 오교수는 손을 뻗어 미란의 어깨를 만졌다. 미란은 옆으로 비껴났다. 오교수는 손으로 허공을 저으며 어디 있는지 물었다. 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교수는 맹렬하게 손을 휘저었다. 미란은 위협을 느낀 동물처럼 오교수의 손 밑에 어깨를 대어주었다. 오교수는 손등으로 천천히 미란의 목을 쓰다듬었다. 좀 더 기다려보자. 당장 이 일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 미란은 가슴 쪽으로 오고 있는 오교수의 손을 도끼로 찍어버리고 싶었다. 멧돼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경찰서에 가면 오교수와의 관계가 밝혀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놈들이 능글능글한 낯빛으로 믿어주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물으며 사건의 본질을 흐려놓으려고 해도 가서 말해야 한다. 만약 경찰서에서 믿어주지 않는다면 유족한테라도 가서 알려야한다. 그들 역시 믿으려하지 않아도 말은 해주어야 한다. 이젠 좀 가벼워지고 싶었다. 멧돼지는 양귀비꽃 속을 바삐 걸었다. 마음이 바빠 뒷발로 막 뛰어갔다. 멧돼지는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팍 고꾸라졌다. 몸을 움츠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두꺼운 그물망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멧돼지는 망에 동그랗게 갇힌 채 위로 끌려올라갔다.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들이 기중기로 멧돼지가 갇힌 망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멧돼지는 포획 당했다.

 

양귀비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점점이 흩어졌다가 한 덩어리로 모여들며 나른하게 흔들렸다.

 

*박형준의 유성 **나호열의 청간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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